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창조주와 조물주의 차이)
뿌리가 뽑힌 진화론
최근 진화론의 허구성이 많이 드러났다. 대표적으로 화석은 오랜 세월에 걸쳐 동물의 시체 위에 흙이 퇴적되어서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오히려 순간적인 자연 격변 때문에 생물이 산 채로 흙에 완전히 매몰되어야만 생성된다는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장구한 세월에 걸친 점진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진화론은 화석으로 그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화석의 생성시간이 장구한 세월이 아님이 밝혀졌다는 것은 진화론의 존립근거가 뿌리 채 뽑혀버렸음을 의미한다. 진화론은 단지 과학적 이론(theory), 정확히 말해 가설(hypothesis)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조금만 이성이 깨인 사람들이라면 진화론의 주장이 옳으려면 지금쯤은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 형태가, 아니면 인간에서 발달된 슈퍼인간이 어딘가에서 반드시 발견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지금껏 인류 역사상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기에 진화론에 결정적 하자가 있음도 다들 눈치 채고 있다. 그럼에도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학교에서 진화만 과학적인 양 잘못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도 없는데 구태여 진화가 틀렸다고 말해봐야 자기만 비이성적인, 쉽게 말해 무식한 사람으로 몰릴까봐 두려운 것이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아주 확실한 진리가 하나 있다. 창조나 진화나 그 증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아주 비과학적인 처사라는 것이다. 둘 다 그 사안의 본질상 결정적 과학적 증거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또 설령 제시된 증거가 있다 해도 정말로 증거로서 객관적 타당성이 있는지는 인간이 판단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창조든 진화든 인간이 접촉하여 분석하고 판단할 범위(accessible limit)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먼저 창조는 하나님이 만물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인간은 창조의 대상일 뿐 아니라, 인간에게 이성이 생긴 것은 이미 창조가 완성된 이후다. 창조 자체의 증거를 인간이 알 수도, 내세울 수도 없다. 창조는 인간이 그냥 수긍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진화 또한 수십억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데 인간수명이 기껏 7,80년인데 어떻게 그 증거를 댈 수 있겠는가? 그나마 내세운 증거가 화석과 지질층이지만 생물 교과서를 새로 수정해야 할 만큼 완전한 근거가 되지 못함을 이젠 진화론자들이 오히려 더 잘 알고 있다.
진화론이 입증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제부터라도 체계적 과학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종의 생물을 수십억 년 간 관찰한 데이터를 모은 후에 판단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현재로선 아직 입증이 안 된 이론이라고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분명 그 때 가선 완전 허구임이 판명될 것이다. 먼 장래의 일을 두고 지금부터 옳다고 우기는 것도 웃기지만, 문제는 그 때가서 아직도 수십억 년이 더 필요하다고 말할까 걱정이다.
진화가 무조건 틀렸다는 말을 하려는 뜻이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창조나 진화나 인간이 과학적으로 입증할 대상이 아예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다 창조는 아예 증거가 필요 없음을 인정하고 시작하기에 구태여 그 증거의 많고 적음이 그 이론의 타당성과는 관계없다. 반면에 과학적 이론임을 자처하는 진화론은 그 객관적 증거가 생명인데 갈수록 오히려 그 증거가 줄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한 번도 진화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창조가 너무나 당연하고 또 그것을 입증할 증거가 필요 없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옛날 사람들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챨스 다윈이 결국 하나님이 없다는 데에 초점이 모이는 하나의 생물학적 가설을 발표하자, 안 그래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아주 합당한 핑계거리로 붙잡은 것이다. 거기다 창조는 증거와 무관하다는 그간에 공인되어 왔던 진리마저 걸고넘어지기 시작했다. 창조의 증거를 내놓을 수 없음을 이성적으로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점을 역이용하여 자기들 변절에 대한 억지 근거이자 반증(反證)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진화는 수십억 년 간 데이터를 모으면 그 허상이 들어나겠지만 현재 7, 80세 밖에 살지 못하는 한 개인은 도무지 기다릴 수 없다. 지금이 문제다. 그리고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진실이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불가지론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알기 싫다는 나태나, 뿌리마저 부인하는 교만일 뿐이다.
창조는 입증할 수단도 이유도 없지만 진화가 아니면 창조가 옳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선 종 사이에 변종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 진화를 부인하게 만든다. 거기다 자연을 가만히 살펴보면 너무나 정교하고 세밀한 시스템에 근거함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지적인 설계가 그 배후에 있었다는 뜻이다. 우연히 진화되었다는 주장으로는 그 모든 생물의 그 모든 정미함을 결코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한다.
