QT묵상 2012.8.13 눅11:37-54 <나의 속 보여 드리기>
힘찬 월요일 아침입니다. 저는 40절을 붙들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나의 겉을 만드신 그 분이 내 속도 만드셨다는 이 말씀을 붙잡고 주님 앞에 무릎 꿇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셨던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화를 제일 많이 내셨을까? 이것이 본문의 주제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던진 분노의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이 선언이 본문에서만 6번 나오는군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예수님의 저주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평토장한 무덤과도 같은 그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가졌음에도, 자기네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까지 막았습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의 피를 흘리게 했고, 마지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 피의 값을 그 세대가 담당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저주받을 만 합니까? 예, 그렇지요.
그러면, 나는? 현대를 사는 나는 바리새인의 범주에 벗어나 있는 것일까? 나의 겉과 속은 다를까, 같을까?
내가 뭘 잘났다고 그들과 다르겠습니까?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바로 내 마음이지요.(렘17:9) 그 터진 웅덩이(렘2:13)에 내 스스로 물을 담아 채워 보려고 갖은 애를 써 왔었습니다. 그러나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고 하나같이 모두 비뚤어져 있었습니다.(시14:3) 그렇습니다. 복음을 접하기 이전의 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때로 예수 밖에 있을 때에는 똑같았습니다. 위선과 외식이 가득한 나를 너무나 자주 발견합니다.ㅠ.ㅠ.
어떻게 해야 할까? 겉을 만드신 그 분이 속도 만드셨는데... 저는 말씀 속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제목에서와 같이, 내 속을 그냥 그대로 그분께 보여드리는 것이지요. 숨길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내 겉보다도 훨씬 더 내 속을 훤히 들여다 보시는 분인데..ㅋㅋ 감출 게 있어야지요. 그냥 그분 앞에서 발가벗으면(?) 되는 거지요. 뭐가 부끄럽겠습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오늘날의 나를 계획하시고 작정하셔서, 내 형질을 그대로 다 조성하셨습니다.(시139:16) 그렇게 나를 미리 정하셨고, 정하신 나를 그렇게 부르셨고, 부르신 나를 그렇게 의롭다 하셨고, 의롭다 하신 나를 그렇게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롬8:30) 아, 좋으신 주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 칼날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사람의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 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길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히4:12-13)
그렇지요? 적나라한 내 속을 주님 앞에 그대로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QT묵상 2012.8.14 눅12:1-12 <또 다른 보혜사>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저는 오늘 아침에 10절 말씀을 잡았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조금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하여 한 번이라도 목사님들의 설교나 주해를 본 분들이라면, 크게 난해할 부분은 또한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자'와 성령을 어떻게 차별화하면 되겠는가가 핵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는 그 당시 공생애를 사셨던 예수님 자신을 뜻하고, 성령은 앞으로 영으로 임하실 예수님을 가리킨다, 제가 이해한 바는 이러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보혜사.. 이것이 무엇을 지칭함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바로 뒤에 이어서 선언된 예수님의 말씀이셨지요. 그렇습니다. 보혜사 성령이시지요. 제가 주목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를.. 영어 NIV 성경은 "another Counselor"로 되어 있군요. 다시 말하면, 오실 보혜사 성령님은 처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 별도의 보혜사가 또 있었다는 얘기지요. 그게 누굴까? 아, 예수님... 그 때 당시 이 사실을 말씀하시던 예수님이 첫번째 보혜사시요, 이어 오실 두번째(또 다른) 보혜사가 성령님이시라는 겁니다.
8/1일자 큐티(인사이더 vs. 아웃사이더)에서 나눈 베드로의 3기 인생을 기억하시나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1기, 예수님의 공생애에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2기, 마지막 3기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임한 성령님을 만난 이후의 3기였지요. 즉, Out of Jesus의 1기 -> Beside Jesus의 2기 -> Within Jesus의 3기였습니다. 이 깨달음에 비추어 본문 1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조명합니다.
.인자 - 첫번째 보혜사 - 육체로 임하신 예수님
.성령 - 두번째 보혜사 - 영으로 임하신 예수님
이렇게 다시 쓰면 어떨까요? "첫번째 보혜사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두번째 보혜사를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2000년전 육체로 임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이제는 영으로 나에게 임하신 것이지요. 영으로 임하신 예수님은 시공의 제약이 없으실 뿐더러, 나를 위하여, 내 안에서, 보혜사로서의 완전한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십니다. 내가 순종하는 그 부분(Portion)만큼.... 이것이 오늘날 제가 모시고 사는 성령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령님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지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또 다른 보혜사.. 즉, 나에게 주어진 두번째 보혜사이시요, 마지막 보혜사이시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요1:14 말씀을
오늘을 사는 나에게 적용시켜 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의 가운데 거하시매,
내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사는 나
그런 나에게 임하신 예수의 영..
