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명
언제부턴가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을 때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사들에 대한 실망을 너무 많이 경험하다보니 자연스레 형성된 일종의 방어 본능적 현상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자칫 편향된 태도로 고착될까 걱정되므로 요즘은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검토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곤 합니다.
어쨌든 저는 목회자들의 가시적 성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또 매끄럽고 논리적이며 확신에 찬 주장들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세계최대의 교회를 설립했다든지, 목적지향적 사고방식을 권장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제게 아무 감흥도 유발시키지 못합니다. 이런 성취는 일부 성공한 목사들보다 훨씬 훌륭한 업적을 이룬 세상 사람들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은 이런 종류가 아닐 것입니다.
목사와 신학자 등 교회 지도층과 장로 등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은, 신앙이 깊어짐에 따라 점점 순수해지고 단순해지고 질박해져야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은 ‘촌스러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적 신앙은 촌스러운 것입니다. 매끄럽고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막연하게 기대하는 교회지도자상(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능력자들)도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 일그러진 모습일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과 구약 지도자들의 면면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쉽게 동의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지도자들에 관한 기대를 혁명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참 지도자의 전형적인 예를 보면서.....
최근 아주 훌륭한 모델이 될 만한 선교사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평소 생각하던 교회 지도자상과 크게 부합되는 내용이었기에 반갑고 흥분된 마음으로 읽었고, 따라서 그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선교사님의 책에서는 성경의 지도자들과 유사한 매우 촌스러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귀한 감동을, 독후감을 통해 간접 경험한다면, 너무 많은 것을 놓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꼭 직접 읽어 보시기를 권해 드리면서, 여기서는 몇몇 구절을 간단하게 소개만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우리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이 가지신 비전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 비전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다. 내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것을 붙드는 것이다.”(p.80).
◎ “이곳에서 사역하면서 물질에 대해 정직한 리더를 만들지 못하면 사역은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p.108)
◎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p.133).
◎ “여러 내려놓아야 할 것들보다 훨씬 더 내려놓기 힘든 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이다.”(p.155).
◎ “보스턴을 떠나 새로운 장막터 몽골로 가기 전 오명이어 선교회의 이용숙 회장님이 우리 부부에게 당부하셨다. ‘실패해도 좋습니다. 교회 문 닫아도 좋습니다.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사역하십시오. 당신들은 이미 귀한 헌신을 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셨습니다.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p.175).
☞ 이 부분은 약간 부연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수년 전 몽골 선교사로 떠나는 분께 동일한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선교사님, 그곳에서 평생 단 한 명만 전도해도 성공입니다. 아니, 한 명을 전도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선교사님의 삶을 보고 당대에 한 명이든 후대에 한 명이든 아주 극소수의 사람이라도 주님께 돌아올 수만 있다면 이는 대성공입니다. 단기간의 가시적 성과에 연연하지 마십시오.”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선교역사를 통해 위와 같은 사례를 종종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의 선교 욕심과는 차별되는 인식일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인들의 허물을 인정하고 품어주고 받아들여주는 것이 당신이 나에게 원하시는 목회라고 말씀하셨다.”(p.180).
◎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지 나의 사명이 아니다. 나의 사명은 그저 그 부족한 모습을 부등켜안고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p.180).
◎ “선교지에서 배운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은 선교 대상자의 변화가 아니라 선교사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p.191).
☞ 이러한 인식은 마땅히 목회자가 지녀야 할 올바른 생각입니다. 평신도의 변화를 요구하기 이전에, 목사 자신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럴 경우 성도들은 자동적으로 목사의 본을 보고 주님을 닮으려고 애쓰도록 변화됩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중요성입니다.
◎ “떠나기 전 툭수가 ‘언제 오세요? 선생님이 안 계시면 저희 마음이 힘들어요.’라고 말했던 것이 귓가를 맴돈다. 내가 특별히 하는 것이 없어도 같이 있으면 마음이 위로받고 편하다는 것이다.”(p.229).
♣ 마무리
몇 마디의 대표적인 구절들을 소개했습니다. 선교사님은 책 곳곳에서 “내려놓는다, 버린다.”는 말로써 ‘포기의 삶’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막연했던 성도의 실천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일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써 하는 설명들은 많이 들었습니다(거의 모든 목사님들의 설교가 이런 부류이지요). 그러나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경우는 별로 많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말과 행동의 일치가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에, 독자가 동의하지 않을 수 없고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역시 말로 소개하는 것은 효과가 적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말씀드린 바처럼 직접 읽고 느껴보시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몇몇 구절 소개만 하고 마치겠습니다(그러나, 이런 좋은 책에도 다소 미흡한 부분은 있기 마련입니다. 옥에 티라고나 할까요? 심심풀이로 살펴보기 원하면 별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평소 우리가 놓치고 있던 참 신앙 모습의 일면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진심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머리만이 아닌 삶으로써 깨우치신 참 진리의 한조각을 나눠주신 이용규 선교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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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지 : 앗! 옥에 티 발견!!!
