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6:9 영적 침체의 근본 원인

조회 수 1110 추천 수 16 2011.02.18 22: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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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침체의 근본 원인?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우리 대신 침체된 성령

우리가 아주 당연하다고 여기는 신앙적인 교훈 중에는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 이해 부족, 오해, 심지어 오류로 이끌 수 있는 진술이 가끔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영적침체는 신자가 죄를 짓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때에 온다는 말입니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따져볼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이 진술 자체에 논리적 모순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침체되었다고 느끼는 주체는 분명 본인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있거나, 나쁜 습관에 빠져 있거나, 하나님과 관계가 소원해진 그런 상태에서 본인이 과연 영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겉으로 확실한 문제가 드러나지 않은 단계에선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얻어맞아야만 정신을 차립니다.    

죄나 나쁜 습관에 젖어 있다면 사실은 죄를 즐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포악하고 잔인한 성격을 지녔다든지 사이코패스처럼 죄에 무감각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여 영적으로 사악한, 최소한 부정적인 짓을 의도적으로 행하는 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죄와 나쁜 습관이 가져다주는 현실적 유익이나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성경 읽기나 기도에 등한한 이유는 그 시간에 잠을 자거나 TV를 볼 수 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또 단잠을 자거나 식구들과 TV 보면서 웃고 떠드는 그 순간에는 자신이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다고 생각지도 못합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하지 않는다고 그 대신에 나가서 도적질을 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럴 때는 신자의 영에 내주하신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발하실 뿐입니다. 거듭난 신자라면 죄에 빠져 있다가도 어쩌다 혼자서 조용한 시간을 가질 때에 비로소 까닭모를 죄책감, 최소한 영적 부담감이 아주 조금씩 밀려들어 오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내가 이래선 안 되는데. 다시 정신 차리고 말씀보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해야지.굡遮?자성(自省)이 자신의 내면에 서서히 무겁게 자리 잡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범하고 있는 죄에서 벗어나고 나쁜 습관을 뜯어고치려 애를 씁니다. 물론 온전한 자리로 되돌아오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됩니다. 어쨌든 그런 과정을 두고 영적으로 침체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전환하여서 비록 더디더라도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죄나 나쁜 습관에 젖어 있을 때는 엄격이 말해 본인이 영적으로 침체된 것이 아닙니다. 조금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영적으로 침체된 것입니다.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하나님이 침체될 수는 결코 없지만 말로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신 말하지만 침체되었다고 인식해야할 주체가 침체라고 여기지 않는 한에는 아직은 침체가 아닌 것입니다. 또 본인이 침체되었다고 분명히 인식했다면 성령님과 합력하여 그 침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또한 사실상 침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실망에 빠져서 아무 일도 못할 때가 진짜 침체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거나 나쁜 습관이 주는 유익을 실제로 즐기고 있다면 결코 침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럼 진짜 영적 침체는 언제 오는 것입니까?

도리어 선을 행할 때 침체가 온다.

지금 성경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선을 행하는데 어떻게 낙심할 수 있습니까? 조금 논리가 안 맞는 것 아닙니까? 선이란 분명히 자발적으로 기꺼이 즐겁게 행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구제나 선행을 베풀면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거나, 자기만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선은 사실상 선이 아닙니다.

본문의 뜻은 그런대로 진정한 선을 행하는데도 낙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의 경우 죄를 지을 때보다는 사실은 선을 행할 때에 오히려 낙심하는 경우가 생기거나 더 많다는 뜻입니다.

우선에 신자는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는 반대인 온전한 선을 행하거나 십자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멸시, 조롱, 박해를 받아 힘이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영적 침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해야만 올바르게 선을 행하거나 전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미 예상된 어려움인데다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각오한 고난인지라 비록 현실적으로는 힘들지만 그 마음에는 주님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차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낙심의 원인은 사람에게서 받는 실망과 상처 때문입니다. 물론 신자도 연약하고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인간적인 섭섭함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선은 그런 것에서조차 자유로워야 합니다. 쉽게 말해 상대로부터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개입되어 있다면 온전한 선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낙심의 차원은 이 두 경우와는 다릅니다.