또 다른 보혜사..
그 분이 비천한 나의 가운데
말씀의 육신으로 거하시매,
오, 영광!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네!
예수의 성육신(成肉身)..
내게 나타난 제2의 성육신이시여..
아멘....
QT묵상 2012.8.15 눅12:13-21 <소유에 대한 세가지 원칙>
붙잡은 말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절)
본국은 쉬는 날이네요..^^ 오늘은 소유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한 때 두가지 책에 심취했었습니다. 에릭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와 법정 스님의 "무소유"였지요. 프롬의 책은 대학 시절, 법정 스님은 2000년대 초반에.. 둘 다 소유에 관한 인싸이트를 많이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뚜렷한 해답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소유에 대한 의미를 말씀 속에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제가 본 것은 아래의 세가지 핵심적 원칙입니다.(순수한 제 생각이라, 일반화하면 곤란합니다.^^)
첫째, 소유는 집착할 때 우상이 된다.
탐심이란 소유를 집착함으로 생기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탐심은 땅에 있는 있는 지체요, 우상 숭배입니다.(골3:5) 내가 극복해야 하고 물리쳐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왜, 탐심이 우상 숭배일까? 소유가 내 주인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탐심이 옴으로써, 그 탐심의 대상인 소유(돈, 물질, 명예, 도그마 등)가 나의 내적, 실질적 주인 노릇을 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16:13)고 경고하십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소유는 나의 주인이 되어 나를 거꾸로 찌르는 창과도 같습니다.(딤후6:10) 소유 중독만큼 고치기 어려운 질병도 없다고 합니다.
둘째, 무소유가 아니라 비소유다.
그렇다고 소유를 적대시하거나 배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본질상, 소유는 좋은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시라"(창1:28)는 하나님의 명령을 소유라는 개념이 없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소유는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소유는 내가 주인일까? 그렇지요. 당연히 내가 '1차적' 주인입니다. 단, 종국적 주인 (이를 창조하시고 나에게 선물로 주신 주님)은 아니지요. 이것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됩니다. 내가 소유의 종국적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만 마음 속에 인지하고, 이 바탕 위에서 소유를 '다스리고 정복'하면 됩니다. 즉, 소유에 대해서는 내가 청지기가 되는 거지요. 나는 종국적 주인을 대신해서 그 소유를 맡아서 잘 관리하는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눅12:42)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무소유는 틀렸습니다. 소유하되, 소유하지 않는... 비소유가 맞습니다.
셋째, 소유는 나눌 때에 생명력으로 바뀐다.
나의 소유는 나누라고 있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주라는 겁니다. 이것이 소유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샘물이 되려면 끊임없이 흘려줘야 합니다. 열린 출구가 없는 고인 물은 샘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명령임을 믿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a)
무엇을 나눠줄 것인가? 내가 가진 것으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3:6)
나눔 중에 가장 큰 것... 그것은 내가 가진 '예수'를 나눠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처럼, 예수의 이름을 내 이웃에게 전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본문 21절)가 되는 길임을 믿습니다. 아래 나눔의 노래(이전에 쓴 자작시입니다^^)를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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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노래
나눔은 분깃신앙입니다.
그 분만이 유일한 나의 분깃입니다.
그 분만이 내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적신으로부터 와서 적신으로 돌아갑니다.
그러기에 나눔은 청지기 인생입니다.
내 가진것은 본래 내것이 아니므로,
분깃으로 맡겨주신 그것을
오늘도 나누며 살아 갑니다.
나눔은 '내가 먼저'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내 속눈치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한 우러나옴으로 내가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눔은 자기 포기이자 희생입니다.
나를 죽임으로,
나를 비움으로,
나눔의 꽃은 피기 시작합니다.
나눔은 나눌수록 커집니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입니다.
다섯 달란트가 열 달란트 되고,
열 달란트는 이십 달란트가 됩니다.
그러기에 나눔은 뻥튀기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나눔은 헤아리지 않습니다.
나눔은 속이지 않습니다.
나눔은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종국적 보상은 단지 그 분과의 가까와짐입니다.
그러기에 나눔은 일방통행입니다.
나눔은 나로부터 남에게로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남으로부터 나에게 다시 오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의 공급자는 오직 그 분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샘물입니다.
멈추어 고여있지 않습니다.
나눔은 쉴새없이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움켜쥠이 없이 훨훨 날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눔은 파이프입니다.
파이프의 한쪽은 원천이신 그 분에게,
나머지 한쪽은 나눠줄 이웃에게 통해 있습니다.