비행기나 여객선을 타야만 갈 수 있는 하와이도 사정에 벅찼던 시절에 미국인들이 신혼여행의 최적지로 그랜드케년과 나이아가라 폭포 둘을 꼽았다고 한다. 부부 둘만의 낭만적인 여행기기도 하지만 평생에 한번 경비나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여행이기에 평소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을 고른 것이다. 그만큼 미국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그 두 곳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엄청난 경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정말로 그 크기, 넓이, 깊이는 사진으로 보았던 것이나, 실제로 보기 전에 생각으로 어림짐작한 것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된다. 그저 입이 딱 벌어져 한 동안 닫지 못할 정도다. 아름다운 경치는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그렇게 엄청난 경치는 평생에 한 번은 봐야만 한다는 뜻이 신혼여행지로 택한 진짜 이유일 것이다.
이제는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분들이 그곳을 방문할 수 있는 좋은 시절이 되었다. 여전히 여행객 모두가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한 번씩은 입을 벌리는 것도 공통적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엄청난 이런 경관은 인위적은 물론 우연히 생겼을 리는 절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언뜻 스쳐지나간다. 말하자면 잘은 몰라도 조물주 같은 절대적 존재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뭔가 조물주 혹은 절대자가 있을 것 같다고 여기면서도 선뜻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창조주 자체가 안 보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나 창조나 사실상 같은 의미이므로 창조에 대한 증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조물주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주를 창조할 만한 절대적 존재란 당연히 우주보다 더 큰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존재의 장엄, 신비, 영광 등은 도무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가 인간의 육안에 드러난다면 인간은 그 위엄 앞에 잠시도 서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그 앞에 엎드려 처분만 기다려야만 한다. 일상적 생활이 전혀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을 본 자는 살지 못한다는 성경의 진술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 절대자가 인간을 죽이지는 않는다 해도 도무지 그분을 눈을 바로 뜨고 볼 수 없을 것은 분명하다.
물질계를 창조한 이는 그것을 초월하여 그것 밖에서 존재해야 한다. 물질계 안으로 물질의 모습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 화가, 음악가, 문학가가 아무리 자신의 작품이라도 해도 그 안에 자기 실체는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단지 자신의 생각과 특성은 담아낼 수 있어도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는 능치 못할 일이 없기에 그런 일이 가능하고 또 실제로 역사상 딱 한 번 그렇게 하셨다. 바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다. 사람들이 예수를 어지간해서 믿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 이성 때문이다. 이미 말한 대로 물질계를 창조한 존재가 물질의 모습으로 물질계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을 상식으로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모르는 것은 다른 것이다. 상식적 판단이 가능토록 하는 그 이성을 누가 자신에게 주었는지 여부다. 아니 어쩌면 이미 이성으로 충분히 알 수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한다는 것이 더 타당한 설명이다. 그분을 인정하면 지금껏 쌓아놓은 자신의 전부를 일단 부정하거나, 최소한 그 모든 근거를 그분께 돌려야 함도 자기 이성으로 판단이 가능한데 그러기가 너무 싫은 것이다.
또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즉, 자기에게 이성을 주신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 이성으로 판단이 가능한데도 바로 그 이성을 사용해서 거부하는 핑계를 만들어내었기에 성경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을 앞세우는 것을 죄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다른 모든 종교에선 도덕적으로 타락한 행위만 죄라고 지적하는데 반해서 말이다.
어쨌든 현대인들이 창조가 어느 모로나 옳은 것 같은데도 창조주를 육안으로 인식할 수 없으니 못 믿겠다는 억지 같은 이유를 댄다. 또 그래서 내리는 결론이 하나 더 있다. 절대적 존재가 만물을 창조한 후에 자연 속에 일정한 운행 법칙을 심어 놓고 지금은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구와 인간의 기원은 창조가 맞지만 그 창조주는 지금 개점휴업 중이라는 것이다. 지구의 형편을 보면 대체로 악이 성하고 모순과 질곡과 고통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인간의 일상생활과 무관한 창조주라는 것이다. 창조주가 직접 움직이고 있는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물주나 지적 설계자가 있었다는 점까지만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 진화가 틀렸다고 인정한 것 하나 빼고는 말이다. 그 조물주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지금의 나와 아무 연관이 없다면 인간의 기원이 창조든 진화든 무엇이 문제인가 말이다. 조물주나 지적설계자를 주장하는 것은 엄격히 말해 창조론이 아니다.