성경은 항상 앞뒤 문맥에서 그 진의(眞意)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먼저 이 구절은 성도들끼리 서로 짐을 나눠지라는 주제를 설명하는 문단(6:1-10)에 속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전반(1-5절)은 성도끼리 죄 지은 것이나 시험 든 것을 서로 용서하고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후반(6-10절)은 물질 사용에 관한 권면으로 모든 이에게 물질로 아낌없이 섬기되 특별히 믿음의 가정과 사역자들에게 먼저 그렇게 하라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근거가 일반적인 선행보다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의 선입니다. 혹시라도 시험에 빠져 범죄하는 형제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물질로 사역자나 교회 안의 궁핍한 형제를 도울 때에도 진심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숨겨진 어떤 동기에도 속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썩어진 것을,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거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도 주목해야할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완전 범죄가 없는데 아무리 천재라도 하나님을 속여 넘길 재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 신자들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그런 마음을 갖지 못하며 함부로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신자가 스스로에게 속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고 심지만 사실은 육체를 위해 심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이긴 하지만 분명 육체를 위하여 심고 있으면서도 그런 줄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 특별히 자신의 뜻과 유익만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와 사역자를 위한답시고 하는 일들 중에도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교회에서 섬기는 일을 하되 진심으로 성령을 위해서 심는다면 아무리 선을 많이 베풀어도, 자기 시간과 재물과 노력을 전부 다 바쳐서 희생해도, 낙심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을 위해서 하는 줄 스스로 속고서 행하는 섬김은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쉽게 낙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거두는 두 열매

이제 스스로 속아 육체를 위해 심은 것이 썩어진 것을 거두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아볼 차례입니다. 설령 인간적 타산적 동기가 조금 개입되었더라도 성도 간에 섬기는 일을 했으면 분명 상대에게 좋은 결과가 생기고 교회 전체에도 덕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썩는 열매가 열린다는 것입니까?  

낙심이란 본인의 마음이 침체되는 현상입니다. 섬김을 받은 성도나 교회가 그렇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본인이 낙심되는 이유는 한 가지뿐입니다. 자기 기대치보다 못할 때입니다. 어떤 결과를 예상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만 해도 그런 낙심의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열매가 빨리 나타날 줄 기대했는데 그보다 훨씬 늦게 나타나니까 낙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피곤하지만 않으면 즉, 낙심하여 더 이상 선을 행하지 못하고 넘어져 있지만 않으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중요한 이유를 확실히 밝혀 놓았습니다. 육체를 위해 심으면 썩어진 것을 거두지만 성령을 위해서 심으면 영생을 거둔다고 합니다. 썩어진 열매와 영생의 열매가 대조되었습니다. 선하고 악한 열매의 대조가 아닙니다. 이미 말한 대로 비록 인간적 의도로 섬겼어도 분명 겉으로는 선은 행해진 것이고 또 교회 안에 선한 열매도 생기지 않습니까?

썩어진 열매란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썩는다는 문자적 의미에 주목하면 특별히 물질의 보상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영생의 열매는 전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예 인식이나 감지도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성도들이나 교회로부터의 보상이 절대 아닙니다. 오직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은밀히 갚아주시는 섬김을 하라는 것입니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밀한 보상마저 이 땅에선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자기에게 부어질지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영광은 확실하고도 풍성하게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낙심하지 않으려면 세상으로부터는 너무나 당연히 또, 성도들이나 교회로부터도 어떤 보상도 기대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꼭 물질적 보상이 아니더라도 칭찬, 높임은 물론 격려나 위로라도 바라면 낙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스스로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려는 목적의 섬김도 더더욱 낙심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의미는 여기서도 더 나아갑니다. 사람들에 대한 기대는 벌써 접어버리고 진심으로 선을 행하는 신자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흔히들 경험하듯이 경우가 없는 교인들이 많고 교회 안에 시끄러운 일이 그치지 않으니까 인간에겐 아예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보다 영생과 썩어진 열매를 대조했기에 하나님의 보상마저 기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이미 영생을 확보했고 그것이 신자가 신자답게 사는 것의 궁극적인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외의 보상을 바란다면 자연히 낙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성경이 표현했겠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성전을 건축하려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소요 자재들도 이미 많이 마련하고 있었지만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니까 바로 중지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여러 잘못으로 하나님이 못하게 했지만, 그 계시를 듣는 순간에는 그도 인간인지라 틀림없이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뜻에 따라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하심에 전적으로 순복했습니다. 자기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다릴 줄 알았던 것입니다.  

