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과 넷째 날에 창조된 두 빛의 차이는?
[질문]
어느 날 한 지인이 저에게 하나님께서 첫날 창조한 게 뭔지 질문해서 빛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빛(가시적으로 보이는 빛)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빛은 넷째 날 창조된 것이라고 합니다. 창1:14절 이하에 따르면 광명체(해, 달, 별)없이 어떻게 스스로 빛을 발하겠냐며 창1:3절 첫날에 창조된 빛은 가시적인 빛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순간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 논리가 맞는 것 같아서 첫째 날 빛은 무엇인지 반문했더니 예수님의 오심을 영적으로 풀이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또 그 증거로 요한복음 1장을 들었습니다. 이런 해석이 옳은지 궁금합니다.
[답변]
창조될 수 없는 예수님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첫째 날에 빛을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선 해와 달이 없으면 빛과 어둠을 인식할 수 없는데도 넷째 날이 되어서야 그것들을 만들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만약 첫째 날의 빛이 해에서 오는 빛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빛인지 궁금해집니다.
현대 천문학에서 밝혀냈듯이 태양과 같이 자체 발광하는 항성이 외계에 있을 수 있지만 지구에까지 그 빛이 도착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전파망원경으로나 겨우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을 영위할 만큼 밝지도 따뜻하지도 않습니다. 그 정도 빛으로 이 땅의 사계절 변화는 있을 수 없으며 아예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인간에게 빛이란 바로 태양에서 오는 빛(열기를 포함하는)을 말합니다. 성경도 분명 인간 독자를 위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일진대 모순처럼 보이는 이런 차이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우선 전통적 해석은 첫째 날에 창조된 빛은 빛 자체, 말하자면 빛이 생길 수 있는 에너지의 근원(根源)으로 봅니다. 혹은 “빛이 있으라.”고 했으므로 빛과 존재로 나눠서 에너지와 모든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기초적인 존재들을 만들었다고도 해석합니다. 아니면 태양계 밖의 모든 것을, 당연히 다른 발광체들도 포함하여, 만든 후에 지구와 연관되는 소우주를 둘째 날부터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그런 전통적 해석들도 아무래도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b)는 말씀과 상충이 됩니다. 인간 독자에게 저녁과 아침이 구분되는 하루는 태양과 달이 없으면 결코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현대 과학에선 태양에서 지구와 달이 떨어져 나와서 식어졌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첫날에 저녁과 아침이 되려면 반드시 해와 달이 있어야만 합니다. 성경도 빛을 창조하기(3절) 전에 땅이 이미 존재했다고(2절) 진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어왔습니다. 대표적으로 어거스틴은 첫째 날의 빛을 신적 은사와 능력을 상징하는 영적 빛으로 보았습니다. 또 김성수 목사도 잘은 모르지만 동일한 맥락에서 첫날을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상징적 진술이라고 강해한 것 같습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런 영적 해석을 접할 때에는 아주 세심하게 주의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그분 본체라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삼위하나님은 선재(先在)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도 하나님의 속성에 이미 완전히 속해 있는 것으로 하나님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따로 당신의 능력을 비롯한 속성을 만들어서 자신에게 추가로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김성수 목사나 어거스틴 둘 다 그런 의미로 해석했을 리 없을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14절에 가서 구체적으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도 예수님이 창조된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낳아진 피조물이라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당시 헬라세계에 익숙한 로고스 개념을 이용하여 성육신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창세기 1장과 대조하여 새로운 창조라는 형식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날의 빛은?
현대의 성경 독자로선 성경 기록 당시와 시공간의 차이가 크며 원본이 아닌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접합니다. 구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대 유대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탐구하고 또 히브리 원어의 의미를 추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히브리어가 아주 술어체적인 그림 언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구태여 지니지 않고 있는 현실 그대로의 상황을 서술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의 이런 특성을 감안하여 이 두 빛의 차이에 대해 또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창 1:3-5에서 빛을 만들고 저녁과 아침이 구분되며 하루가 지났다고 기록된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첫날에 해, 달, 별 등의 물질계 전체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흑암 가운데 있는 지구를 위해서 말 그대로 해와 달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둘째 날에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었다는 진술과도 합리적으로 연결됩니다. 궁창이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우주관을 대변하는 용어로 별과 달이 붙어 있고 하늘 위의 물을 받치는 단단한 판을 뜻합니다.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들고 나누었다는 표현은 이미 해달별이 붙어 있는 하늘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간단히 정리하자면 첫날은 에너지와 물질을 만들었다면 둘째 날은 하늘의 별들을 질서 있게 배열한 셈입니다. 셋째 날은 지구상에서 물과 뭍으로 나누고 땅 위의 식물들을 먼저 만드십니다. 요컨대 창조의 첫 세 날에 세 번의 분리가 일어났는데, 1) 빛과 흑암, 2)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3) 바다와 땅의 나뉨입니다. 이 세 분리는 물질계를 완성하여 동식물 즉, 생명을 가진 존재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넷째 날의 해와 달의 창조에 관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창1:14) 이는 해와 달에 각각의 기능을 부여하여 인간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도록 했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단순히 빛으로 있던 광명체가 인간 세상의 낮을 주관하는 해와, 밤을 주관하는 달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각절 별로 문장이 끊긴 것이 하나도 없이 1장의 3절 이후에 ‘우’ 연계접속사로 “~~했고 또 ~~ 했고” 식의 한 문장으로 죽 이어집니다. 1:4의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그 빛으로 “빛과 어두움이 나뉘었는데”(4절) 14절에 와서 그 진술을 그대로 받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야를 나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구에 사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영향을 미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곧바로 식물의 창조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필자도 이 해석이 가장 합리적으로 여겨집니다.