어느 쪽 막힘이 없이 뚫려 있어 잘 흘러갑니다.
나눔은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 분께 받은 긍휼을 그대로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나눔은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 이루신 화평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눔은 핍박을 두려워 않습니다.
긍휼과 화평을 나눌 때 세상은 나를 싫어 하지만,
나눔의 근원이신 그 분을 전할 때 그들은 나를 핍박하지만,
나는 의되신 그 분만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QT묵상 2012.8.16 눅12:22-34 <더함과 더하심>
오늘 본문은 정독을 통한 국어 공부(?)가 요구되네요. (사전에 본문을 읽어 보시면 더 좋습니다.^^)
(붙잡은 말씀)
더함 -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5절)
더하심 -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31절)
(붙잡은 단어와 의문점)
little thing (:26) - '작은 일'은 과연 '다른 일들'보다 진짜 더 작은 걸까?
little faith (:28) - 작은 믿음은 '가장 작은 일'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일들' 때문일까?
little flock (:32) - 적은 무리들이 무서워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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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공부라고 했는데,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 수사법은 무엇일까? 비유법과 점층법이지요. 사람의 방식을 다른 사물(까마귀와 백합화)에 비유하셨고, 의미를 강화하기 위해 점점 더 커지는 점층법을 여기저기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읽을 수록 재미가 솔솔 넘칩니다. 이에 따라, 저는 키워드를 더함과 더하심으로 잡았습니다. 점층의 핵심이자, 사람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영어 단어 Little에 대한 점층적 비유도 재미있습니다. Little이 Thing에서 Faith로, 다시 Flock으로 갑니다.
비유법은 따로 찾아볼 필요가 없겠지요? 까마귀는 음식과 비교한 대상이고, 백합화는 의복과 대비되어 있지요. 점층법을 저는 아래와 같이 세 군데서 발견합니다.
1) 중요도에 대한 점층: 먹고 마시는 것 -> 몸과 목숨 -> 하나님의 나라
2) 사람의 감정에 대한 점층: 염려 -> 근심 -> 무서움
3) 크기에 대한 점층: (하찮은) 다른 일들 -> 작은 일 -> 하나님의 일
각 부문별로 1단계, 2단계, 3단계로 커지는데, 서로 간에 레벨은 같습니다. 즉, 중요도의 1단계는 먹고 마시는 것인데, 이는 감정의 1단계인 염려와 연관이 있고, 이는 또한 크기의 1단계인 다른 일들입니다. 크기에 대한 점층은 약간의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지칭하는 '가장 작은 일'은 '그 키를 한 자 더하는 일'입니다. 우리 성경은 '가장 작은 일'로 번역했지만, 실제 뜻은 'this very little thing' 즉, '이 아주 작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전체 문맥에서 보면, 이어 나오는 '다른 일들'(먹고 입는 것)이 실제로는 몸과 목숨(키를 더하는 것)보다 작은 것이겠지요.
요약하자면, 세상 사람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그들의 1차 관심사는 오로지 먹고 입는 것 뿐입니다. 사람은 먹고 입어야(입에 풀칠을 해야^^) 몸과 목숨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보니, 아주 작은 일(몸과 목숨을 위하는 일)도 아닌 하찮은 다른 일들(먹고 입는 것)에 매여서 하루하루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합니다. 마지막 관심사인, 하나님의 일에는 두려워 하기만 할 뿐입니다.
세상 사람의 방식에 반하는 다른 방식이 또한 나오지요. "믿음이 작은 자들아.."(28절) 신자의 방식입니다. 여기에서의 신자는, 아직은 작은 믿음을 소유한 제자들(22절)이겠지요. 신자도 세상을 사는 방식이 똑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신자에게 새로운 방식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방식이지요. 세상의 방식은 작은 일부터 하는 것입니다. 먼저 먹고 마셔야 하고, 그 다음 몸과 목숨을 위해야 하고, 마지막(시간이 된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방식은? 큰 것부터 밑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일, 그 다음은 내 목숨과 몸을 위해, 마지막으로 일상적인 먹고 입는 것이겠지요.
그 근거는 무엇일까? 더하려고 하지 말고, 더하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더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신자의 1차적 관심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습니다.(눅12:7) 공중의 까마귀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듯이, 신자의 필요를 일일히 다 채워 주십니다. 염려하거나 근심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단, 신자가 한가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절) 더하심의 법칙이지요. 자꾸 스스로 더하려고 하질 말고, 더하심을 바라라. 가장 큰 것을 먼저 구하면, 나머지 것들은 자동으로 더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호박이 넝쿨째..ㅋㅋ 큰 호박 하나만 땄는데 그 호박에 줄줄이 붙어서 작은 것들이 따라 오는 거지요. 아직은 Little flock(적은 무리)에게 예수님이 당부하시는 말씀은, 제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겁니다. 그 나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넝쿨째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처럼 무서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는 말씀이겠지요.
