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증을 없애는 최고 비결
(조급증도 큰 죄다. 시리즈 7)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부지런함과 분주함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이 시키는 일만 하셨기에 이 땅에서 공사역을 하는 동안에 조급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천국 복음을 전하여 미혹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서만은 아주 서둘렀다. 서둘렀다고 해서 앞뒤 구분 없이 허둥지둥 급하게 굴었다는 뜻은 아니다. 전도할 일은 넘치도록 많았고 또 그 일을 수행함에 아주 부지런했다.
일이 많아 바쁜 것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아주 부지런한 것과 그저 분주한 것이다. 부지런함은 진정성이 바탕이 되어서 적극성, 능동성, 행동성 등이 함께 따라 온다.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이자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열심히 그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미혹된 영혼을 보면 불쌍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충만했었기에 구원을 주어야 할 자를 만나면 언제 어디서라도 은혜를 베풀었다.
그저 분주한 것은 그 반대다. 꼭 할 필요가 없으며 썩 좋아하지도 않는 일인 데도 자기가 감당해야 한다고 여기는 경우다. 진정성이 생기지 않기에 즉,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고 여기기에 일단은 뒤로 미루고 본다. 자연히 할 일이 눈앞에 많이 쌓여가고 그저 마음만 분주하다가 차츰 초조 불안으로 도진다.
이 둘의 차이는 간단하다. 꼭 해야 할 일 한두 가지에 집중하느냐 아니면 꼭 하지 않아도 될 잡다한 일에 신경이 쓰여 오히려 그 중요한 일마저 하지 못하느냐다. 대부분의 사람이 인생에서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후자에 속하기 때문이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는데 바빠 그 말씀을 듣는데 실패했듯이 말이다.(눅10:38-42)
한두 가지 일만 한다고 해서 한가한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깊이 집중하고 전문적으로 행해야 하기에 더 바쁘다. 예수님도 때로는, 아니 공사역 3년 내내 아주 바빴다. 그럼에도 그분의 분주함은 우리의 분주함과 전혀 달랐다. 아무리 바쁜 일이 많았어도 전혀 당황, 혼돈, 초조, 불안 없이 모든 일의 완급을 조정하며 담담히 처리해 나갔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나도 당신이 그 일의 전적이고도 완전한 주관자였지 일이 당신을 제약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하나님이니까 당연했고 인간인 우리로선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치부해선 안 된다. 예수님도 완전한 인간으로 그랬던 것이다. 그분이 인간이셨던 가장 큰 증거로 새벽 미명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였지 않는가? 이 땅에 계셨을 때에 그분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셨고 사역할 때도 100% 인간인 상태로 행하셨다.
말하자면 병자를 초자연적 이적으로 치유할 때나 죄인을 구원해 줄 때도 한 사람씩 만나서 그랬다는 뜻이다. 만약 신적 권능으로만 사역하셨다면 이스라엘 안에 고쳐 주어야할 모든 병자를, 또 구원해 주어야 할 모든 죄인을 구태여 만나지 않고 당신이 기거하는 방 안에서 말씀 한마디로 그럴 수 있었지 않겠는가? 비근한 예로 로마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실 때에 직접 병자를 만나지 않고 도중에 말씀으로 고쳤듯이 말이다.(눅7:10, 마8:13)
그러나 그러지 않고 일일이 만나 따뜻한 인격적 교제를 하면서 구원이나 치유를 행하셨다. 그럼에도 그 치유나 구원은 백 프로 신적 권능이 아니고는 행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구원과 치유와 함께 인격적 교제도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진 모습이야말로 바로 그분이 100% 하나님이자 100% 인간이었던 확실한 증거다.
재차 강조하지만 그분의 인간적 모습은 신자들이 충분히 본받을 수 있다. 예수님의 경우에 비춰보면 조급증을 없앤다는 것은 우리처럼 그저 분주한 상태에 절대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부지런해지는 것인데 당신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시키신 일만 하는 것이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인간 예수로서 이 땅에서 행한 사역의 원리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 한다면 그 일의 과정과 결과는 당연히 그분이 책임지지 않겠는가? 또 그럼 인간 쪽에서 조급해질 이유는 전혀 없지 않는가?
