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은 말씀)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눅11:34-36)
지난 9월29일 오전에 교회의 양육자 스쿨에서 순종에 대한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은혜받은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강의를 듣는 어느 시점에서 "빛되신 주님"에 대한 부분이 나오면서, 빛에 대한 여러 말씀들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말씀의 조명 속에서 나에게 빛은 무엇일까? 그러면서 저는 빛에 대한 아래 세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1)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일1:5)
2)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4)
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
결국 위 세 말씀을 종합해 보면, 나에게 빛은 하나님 자신이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시요, 또한 그 분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를 묵상하다가 눅11장의 본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35절을 만나면서 제 눈에 불똥이 튀겼습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이 귀절이 의미하는 바는 아래 두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1) 내 속에 빛이 있다.
2) 그 빛이 때로는 어두울 수도 있다.
갑자기 제 마음이 밝아져 옴을 느꼈습니다. 내 속에 있는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입니다.(요1:4)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내 속에 들어오신 성령, 곧 예수님의 영이시지요. 그 성령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 분께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요일1:5) 그런데, 그 성령의 빛이 어두워질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내 속에 계신 주님의 빛이 어두워 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제겐 너무나 명확했습니다. 주님의 빛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것이지요. 주님의 빛을 담고 있는 바로 내가 문제이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빛은 늘상 비추이지만, 그 빛을 차단하고 가로막는 '무엇'이 나에게 있어서, 그 때문에 어두워진다는 뜻이 아닐까요?
생명의 빛되신 주님을 차단시키는 내 안의 '그 무엇'은 뭘까? 이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제가 발견한 그 무엇은 아래 세가지였습니다.
1) 내 마음의 질그릇 (고후4:6-7)
2) 내 얼굴의 수건 (고후3:13-18)
3) 내 눈의 비늘 (행9:18)
첫째, 내 안의 빛을 차단시키는 것은 내 마음의 질그릇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내 마음에 비추게 하셨습니다.(고후4:6) 내 마음은 마치 질그릇과도 같습니다. 그 빛의 보배가 질그릇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고후4:7) 빛이 밖으로 드러나려면 나의 질그릇을 통과해야 합니다. 만일 내 질그릇이 온전히 그대로 있다면, 빛이 투과할 곳은 윗쪽의 좁은 입구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의 아름다운 빛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질그릇이 깨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곳곳에 구멍이 뻥뻥 나야 합니다. 많이 깨지면 깨질수록, 질그릇 속에서 드러나는 빛의 강도는 더 높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내 마음의 질그릇을 마치 고려 청자인양 금이야, 옥이야 감싸고 있었던 것이지요. 혹시라도 깨질까봐, 어디 금이라도 가지 않을까, 흠집이라도 생길까봐, 밤낮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같이, 내 마음의 질그릇은 반드시 깨져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질그릇이 깨져 새어나온 빛을 차단시키는 것은 내 얼굴의 수건입니다.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가 쓰고 있던 수건입니다. 그는 정죄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그 얼굴에 나타나 있었던 한시적 영광의 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얼굴에 수건을 쓰고 있었습니다.(고후3:7, 13) 그러나 이 수건은 완고한 마음의 상징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져야 할 것이었습니다.(고후3: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세처럼 때로는 완고함의 수건을 내 얼굴에 걸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내 안에 있는 영광의 빛은, 모세가 받은 정죄의 직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의 직분이요, 의의 직분인데도 말입니다.(고후3:7-11) 이제 내가 할 일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내 얼굴을 싸고 있는 수건을 과감히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그 수건이 벗겨질 때, 나는 자유의 영을 만납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릅니다.(고후3:17-18)
셋째, 내 얼굴을 통과한 빛을 차단시키는 것은 내 눈의 비늘입니다.
스데반 등 초대교회 성도들을 핍박했던 청년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 빛으로 인해 눈이 멉니다. 사흘 동안 금식한 후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를 만나 안수를 받음으로 그의 눈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 과정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9:18)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재미있습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11:34) 내 영적인 눈이 성하려면, 내 눈을 덮고 있는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눈이 등불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내 밖의 빛을 안으로 들여오는 것보다는, 내 안의 빛을 밖으로 보내는 눈의 역할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럼으로써, 내 속에 있는 주님의 빛은 최종적으로 나의 눈을 통해 외부적으로 드러나게 되겠지요. 핍박자 사울은 눈의 비늘이 떨어짐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제 깨달음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내 속에 있는 주님의 빛은 '나'라는 장애물로 어두워 질 수 있다.
- 내 마음의 견고한 질그릇은 깨어져야 한다.
- 내 얼굴의 완고한 수건은 벗겨져야 한다.
- 내 눈의 무지한 비늘은 떼어져야 한다.
빛되신 주님!
제 안의 보배되신 주님!
주님이 제 안에서 여과없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의 질그릇을 부수어 주시옵소서.
제 얼굴의 수건을 벗겨 주시옵소서.
제 눈의 비늘을 떼어 주시옵소서.
부족한 저로 주님의 영광의 빛을 보게 하옵소서. 아멘.
그렇게 십자가 앞에 엎드리길 너무도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긍휼 안에 있는 자로서 자주 모세의 수건으로 얼굴 가림의 겸손을 배우지 못할 때가 많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각의 틀에 맞추지는 않는지,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어떠함에 사용하진 않는지...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