믿음이 작은 자들아....... 아, 답답이야~ 만일 예수님의 이 답답함을 가슴으로 이해하셨다면, 오늘 큐티는 성공이겠지요.^^
QT묵상 2012.8.17 눅12:35-48 <주인의 마음>
(붙잡은 말씀)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6-38절)
(참조한 말씀)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눅17:7-9)
눅17장의 주인- 주인은 높은 사람입니다. 주인은 종을 거느리고 있지요. 집안일, 바깥일, 농사일 등 허드렛일은 종의 차지입니다. 종은 하루 종일 일해야 합니다. 낮에는 주로 밖에 나가서 일하고, 저녁에는 집안으로 들어와서 주인을 돕습니다. 주인의 식사도 준비하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서서 잘 모셔야 합니다. 주인이 잠자리에 들어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며 자신도 그제야 식사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주인도, 종도 불만이 없습니다. 주인은 주인의 역할을, 종은 종의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이지요. 보통 주인 이야기지요.
눅12장(본문)의 주인- 이 주인은 더 높은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앞의 주인은 종이 한 명이지만, 이 주인은 여러 명입니다. 주인은 그 날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결혼 잔치가 있어서 참석하고 아주 늦게야 집에 돌아 왔습니다. 자정이 넘어 새벽이었습니다. 집안이 환했고 종들이 금방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식사라도 했냐고 물었더니, 종들이 왈 "주인님이 밖에 계신데 저희가 어찌 먼저..." 주인의 피곤했던 마음이 싹 가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그렇게 기다려 준 종들에게 미안한 맘이 들었습니다. 종들을 앉히고 자신이 식사를 수종듭니다. 종들은 황송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착한 주인 이야기지요.
본문에 나오는 주인은 참 착한 주인입니다.
보통 주인과 착한 주인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온유의 마음이 아닐까?
Coram Deo ! (꼬람데오; 주님 앞에서)
나보다 더 높은 이를 항상 의식할 때..
긍휼의 마음이 아닐까?
Compassion !
상대의 마음에 기꺼이 나를 맞출 때..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Always Special !
내 일들이 일상(日常)이 아닌 비상(非常)임을 깨달을 때..
아, 주님의 마음이 아닐까?
만유의 주인이심에도 기꺼이 종으로 오신 그 마음..
하나님의 본체임에도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오신 그 마음..
자기를 비워 아버지께 항상 복종하신 그 마음..
모든 일상(日常)을 비상(非常)으로 처리하신 그 마음..
끝내 죽으심의 순종에 이르기까지....
QT묵상 2012.8.18 눅12:49-59 <내게 던져진 불>
붙잡은 말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49절)
붙잡은 단어
1) 세례 (50절)
2) 분쟁 (51-53절)
3) 분별 (분간- 56절, 판단- 57절)
4) 갚음 (59절)
내게 던져진 불
주님께서
내게 던지신 불
내 온 몸에
번지기 시작한
예수의 불
첫번 째
내 가슴에 던져진 불
세례의 불
물이 아닌 불 세례
그 뜨거움이 답답함으로 밀려오니
이상하지 않은가?
두번 째
내 손과 발에 던져진 불
내 혀에 던져진 불
내 말과 행동거지가 달라짐으로
화평 아닌 분쟁이 생기니
황당하지 않은가?
세번 째
내 얼굴에 던져진 불
내 눈이 환해지고
내 머리가 밝아지어
분별이 절로 되네
찬송 받으소서!
네번 째
내 뱃 속 가득히 던져진 불
앗, 뜨거워..
그리 씨름했던 내 마음
그 정과 욕심이 남김 없이 타오르네
아, 갚음의 주님..
오, 당신의 불!
내 가슴에 던져 주시는 세례의 불
내 손발과 혀에 붙여 주시는 분쟁의 불
내 얼굴에 부어 주시는 분별의 불
내 뱃속 가득히 채워 주시는 갚음의 불
내게 임하시옵소서.
성령의 불이여!
나를 당신 가운데 던지소서.
예수의 불이여!
나를 변화시키소서..
소멸하는 불이여!
타오르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 없어 그저 있는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 보여드리면 되는데, 그런데도 전, 자꾸만 너울을 쓰고 싶어하니요.ㅠㅠ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없었던들 숨이라도 쉴 수 있었을런지요... 그 사랑이 때문에,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신 사랑 때문에, 그래서 가슴 절절이 감사의 찬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