당신 일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신자가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한다는 것은 분명한 소명을 받아서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신자가 그렇게 하고 있을지 의심스럽다. 만약 당신 일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찾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나마 그렇게 대답하는 신자는 수준이 나은 편이다. 그렇게 할 시도도 하지 않았거나 아예 그런 소망도 갖지 않고 있는 신자도 아주 많다. 아니 하나님이 나의 일생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가졌다는 사실조차 아주 생소할 수 있다. 신자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원리마저 모르는 이도 있을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이런 부류의 신자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주일에 예배드리면서 조금 윤리적으로 반성하고 사람들과 교제하는 교회의 멤버일 뿐이다. 십자가 복음은 금시초문이고 잘 믿으면 복 준다는 말 밖에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일만 하시지 신자가 그분의 일을 대행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는 것이다.
교회 멤버 수준에 머물러서 아직 신자가 되지 않은 자는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부터 받아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체험하여 거듭나는 일이 급선무다. 문제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아직 모르겠다는 자들이다. 이 또한 참으로 한심하고 난감한 일이다. 그들의 영적 게으름이나 믿음 없음을 탓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또 그들에게 그 뜻과 계획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 어렵다는 뜻도 아니다. 지금껏 교회가 어떻게 가르쳐 왔으면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는 뜻이다.
흔히들 하나님이 나의 일생에 대한 뜻과 계획을 그분이 심어주신 소명, 그분이 보여주신 비전 등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그렇게 말하는 자나 듣는 자 공(共)히 사실은 그 표현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것 같다. 소명, 비전, 꿈, 소망, 계획 등이 신자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란 의미로 그저 뒤죽박죽 적용되고 있다.
예수를 믿고 난 직후에는 누구나 앞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어떤 일을 해야 그분의 뜻을 이루어드리며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진다. 문제는 아무리 궁리하고 기도해도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인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미래에 딱 부러지게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으니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 비전, 계획 등을 아직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런 신자들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오류가 하나 있다. 미래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누가 결정하는가? 하나님이 결정하는가? 결코 아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지금껏 교회에서 배워왔던 바와 다르다고 해서 절대 이단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가 결정하라 혹은 결정해도 된다는 가르침을 받지 못했으니까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소명과 비전을 제대로 찾지 못해 곤혹스러워 하는 것이다.
자칫 오해는 말아야 한다. 예수 믿고 난 이후론 모든 일에 신자에게 백 프로 완벽한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는 뜻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인생 만사를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한 개인의 일생에 대한 그분의 계획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일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명확하게 코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평생을 가도 그분의 직접적인 계시는 한두 번 받을까 말까인데 어떻게 자신이 결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신자가 얼마든지 무슨 일이든 숙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시행해도 된다.
신자의 결정과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신자의 모든 것을 아신다. 앉고 일어섬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아신다. 나아가 심령의 숨겨진 죄악이나 혼자만의 상처와 애통함도 다 아신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머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2-4)
따라서 신자가 혼자서 판단, 결정, 계획, 시행하는 일을 그분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 이유와 배경까지도 아신다. 그래서 혹시라도 신자가 실수하거나 잘못된 길을 가면 그 길을 막으시고 당신의 선한 길로 이끄신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4:12 & 16:9)
또 신자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힘이 빠져 있을 때에는 그 영혼을 소생시키고 안식으로 이끄신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3) 거기다 연약하고 어리석은 신자를 위해서 기도까지 대신 해주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그렇다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니까 신자가 스스로 경영한 대로 행하다가 범하는 실수나 잘못만 뒤치다꺼리 하는 분처럼 여기면 안 된다. 성경 말씀은 어디까지 인간이 이해하는 수준에 맞춘 표현이다. 신자더러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기도하고 주님께 순종, 교제, 동행하라는 권면의 뜻이다. 인간이 행하는 것을 뒤에서 가만 두고 보시다가 잘못하면 나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신자가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허용하셔도 궁극적으로 하나님 그분이 신자의 계획대로가 아닌 당신의 뜻대로 이끄신다. 위에서 인용한 성경 본문에도 그런 의미의 표현들이 나오지 않는가? 사람이 택한 어떤 길은 사망의 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간이 택한 그 사망의 길이 아닌 하나님이 정한 길로 인도한다. 신자는 마땅히 빌 바도 모른다지 않는가? 마땅히 빌 바는 자기가 앞으로 가야할 목적지다. 신자가 모르니 하나님이 대신 기도해 주실 수밖에 없다.