현재 인간사회와는 물질계의 법칙 외에는 그 접촉점이 없다면 아무리 창조를 한 절대자가 있어도 창조주가 아니다. 창조주가 없는 것과 같다. 영원히 주무시고만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의미가 전혀 없다. 인간에게 남는 것은 그야말로 과학뿐이다. 과학이 만능이 되고 신이 된다. 인간은 오직 그 법칙만 연구하면 된다. 바로 오늘날의 세태가 그러하듯 말이다.
물론 혹시라도 사후 세계가 있으면 어떡하나 조금은 걱정 된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 당장은 큰 문제가 아니다. 절대자가 현재는 자연법칙 외에 아무 간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이 땅에선 남들보다 조금 더 착하게 살면 그만이다. 그 도덕적 기준이 상대적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은 문제도 안 되고 생각도 못한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에서 평균 이상이면 사후 세계가 있다 쳐도 벌 대신 상 받을 것 같기 때문이다. 창조가 옳긴 해도 나와 무슨 관계냐고 여기는 것이 현대인들의 참으로 얄팍하고도 게으른 생각이다.
계시가 없으면 창조주가 아니다.
창조론은 인간의 기원만 밝히는 이론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고서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한 목적이 있었다. 또 그 목적대로 지금도 이 땅을 이끌고 있다. 그러기 위해 세상만사는 물론 개별 인간사도 일일이 통치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삶의 현장에 실제로 개입하여서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는 절대적 존재다.
그리고 이 땅은 물론 개인사까지 통치하려면 하나님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각 개인이 인지해야 한다. 또 마땅히 그분을 믿고 따라야 한다. 서로 교통이 되어야 한다. 절대자가 혼자 일방적으로 통치한다면 그 통치는 독재다. 이 또한 인간은 로봇이나 노예에 불과해지니까 인간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자연법칙만 부여해 놓고 쉬고 있는 절대자의 경우 또한 일방적 통치의 일종일 뿐이다. 살아 역사하는 창조주라는 존재를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면 동일한 맥락에서 아무리 창조가 옳다한들 아무 의미가 없다.
인간은 자기 삶에 영향을 주는 존재에만 영향을 받을 뿐이다. 반드시 직접적 연관이 있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잘못된 생각이 결코 아니다. 예컨대 자연이 인간의 통치 아래에 있는 것 같다가도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벌어지면 인간은 자신들이 다스려야 할 대상인 자연에게조차 저절로 고개 숙이지 않는가? 그 자연을 만들어서 인간에게 주신 이가 따로 있음에는 눈을 가리고서 말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한계이자 성경에서 말하는 죄다.
창조주의 통지가 온전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려면 그와 인간은 반드시 서로 교통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인간 쪽에선 그에게 결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창조나 진화도 입증 못하는 판국에 창조주 본체를 만날 수는 더더욱 없다. 창조주 쪽에서 인간에게 교통의 손길을 먼저 내밀어야 한다. 바로 절대자의 계시(啓示, revelation)다. 계시란 신학 용어의 뜻은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감춰진 것을 감춘 쪽에서 먼저 내보이는 것을 뜻한다. 아빠가 손 안에 캔디나 동전을 움켜지고 있으면 어린 아이는 아무리 힘을 써도 그 주먹을 펴지 못한다. 아빠가 주먹을 펴서 보여주어야만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이아가라나 그랜드케년을 보면 조물주가 있다는 정도의 인식은 기독교 신앙과 무관하게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연 속에 그 만든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래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창1:20)고 선언한다. 인간 이성이 온전하게 작동하면 조물주가 있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화가가 작품 속에 자신의 특성과 일부 메시지만 주입한 것이지 화가 자신이 들어간 것은 아닌 것과 같다. 관람객이 아무리 심오하게 그 특성과 메시지를 읽어낸다고 해도 막상 화가가 의도한 것과 다를 수도 많다. 화가를 직접 만나 대화하지 않는 한에는 그 의도를 알 수 없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자연을 만드신 이가 그 만드신 목적이나 의미를 반드시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에게 정확하게 알려주어야만 창조주로서의 자격이 있다.