어쨌든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는 과학논문이나 사실에 관한 리포트가 아님을 먼저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단어 하나, 구절 하나씩 따져서 각기 정확한 하나의 의미나 특정 범주의 의미가 있다고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창조의 장엄한 광경과 과정은 인간의 필설로 도무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그 저자에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와 수준에 맞추어서 계시해주셨을 뿐입니다. 상기에서 살펴본 전통적 해석, 영적 해석, 새로운 해석 모두가 문자적 진술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일부 모순을 드러내는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그 기술된 그대로 창조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천지와 인간이 그 순서대로, 질서에 따라,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너지원을 먼저 만들고, 물질계와 생물계를 순차적으로 만들되, 동물의 먹이인 식물을 먼저, 맨 나중에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다스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는 뜻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과 목적을 수행하는데 한 치의 오차가 없이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창조는 인간이 생존하는데 하나 부족함 없도록 이뤄졌고, 또 비록 인간이 죄에 빠져 타락할 줄 알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또한 완벽하게 달성되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만이 더 높여지게 하는 목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구체적 과정에 관해 이런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넘어서거나 오해하게 만드는 영적으로 무리한 해석을 일일이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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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질문]
상기의 해석을 제게 소개한 분은 감리교 교회를 다니셨는데 언젠가 서울의 “서머나교회”로 옮겼습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김성수 목사'님이 담임했던 교회라고 합니다. 그동안 듣지 못했던 신선한 강해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새로운 길로 데려갔다는 평이 있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단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미국 엘에이에서 강해설교로 유명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도 혹시 김성수 목사님에 대해서 알고 계신지, 괜찮은 분이신지도 궁금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아직도 돌아가신 목사님 영상을 띄워놓고 예배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 해석 외에도 그동안 듣도 보도 못한 해석들을 그 지인이 해주셔서 혼돈이 와서 문의 드립니다. 참고로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님이 지지하고 계셨다고 해서 더 혼란됩니다.
[추가질문에 대한 답변]
참으로 아까운 분이 너무 일찍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이곳 엘에이 서머나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한 초창기에 제가 주일(3/30/2008)과 수요설교를 하러 간 적이 한번 씩 있습니다. 저를 소개하셨던 그 교회 집사님 한분과 강사목사와 담임목사 간의 의례적 차원에서 점심식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분을 깊이는 알지 못하며 그 후로도 개인적 교제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소천하시기 전까지 교계 신문의 보도를 통해서만 그분 소식을 접했습니다.
저로선 그분의 설교와 가르침에 대해 언급할 위치가 전혀 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초창기에는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구원론에 대해 아주 정확히 잘 가르쳤으며 신선하고도 은혜로운 관점에서 성경을 강해 설교했습니다. 새롭게 옮길 교회를 찾는 자에게 제가 추천해준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저에게 설교를 부탁한 이유도 제가 같은 신앙노선임을 사전에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주변에서 들리기로는 점차 일상적 단어 하나하나에마저 영적의미를 부여하는 영해(allegorism)에 너무 주력하며, 또 성화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극단적 해석을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직접 설교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어서 섣부른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감히 추측컨대 김목사님께선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예민하고 연약하여 오랜 지병으로 마지막까지 힘들어 하셨다고 하던데 그런 영향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목회 초창기의 그 예리하고도 은혜로운 설교가 노선의 수정 없이 계속 이어져서 말씀이 갈한 이 세대에 더 선한 영향을 끼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쨌든 그분의 신학을 제가 정확히 평가할 입장은 아닙니다.
현재 그분 설교영상을 틀어놓고 주일예배를 보는 것에는 분명히 반대합니다. 다른 이들처럼 개인우상 숭배를 한다, 혹은 죽은 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꼴이다, 식의 비평을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올바른 설교가 없어서 말씀의 은혜에 갈급하면 그럴까 이해를 해주어야 합니다. 제가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교회는 예배만을 목적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교육과 훈련, 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 친교 등 여러 감당할 사역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공동체로 모여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함께 받아 성품이 거룩하게 바뀌고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또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더 확장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을 계획 조정 주도할 영적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만을 목적으로 하면 집에서 혼자 인터넷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또 그분도 한 연약한 인간 목자이지 절대 완전하지 않습니다. 말년에 조금 극단적으로 치우친 해석들을 일반 신자들은 아무런 분별도 못하고 금과옥조처럼 그대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습니다. 거기다 목사는 성경의 영원한 진리를 신자들로 자기 세대의 영적 흐름에 맞추어 적용 실천할 수 있도록 풀어서 가르쳐야 합니다. 시의적절한 영적분별력을 심어주어야 하는데 담임 목사의 부재로 그럴 수 없습니다. 심지어 김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자칫 성경보다 우위를 점할 우려마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설교하신 내용이 아무리 많아도 성경 전체를 카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복음의 진리가 성경의 어느 구절에라도 내포되어 있다 해도, 계속해서 더 풍성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신자들이 스스로 차단하고 있는 셈입니다. 참고로 엘에이 서머나교회는 결국 담임목사를 새로 모신 쪽과 계속 영상예배를 보는 쪽으로 얼마 전에 완전히 나뉘었습니다. (삼일교회 송목사님의 의견에 대해선 저로선 일언반구도 언급할 처지가 아닙니다.)
7/24/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