결국 거꾸로 따지면 하나님은 이미 신자가 갈 길을 다 정해 놓고 그렇게 인도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인간 시각에서 바라볼 때에만 신자는 그분의 길을 전혀 모르고 스스로 자기가 판단하고 결정한 길로 갈 수 있고 또 실제로 가고 있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이 미리 계획해서 인도하고 계시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또 벗어날 수 없다. 신자가 자유의지를 사용해 걸어가는 길 모두가 그분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이며 완벽한 예정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서로 모순, 상충, 이탈, 반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래서 단순히 전지전능한 것을 넘어서 너무나 광대하신 분이다. 미리 알기에 단순히 수호천사처럼 나쁜 일을 막아주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나빠 보이는 일도 그분의 계획과 뜻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위인들의 일생이 다 그러하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의 경우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자기 의지로 판단하고 결정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광대한 계획안에서 이뤄진 일이고 궁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너무나 놀랍고도 신비한 그분의 뜻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들이 기도하지 않고 믿음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지 않는가? 가는 곳마다 여호와께 단을 쌓고 그 이름을 불렀다. 그분께 기도하고 예배드렸다. 그러나 당장 아브라함의 경우만 해도 갈 바 몰랐으나 무조건 떠났지 않는가? 바꿔 말해 그는 우상숭배의 죄악이 넘치는 갈대아 우르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는 본인의 확실한 판단이 선행된 것이다. 요셉도 꿈을 꾼 것, 형제들에게 자랑한 것, 애굽에서 행한 모든 일들이 전부 그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았다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그라도 애굽의 노예와 감옥살이를 자처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요컨대 그들의 믿음과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미리 아는데 동원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갈 바 모르지만 하나님만 믿고 따를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얻고 실제 순종으로 이어지게 했을 뿐이다. 지금 내 스스로가 선택 결정하는 어떤 일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가 있으리라 확신하고 그대로 시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고 그대로 따른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거나 그와 방불한 자다. 아니면 순종 자체가 안 된다. 너무나 험난한 굴곡진 인생이 기다린다는 것을 미리 알고도 선뜻 나설 바보가 우리 가운데 얼마나 되겠는가?
소명과 비전이란?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 믿는 신자나 타종교인이나, 심지어 불신자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격언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들도 스스로 자기가 결정 시행한 후에 그 성패는 하늘의 뜻에 맡기지 않는가? 또 만약 그들의 경우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그들의 판단과 시행에 상충이 없다면 구태여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신자는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어서 따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도록 불려나온 자다. 한마디로 그분의 일을 해야 하는 그분의 종이다. 말하자면 신자가 무조건 자기 지정의로 판단 시행하면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야 한다.
혹시 앞에서 말한 내용과 모순처럼 여겨지는가? 이 또한 아니다. 신자의 경우는 어차피 하나님이 다 예정해놓은 대로 이끄시니까 제 마음대로 행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는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미 다 말해 놓았는데 신자들이 그것을 잘 모르고 있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혼용해서 사용하는 용어들의 의미를 조금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먼저 소명이다. 한자로는 ‘부른다’는 ‘소’(召)와 ‘명령을 내린다’는 ‘명’(命)이 합쳐진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불러내어서 따로 구체적인 명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신구약 성경을 통 털어 이런 우리말 표현이 없다. 대신에 ‘부르심’(calling)이라는 말은 여러 번 나오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한 개인이 따로 선택되어졌다는 뜻이다. 초대되거나(invited), 구별되었다는(separated) 의미다. 특정한 임무가 따로 맡겨진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신자는 세상에서 따로 불려져 나온(called-out) 자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제 멋대로 살던 한 죄인을 하나님이 지명하여 택하여서 흑암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따로 빼어내셨다. 그리고 빛 가운데로 옮겨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게 만들어 주셨다.