인간이 이성으로 자연 속에서 발견한 것은 조물주가 실재했다는 사실 하나만 알게 된 것뿐이다. 아직은 인간과 아무런 직접적 관계가 없다. 반드시 자연에 대한 자세한 해설서가 있어야만 한다. 요컨대 인간을 향한 당신의 계시가 없으면 창조주가 아니거나 없는 것과 같으며, 정말로 창조주가 있다면 인간을 향한 계시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바로 그 계시다.
흔히들 하나님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누가 믿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이 말은 사실상 그분의 실존(實存)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일부 사람에게는 그 실재도 문제이긴 해도, 그분이 진짜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것이 맞는지 알고 싶다는 뜻이다. 지금도 나의 삶을 일일이 간섭 인도하는 분이 실제로 따로 있다면 어찌 그분을 믿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두려워서라도 믿고 따를 것이다. 고대인들이 가공할 자연 현상을 보고 그 배경에 충분히 있을 법한 절대자 앞에 각기 나름대로 경배를 드린 까닭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은 창조주로부터 시작한다.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의 실존뿐 아니라 그분이 지금도 이 땅과 내 삶을 통치하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또 그분의 올바른 통치를 받기 위해 신자 쪽에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해야 한다. 나아가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해선 그분과의 교통이 가능함을 믿고 실제로 그렇게 시행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영원토록 세상을 주관하는 절대자가 지금도 바로 나에게 직접 말씀하고 있음을 믿는 신앙이다.
물론 그 기본 통로는 성경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들에게 현재 시제로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심오한 종교 사상과 계명을 인간 선각자가 창안해서 기록해 놓은 단순한 경전이 아니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 말씀이다. 또 성경 자체가 선언하는 그대로 혼잡하지 않는 질서의 하나님인지라 성경 외의 다른 모든 종교 경전들은 당신의 말씀이 아니다.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창조주는 한 분이고 또 한 분이어야 한다. 그럼 그분이 인간에게 계시하는 내용도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당신의 뜻을 드러낸 통로가 여럿이면 우선 무엇이 진위인지 여부도 따져야 하지만, 계시 자체가 여럿이면 아무 계시나 받아도 된다는 뜻이 되므로 그 계시 자체에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모든 것이 정답이면 정답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론적으로 다시 간단히 정리하면 창조와 진화 둘 중 하나는 분명 사실이다. 아무래도 진화가 납득이 안 되기에 창조가 맞다. 그럼 조물주가 아닌 창조주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창조주는 반드시 인간과 교통을 해야 하고 인간은 충분히 그 사실을 알고 교통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피조 된 연약한 인간이 마땅히 행할 바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하여 그분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믿음이란 우선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에게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신다고 인정해야 한다. 창조주가 아니라 조물주로 그쳐선 안 된다. 그 차제로 바른 신앙의 내용이 아닐뿐더러, 정작 당사자도 더 이상 신앙을 가지기 싫다는 뜻이다. 그 진짜 속내가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계시를 주시는 분이 나의 의사나 계획과 다른 것으로 인도하면 안 되겠다 싶은 걱정이 앞선 것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을 그만 두고 이제부터 그분이 말하는 새 방식대로 하늘을 바라보며 거룩하게 살라고 요구할까봐, 아니 분명히 그렇게 요구한다는 것을 이미 자기 이성으로 짐작하고선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 두려운 것이다.
지금껏 단순히 창조주에 대한 논리적 변증을 했다고 인식하면 안 된다. 엄연한 절대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주는 100%나 0%의 확률로 있으면 절대로 있고(창조), 없으면 절대로 없는(진화) 것이다. 중간쯤의 50% 확률의 하나님은 없듯이, 50%의 어정쩡한 신앙도 없어야 한다. 작금 기독교 신앙이 너무 힘을 잃고 있다. 절대적 사실과 진리에 입각한 절대적 신앙의 모습이 많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은 절대로 절대자를 믿는 절대적 신앙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다. 자신의 전부를 그 절대자에게 드릴 수 있어야만 한다.
만약 온전한 의미의,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의 창조주가 살아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성경의 나머지 모든 진술도 온전히 믿어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는 많은 분들이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 도무지 믿지 못할 내용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창조부터 믿기지 않는데 7일 만에 창조했고,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고, 노아홍수가 났으며, 바벨탑 때문에 언어가 나뉘었다고 한다. 거기다 예수가 물 위를 걸었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고, 죽은 자도 살려내었다는 식의 황당한 이야기 천지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따져볼 분제는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 여부다.
7/25/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