하지만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아주 훌륭하신 선교사님의 생각들 중에도 신중하게 이해하여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한 곳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옥에 티라기 보다는, 선교사님의 인간적인 모습(한계)을 보여주는 하나의 바로미터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원문을 인용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 지도자를 판단하는 일은 우리에게 위임된 책임과 권한을 넘어서는 위험한 일이기에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루실 영역이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종의 모습으로 낮아지시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본성이 우리 안에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p.173).
참으로 은혜롭고 성경적인 말씀 같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목사님들이 면피용(책임회피용)으로 즐겨 사용하시는 말씀이기에, 평신도들이 항상 듣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비교적 타당하지만 우리는 좀 더 깊은 것까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 원문에는 상당한 오해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연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큰 시각에서 원문은 성도들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덕목입니다. 그렇다면 원문 자체는 맞습니다만, 적용대상에서 착각을 일으켰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즉, 이 자세를 지녀야 할 대상을 평신도로 제한시켜 버렸다는 점입니다. 잘못을 행하는 영적지도자들은 이 자세 이행 의무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지도자들에게 더욱 엄격히 적용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평신도와 지도자 중에서, 누가 더 낮아지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그리스도의 모습과 본성이 자라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평신도가 더 그래야 합니까? 아니면 지도자가 더 그래야 합니까? 답은 “모든 성도들이 그래야 하지만, 특히 지도자가 더욱 그래야 한다.”입니다. 따라서 원문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평신도들이 더 성숙한 지도자들의 잘못까지도 감싸줘야 한다는 의미가 되므로 논리적으로(당연히 성경적으로도) 틀린 생각이다.’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국 ‘지도자의 명백한 오류에 대해서도 모른 척 해야 한다.’는 뜻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야 할 생각입니다. 이 잘못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우리 신앙의 손실 사례를 찾는 것은 여반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영적지도자(주로 목사와 신학자와 선교사들)의 소명에 관한 오해입니다. 모든 목사들은 자기 자신의 직분에 대한 신적 부르심(소명)을 확신합니다. 이런 저런 설명들을 잊지 않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매우 신중한 성경적 검토가 요구됩니다만, 여기서 이를 다룰 수는 없겠기에, 매우 함축적으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신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목사로의 소명은 단순히 개인적 확신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객관적인 공증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무관한 거짓 선지자들이 무척 많으므로 조심할 것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현직 목사라 할지라도 부르심을 의심받을만한 이들이 많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이냐고요? 그 사람의 언행(열매)입니다! 만약 어느 목사의 행동에서, 평신도를 억압하고,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재정운용이 불투명하고, 이런 저런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리는 등등이 발견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항상 불완전한 자를 쓰실 수밖에 없으십니다(완벽한 자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적인 자질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확실히 경험했다면 그는 반드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된 모습도 없으면서 단지 목사 직분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명백한 오류(잘못)가 있는데도 이를 지적(판단)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선지자에게 속는 첩경일 수 있습니다. 만약 목사라는 직분을 수행하면서도 변화된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지도자 인정 여부를 진지하게 숙고해야만 할 것입니다.
셋째, 평신도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어느 성도가 만민교회나 구원파나 JMS 등 이단에 빠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 이단의 지도자들은 “나는 이단이니까 너는 속히 나를 떠나라.”고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나야말로 진정한 목사이므로 절대로 떠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들이 볼 때, 이단에 빠진 성도가 무척 불쌍해 보입니다. 자, 이제 그 평신도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어찌해야 합니까? 이단 지도자들을 성경에 비추어 검토하고 결국은 판정(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그 집단에서 뛰쳐나와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의 영혼이 삽니다. 자,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이재록이나 정명석이나 박옥수 같은 자들(소위 지도자들)입니까? 평신도인 성도입니까? 이 판단의 주체는 오직 평신도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진리를 알고 있는 성도들로부터 도움받기는 하겠지만, 최종적인 결단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평신도가 스스로 지도자(목사)를 판단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파에서 빠져 나온 성도를 잘했다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그 잘한 수단이 뭔지 아십니까? 그의 영혼이 살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은 바로 ‘판단’인 것입니다. 성경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확인한 결과인 것이지요. 이들은 명백한 이단이니까 쉽다고요? 아닙니다. 이단에 빠진 평신도 입장에선 절대로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좋습니다. 이단은 그만 둡시다. 현재의 범기독교 교파중에는, 관점에 따라 명백한 이단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교파들이 있습니다. 여성신학 해방신학 등을 포함한 자유주의파와 극단적인 은사주의파 등도 그렇고, 특히 천주교는 더욱 그렇습니다. 자, 여기에 소속된 성도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평신도는 일체 판단해선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그냥 그곳에 몸담고 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판단하고 나와야 합니까? 저는 평신도가 지도자들을 판단해 보고 절대적으로 뛰쳐나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모든 판단권을 하나님 당신께만 귀속시키시지 않으셨음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의 극단적인 오해 가운데 하나는, 최종적인 정죄권과 일상적인 판단권(선택권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을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최종정죄권은 오로지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성도의 생존기간 내에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판단권은 성도의 책무입니다! 성도는 때론 자유의지로서 당당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는 과감하게 이를 부정하고 떠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런 행동은 판단이 전제되지 않는 한 결코 행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판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아니 영적인 문제는 더욱 엄격한 판단을 해야만 합니다(모든 영을 다 믿으면 큰 일 납니다=요일4:1).