비록 신자의 육신은 세상 속에(within the world) 함께 살아야 하지만 그 영적 실체의 신분과 소속은 세상이 아니라(not of the world) 하나님께 속해졌다. 그래서 신자는 모두 거룩한 하나님께 따로 구별된, 거룩하다는 본질적 의미임, 성자(saints 고전1:2)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후로 모든 신자가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둘째로 살펴 볼 것은 작금의 교회 행사나 설교마다 자주 등장하는 비전(vision)이라는 단어다. 이는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모습을 뜻하는 용례로만 거의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면서 사랑하는 세 제자들에게 방금 “본 것”(vision)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 수 있다.(마17:9)
현재 통용되는 하나님이 심어주신 신자나 교회에 대한 큰 소명이라는 의미와 그나마 가장 근접한 것은 요엘서의 예언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visions)을 볼 것이며”(욜2:28) 이 또한 원어의 의미는 눈에 보이는 환상, 특별히 꿈을 통한 환상이다. 하나님이 상징이나 표상으로 보여주는 묵시(黙示, apocalypse)에 가깝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하고 통용하는 의미의 소명과 비전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의미와 유사한 상황은 여러 번 나온다. 예컨대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에 임재하신 하나님께 불려 나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라는 명을 받았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여호와를 만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말씀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다.(사6:8) 신약 시대에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이방인의 사도가 되라는 명을 받았고, 베드로는 꿈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구체적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 각자는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에서 아주 중요한 직분을 맡았다. 각자에게 각양 다른 모습(음성, 환상, 묵시 등)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류 전체의 구속에 대한 절대적 계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성경으로 이미 완성되었다. 특별한 임무를 맡을 선지자(구약)나 사도(신약)를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 방식으로 따로 불러내어 부어주실 하나님의 묵시(vision)는 더 이상 없다.
모든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신자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따로 불려나온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각 개인별로 성경인물 같은 구속사에서의 필수적인 특정 임무를 따로 주시지는 않는다. 반면에 신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통적인 직분과 임무는 주셨다. 신자가 되는 순간 흔히 통용되는 의미의 소명과 비전은 이미 받았다. 따로 추가로 받을 소명과 비전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지상명령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다. 제자들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야 하니까 즉, 제자는 또 제자를 양성하고 새로 된 제자도 제자이니까 모든 신자에게 해당된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불려 나왔을 때 이미 복음을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전해야 할 소명을 받은 것이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5,18,19)
신자의 비전도 필연적으로 이 소명과 연관된다. 비전이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이다. 신자가 스스로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에서도 하나님의 신이 임해야 이상(vision)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신자가 이 소명을 충성되게 완수한 이 땅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비전이자 신자의 비전이다. 이 땅의 모든 종족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모든 이가 목사 선교사가 되어서 먼 오지로 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구는 둥글기에 따로 땅 끝이 없다. 복음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면 바로 거기가 땅 끝이다. 소외된 불쌍한 계층들이라면 모두가 주님의 복음으로 새 생명을 주어야 할 대상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바로 자신 주위에, 특별히 등 뒤에 있어 잘 안 보이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야 한다. 나아가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미워하는 사이, 아니 원수라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오게 해야 한다. 요컨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모든 불신자가 다 땅 끝에 속한 자다.
또 선교사나 목사처럼 복음을 아주 전문적으로 전하고 가르칠 필요마저도 없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면 된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면 된다. 신자는 각처에서 죄악과 사망을 이겨내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사람들 앞에 풍기면 된다.(고후2:14-17) 물론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말로 쉽게 설명해 주면서 말이다.
세상 앞에 빛이 되려면 그 전에 신자부터 온전하고 거룩해져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 한다.(엡4:13)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며 옳고 정결하며 사랑할 만하고 칭찬할 만하여야 한다.(빌4:8) 더욱 힘써 믿음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더해야 한다.(벧후1:5-7)
따라서 이미 예수 믿은 신자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자기 일생의 소명을, 하나님의 비전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믿음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않았다는 증거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비전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고 있어야 한다. 모든 이가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그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공동체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다. 비록 인간들이 완악하게 거부하더라도 가능한 사람들끼리라도 지금 당장 그렇게 해야 한다.
모든 신자의 소명은 세상의 땅 끝까지, 끝 날까지(당연히 신자의 일생이 끝나는 날까지의 의미다)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는 것이다. 십자가로 미혹된 영혼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라는 직책과 말씀을 이미 받았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부터 온전한 믿음 위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저절로 새어나오는 거룩한 자로 자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세상 앞에서 살고 있는 것이 바로 목사, 선교사는 물론 방금 예수 믿은 자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다.
소명이 아니라 직업이다.
문제는 이처럼 모든 신자가 이미 하나님께 구체적인 소명을 받고 있는데도 안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껏 말한 내용을 어지간한 신자라면 다 알고 있는데도 그렇다. 그 이유는 소명과 직업을 혼동한 까닭이다. 한마디로 자기가 무슨 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의미다. 그것은 소명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서 택할 직업(vocation)일 뿐이다. 직업은 소명을 실현하는 수단 내지 통로이지 소명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가 이 직업과 연결해서 가장 먼저 결정해야만 할 일이 하나 있다. 평생 동안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만 하는 전문사역자가 될 것인지, 세속의 직업을 가지면서 삶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일반 신자로 머물 것인지 여부다. 그런데 실은 이 문제는 대부분의 신자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전문사역자일 경우에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구체적이고도 특별한 부르심이 따르기 때문이다.
전문사역자라는 직업은 진리를 증거하기에 흑암의 세력의 훼방을 각오해야 하며, 경제적인 면에서의 궁핍 내지 부족도 감내해야 하며, 사람들의 오해와 질시도 많이 받아야 하는 외로운 길이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면 머리 둘 곳 없이 좁고 협착한 길로 외롭게 걸어가야 한다. 보통의 결심과 각오로는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직업이기에 신자가 되는 일반적인 세상과의 분리와는 차원이 다른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이며 완전한 갈라놓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과 본인만이 아는 분명한 부르심과 그에 대한 순종의 반응이 따르게 마련이다. 비유컨대 이사야와 같은 calling이다.
따라서 신자에게 그런 특별한 calling이 없으면 그냥 일반 직업을, 그것도 아무 것이나 택하면 된다. 물론 신자가 세속적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중에도 그런 calling은 올 수 있다. 단지 언제 어떻게 그런 calling이 들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당신의 계획대로 주관하실 뿐이다.
어쨌든 전문사역자와 일반 신자로 나누어지는 것이 받은 소명의 내용에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야 하는 소명은 동일한데 그 일을 전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부분적(순전히 시간을 투자하는 의미에서만)으로 또 간접적으로 할 것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기독교 신자는 모두가 만민제사장의 직분을 가졌다. 단지 구약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세상살이와는 별개로 그 직분에만 전념할 자만 전문사역자라는 것이다.
전문사역자가 되겠다는 calling이, 때로는 그 calling이 신자 스스로의 서약과 헌신의 모습이 되기도 하지만, 없는 다음에는 어떤 신자라도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면 된다.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주셨고 또 그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과 시행이라도 하나님의 궁극적, 절대적, 완벽한 계획과 상충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택하면 된다.
그래도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일이 따로 있고, 복음을 증거하는데 더 효과적인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이가 많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이에게 각자 특유의 재능과 은사를 주셨고, 뛰어난 지성과 의지를 주셨고, 거기다 기도할 수 있는 특권과, 성령님의 인도까지 따른다.
그렇다고 기도해서 꼭 직접적 응답을 받아서 직업을 선택하라는 뜻은 아니다. 기도해서 무엇보다 자기 재능과 은사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지혜를 얻으라는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무슨 일을 하든지 정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는 냄새를 각처에 드러내도록 준비, 훈련, 헌신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기 재능에 맞는 직업을 택하면 된다. 최소한 조직폭력배나, 사기꾼이나, 술집 같이 명백히 비기독교적인 직업만 아니면 된다.