넷째, 참으로 어려운 면을 다루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우리는 흔히 “목사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목사의 잘못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징계하실 수 있다. 따라서 평신도는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묵인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원문의 뜻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징계를 하신 경우도 많지만, 모든 인간의 과오를 직접 처결하지 않으시고 그냥 지나치시는 경우가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상당 부분을 인간들에게 맡겨 놓으셨습니다(물론 그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잘못들을 즉결처분하신다면, ‘왜 세상에서 악을 제거하지 않으시는가?’라는 우문에조차 답할 수 없게 됩니다. 아무튼, 목사가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반드시 현생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잘못된 상태 그대로 목사 직무를 계속 수행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너무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지요(문선명 같은 이가 80세 넘도록 호의호식하며 장수하는 이유입니다). 도덕적 윤리적 문제 뿐 아니라 영적인 오류를 범해도, 목사 직무는 계속 수행하게 됩니다. 이때 평신도는 어찌해야 됩니까?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유혹에도 넘어가야 합니까? ‘기복신앙의 진수와도 같은 삼박자 축복론’에도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까? 아니면, ‘영적 피가름 행사’(통일교)에도 참여해야 합니까? 절대적으로 아닙니다! 성경은 영분별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 영분별의 임무는 지도자가 아닌 말씀을 받는 자들(평신도들)에게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영의 분별은 성도가 살아남을 수 있는 첩경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최종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의 인도를 받으면 어찌됩니까? 둘 다 구덩이에 빠집니다! 인도받는 자가 소경이라면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인도받는 자가 눈을 뻔히 뜨고, 소경 인도자의 잘못된 인도를 묵인한다는 것은 죄악입니다.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경고해야 합니다!!! “그리로 가면 하수구에 빠진다!”라고 말입니다. 이제 이 상황이 되면 항상 제기되는 우문(愚問)을 살펴야 합니다. 즉, 목사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대변할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말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목사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도록 제한하셨을까요? 만약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하루 속히 천주교로 개종하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훨씬 정통성을 지녔고 그 사상의 깊이가 깊기 때문입니다. 또 신부들의 윤리성이 목사들의 그것보다 훨씬 우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닙니다. 성경은 목사든 평신도든, 갈급한 심령으로 읽는 자에게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감동으로 깨우침 받은 진리는 서로 서로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영성이 깊은 목사가 더 많이 깨우침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평신도이기 때문에 성경을 전혀 깨우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어쨌든, 성경을 상고하여 ‘아니다’라고 깨우쳤다면, 직분이 무엇이든 간에 알려 주어야 합니다. 장로가 먼저 깨우쳤다면 미처 모르고 있는 목사에게 경고해 줘야 합니다. 안수집사가 먼저 깨우쳤다면, 이 경우 눈 뜬 자는 안수집사이고 목사는 소경입니다. 정말로 깨어있는 목사라면, 안수집사의 경고를 듣고, 곧바로 성경을 묵상하며 제 자리를 찾게 됩니다(즉시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는 목사는 진짜 소경일 가능성이 크다 할 것입니다. 교회란 각자 깨우친 하나님의 뜻을 서로서로 나누며 그에 따라 사는 삶의 현장입니다. 아울러 교회란 목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신도 한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임을 확인받는 곳입니다. 목사만 유일한 교회지도자라는 오해에서 벗어날 때, 현재의 교회 모습은 성경 본래의 의미에 보다 근접된 모습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뱀처럼 지혜로울 것도 요구합니다. 원문은 오직 비둘기만을 강조하고 뱀은 제거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관한 완전한 이해라 하기 어렵습니다. 반쪽짜리 이해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하겠습니다. 순수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비둘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를 슬기롭게 활용함으로써(뱀), 바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성도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