아직도 자기 일생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과 계획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그분의 소명에 대한 소망과 열정이 없는 자다. 자신의 직업을 현실적으로 크게 성공하고 싶어서 하나님의 특별하게 넘치는 인도와 보호를 받고 싶은 것이다. 자기 앞으로 행할 일의 성공을 하나님더러 미리 보장하라는 억지다. 직업에서의 성공은 하나님의 인도와 복주심이 근간이 아니다. 그보다는 신자의 재능, 실력, 노력, 진정성, 성실성에 더 크게 좌우된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데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라고 한다. 자기 직업이 무슨 상관인가? 또 착한 행실을 하여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데 무슨 직업의 구분이 필요한가? 오히려 남들이 쉽게 하지 않으려는 어렵고 빛이 안 나는 희생적 일을 하면 그 빛이 더 비췰 것 아닌가? 도리어 그런 일을 찾아서 하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실제로 예수님이 바로 그런 일생을 보냈지 않는가? 그런데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한다.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짓일 뿐이다.
범사에 주께 하듯 하라.
주부 신자에게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물어보라. 거의가 아직 모르겠다거나 지금 찾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니면 나는 구역장이나 찬양대원이 소명이라고 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직분을 맡았다면 교회 내에서 믿음이 좋다는 축에 들 텐데도 너무나 얼토당토 않는 답변을 한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시켜야 한다는 소명이 모든 신자에게 동일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끝이 없다. 주부 신자라고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단지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이 다를 뿐이다. 반면에 구역장이나 찬양대원으로 섬기는 일이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일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다. 성도끼리 교제 격려 고무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또 믿음 안에서 함께 자라는 일은 분명히 있지만 말이다. 하나님 나라 확장의 일부 측면임에도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 안에만 머무는 하나님 나라다. 예수님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가라는 말씀은 짐짓 외면한 셈이다. 또 복음으로 믿지 않는 자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로 의로운 영향력을 끼치는 면에서도 현저히 부족하다. 그 일들은 어디까지 땅 끝까지 가기 위한 준비와 훈련에 속한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위밍업이다.
바꿔 말해 주부, 엄마, 아내, 며느리 등이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 내지,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이자 통로인 직업이라고 인식하는 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주부 일은 복음과는 아무 연관도 없으며 매일 되풀이되는 짜증나고 귀찮은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아무 씨잘 데 없는 허드레 일이라 치부한다.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귀한 일이다. 또 그 안에 복음의 진보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도 풍요하고도 아름답게 들어 있다.
먼저 부부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진정으로 서로 주께 하듯이 사랑해보라. 부부 각자가 자신의 인간적 노력과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 차는 모습으로 말이다. 각자가 먼저 주님과 온전한 교통을 이루어서 주님께 받은 사랑을 배우자에게 그대로 전해준다면 바로 그것이 천국이자, 하나님 나라가 확충되는 것이다.
남편은 남편으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역할에 온전히 충성하며 서로에게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일반 부부도 할 수 있다. 신자 부부의 사랑이 일반 부부의 그것과 다른 것은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결정은 주님과 성경 진리에 따른다는 것이다. 또 서로가 사랑을 변함없이 이어갈 수 있는 근거와 힘도 오직 주님으로부터 얻는다는 것이다. 물론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도 부부가 개별적으로 혹은 합심해서 주께 기도하여 얻은 지혜와 사랑이다.
이런 사랑의 모습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의견이 아무리 옳아보여도 강요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과 격려로만 자녀를 대한다. 마찬가지로 그들 부자관계를 아름답고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둘 사이에 흐르는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이다. 자녀는 주님께 대하듯이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부모는 주님이 그 제자를 대하듯이 끝까지 사랑하고 세워주는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 식사 기도를 꼭 해야 한다는 식의 종교적 외양적 경건의 모습을 갖추라는 뜻이 아니다. 문맥 안에서의 뜻은 신자는 복음의 진리로 자유해졌기에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더라도, 연약한 자가 혹여 시험을 받을 것 같으면 먹지 말라는 것이다. 항상 교회의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려지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종교적 형식으로 불신자나 믿음이 약한 자와 경계를 짓는 일을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에게 생명을 주어서 살리라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신자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결정짓는 최우선적 절대적 기준이다.
하나님이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물론 당신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높임은 다른 어떤 경로보다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높여지길 원하신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죽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기도했지 않는가?(요17:1)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으면 하늘에서 잔치를 벌이시는 하나님이다. 또 그런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성도가 서로를, 나아가 불신자 이웃을 섬길 때에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러워 하신다.
신자가 겪는 모든 인간관계와 사건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신자가 받은 소명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주님이 선한 행실로 소금과 빛이 되어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직접 명하지 않았는가? 또 그러기 위해선 어떤 핍박도 감내하여서 사망은 신자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그 사랑을 받는 이웃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신자도 다시 살리사 이웃과 함께 당신 앞에 세우게 하시도록 말이다.(고후4:12-14)
일반 은총도 너무나 중요하다.
주부, 아내, 엄마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실현하는 평생 직업이라고 확신하는 자라면, 흔히 이해하듯이 그것이 바로 나의 소명이라고 믿는다면, 어떤 모습이 되겠는가? 설거지, 방 청소, 빨래 어떤 일을 해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할 것이다. 신자니까 더 선해야 하고 어떤 일에도 짜증내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적 의무나 책임과는 별개다.
된장찌개를 하나 끓여도 식구들의 건강을 지키고, 또 가족끼리 즐겁게 먹으면 화목해지고, 무엇보다 그런 맛있고 아름다운 식탁교제 가운데 각 자가 주님께 은혜 받은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의 관계를 더 깊이 성숙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가정 안에서 식탁에서 된장찌게 하나 놓고도 얼마든지 사경회, 기도모임, 부흥회, 찬양 집회를 할 수 있다.
물론 주부도 연약한 인간이다. 피곤하고 짜증이 전혀 안 생길 수는 없다. 그럼에도 최소한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와 가치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확고하게 알고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과의 차이는 엄청나다. 주부가 자신의 평생 직업이라고 자부하는 자는 더 이상 허드레 일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 일 안에 하나님의 역사나 은혜가 풍만함을 확신하고 찾고 누리게 된다.
식탁기도 가정예배 등 종교적 외양을 갖추려고 별반 노력하지 않는다. 자신이 주님께 받은 소명이 확실하고 그 소명을 실현시킬 통로인 직업도 확정되어서 그 일에 충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거지하고 화장실 청소를 할 때도 주님이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그러는 신자를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나아가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독교적 냄새가 나지 않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꼭 전도, 기도, 말씀, 예배, 찬양 등이 주가 되거나 곁들여져야만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라는 종교와 일차 연관되지 않는 일들은 단지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치운다. 그 안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과 심지어 당신께서 받으실 영광이 있다고는 꿈도 꾸지 않는다.
아니다. 하나님은 신자는 끝까지 따로 구별하여 사랑하지만(특별은총), 불신자에게도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내리며 사랑하신다.(일반은총) 말하자면 직장에서 꼭 신우회나 기도모임을 해야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소명을 실천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그런 일이 중요치 않거나 해선 안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아니 더 중요한 일은 회사의 실제적 업무다. 실력 있게, 정직하게, 책임감을 갖고 회사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물론 부패나 부정직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반(反) 하나님적인 일은 과감히 거부하면서 말이다.
나아가 신자가 전도, 성경 공부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의 복리증진을 위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신자가 대행하는 것이다. 신자 의학자라면 암 퇴치 특효약을 만드는데 평생을 바치는 것을 소명과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연구실에만 평생 박혀 있어도 정말로 모범이 되는 방식과 태도로 성실하게 일하면서 실제적인 업적을 쌓으면 아주 훌륭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평강과 자유와 기쁨 가운데 살고 있는 모습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주위 불신자들로부터 과연 신자 의학자답다는 평판을 듣고 또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도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싶다는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면 하나님 나라를 아주 크게 확장한 것이다.
조급증을 없애는 최고 비결
신자의 화목케 하는 직책이 바로 이것이다. 꼭 직접적인 전도만이 그 직책을 수행하는 방도가 아니다. 세속 직업이 전부인 불신자로 하여금 그와 전혀 다른 영적 차원으로 초대하기 위해선 세속 직업 안에서 그들과 함께 뒹굴어야 한다.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 안에 사는 것이다. 불신자로 하나님의 특수 은총이 일반 은총보다 훨씬 더 귀하고 아름답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특수은총만 소개해선 안 된다. 교리와 전도하는 종교적 모습만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도 똑 같이 형식과 계명에 묶이는 것 같아 오히려 예수 믿기를 꺼려한다. 일반은총 안에서 아름답고 풍성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특수 은총으로 이끄는 것이 화목케 하는 직분인 것이다.
예컨대 신자 부부가 정말 아름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야 간음과 낙태가 죄라는 성경 진리를 세상 사람에게 납득시키고 또 영적 찔림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들도 동등하게 사랑으로 섬겨야만 한다. 그러나 동성애 부부가 고아를 입양해 키우는 선한 모습을 세상에 보이기 전에 신자 부부가 먼저 그래야 한다. 쉽게 말해 신자부부가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아주 아름답게 살고 또 도덕적으로도 불신자 부부들보다 더 선해 보여야만 신자들의 동성결혼 반대가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요체는 이것이다. 모든 신자는 소명을 받았다. 실현할 수단인 직업만 스스로 고르면 된다. 그리고 어떤 세속의 일도 하나님의 일이다. 신자가 전부 스스로 하는 것 같아도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로 주관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다. 그분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완벽하게 이끄신다. 당연히 조급증이 생길 수 없다. 평생을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일에 충성하고 있다고 확신을 가지는 자는 염려하지 않는 법이다. 부지런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그저 분주하게 우왕좌왕 하는 법이 없다. 오직 한 길로만 꾸준히 주님과 동행하는데 어찌 조급증이 생기겠는가?
기도 말씀 자주 많이 본다고 꼭 주님과 교제 동행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시킨 일을 진짜로 하고 있어야만 한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시킨 일을 하고 있으니까 혼자 두지 않는다고 고백했지 않는가? 기도하고 말씀 볼 때만 하나님이 같이 있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실제로 동행하기 위한 준비이자 훈련일 뿐이다.
직업은 스스로 무엇을 택해도 된다. 또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결국 인간이며, 그 안에 원죄의 본성이 생생히 남아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즐겁고 능률이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님을 닮아가며 땅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내 직업을 통해서 확충하는 일이 진짜로 신나고 즐거워야 한다. 또 그러면 구체적인 방법은 조금만 기도하고 말씀 봐도 깨달을 수 있다.
이 직업의 일이 내 평생 꼭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이며, 또 그 일을 함에 나는 진짜 너무나 기쁘고 신나며(꼭 전도 많이 해서 하나님의 상급이 기다릴 것이라는 기대나 예상이 앞서는 것이 아님), 나아가 이 일을 하는 은사와 재능을 하나님께 받아서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기회 닿는 대로 직접 복음을 말로 증거 설명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처럼 그 일이 자기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확히는 자기와 동행하는 주님이 그 일을 주관하게 된다. 또 예수님처럼 하나님 시킨 일을 계속 하고 있으니까 조급증을 없애는 최고 비결까지 터득한 셈이다.
우리에게 문제는 소명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미 받은 소명을 실현할 열성과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 소명은 이 땅에 복음의 확장이며 그 실현 수단은 직업이다. 만약 그 소명의식은 철저한데 직업만 마음에 안 들면 당장이라도 자기 좋아하는 직업으로 바꾸면 된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그러나 주위에 미혹된 영혼이 불쌍해 보이지 않고, 주님의 사랑이 부족한 곳에 안타까움이 생기지 않는다면 믿음을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야 한다. 전문사역자 같은 소명을 못 받아서가 아니다. 예수 믿는 믿음의 내용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2/10/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