헤롯 대왕은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라고 자기 아내와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도 다윗에게 민심이 몰리고 왕위 계승자 요나단마저 그를 좋아하자 자기 아들임에도 저주했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다윗은 아들 솔로몬이 지어야 한다니까 곧바로 수긍하고 그 과업을 물려주었습니다. 자신의 의와 영광에 대해선 전혀 미련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이 땅의 것은 아무리 화려하고 풍성해도 결국은 썩어질 것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속이는 이유

요컨대 본문은 결국 썩는 열매를 바라면 낙심하게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썩는다고 추하고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나 하나님 어느 쪽이든 혹은 두 쪽 다든 “이 땅에서의 어떤 형태라도 보상”을 바라면 영적인 침체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 죄를 범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빠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선을 행한 후입니다.

반대로 자신은 오직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선을 행해야만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영생을 이미 확보한 것으로만 평생토록 감사해야, 최소한 그것으로 충족하다고 실감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썩는 열매”를 바라지 말고 “바로 자신이 한 알의 썩어 없어지는 밀알”이 될 때에만 영적 침체를 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놀랍게도 성경은 스스로 속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넘어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기가 의도적으로 자기를 속인다고 말한 셈입니다. 무슨 일이든 교회 안에서 선을 행하고 있으니 성령을 위해서 심는다는 데 전혀 의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부터는 몰라도 하나님께로는 보상이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렇게 믿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어려운 성도 누구를 남몰래 도와 준 것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만은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교회 건물 신축할 때에 익명으로 힘에 부치게 제일 많이 헌금한 것 재정 집사나 담임 목사는 몰라도 주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사례비도 못 받고 내 돈까지 다 바쳐서 성도들을 섬겨서 교회를 이만큼 부흥시켰지 않습니까? 제가 어디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바랍니까? 저는 인간에게선 전혀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저에게 뭔가 보상을 해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더 성도들을 더 잘 섬기고 교회를 더욱 크게 성장 시킬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지금 저희 집에 일어나는 이 어려운 환난들이 어떤 연유입니까? 아니 현실적 어려움은 그런대로 참고 이겨내겠지만 저로 온갖 음해와 비방만 듣게 만드시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만은 저를 알아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이런 비슷한 생각이 든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침체에 빠져버린, 최소한 빠져들어 가고 있는 실태입니다. 우리 중 거의 모두가 되풀이하여 절감하는 영적 기현상입니다. 진짜로 주를 위해서 성심껏 진정으로 열심히 선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위한 보상이 없다는 이유로, 그것도 자신이 바라는 때와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얼마나 큰 낙심에 빠져 주저 않을 때가 많습니까?

이상하게도 이름 없이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한 알의 밀알로 썩어 없어져야 한다는 말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려고 무진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보상에 대한 기대나 예상이 자기 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스스로 썩는 밀알이 되려고 너무 노력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지쳐 버린 셈입니다. 썩는 밀알이 되려고 자신 쪽에서 시간과 노력을 상당히 투자했다는 계산 내지 느낌이 들면 그 반대급부로 보상을 자연적으로 바라고 싶어집니다. 우리 속에 그 만큼 나만 위하고 나를 중심에 두고자 하는 죄의 본성의 뿌리가 깊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선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옵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그분 한 분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선이 통과하는 파이프일 뿐입니다. 우리조차 우리 스스로 썩으려 하면 힘이 들뿐 아니라 사실은 썩는 밀알이 아닌 것입니다. 빛도 그냥 비취는 것이며, 소금도 자연히 녹게 마련이며, 밀알도 이미 그 안에 모든 생명의 신비가 다 포함되어 있기에 그냥 심어지기만 하면 반드시 썩게 됩니다. 빛의 근원은 따로 있으며, 소금을 만드신 이가 따로 있으며, 밀알에  DNA를 저장시키는 분이 따로 있듯이 선의 근원도 따로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망, 여유, 자원, 시간이 생긴 것도 전부 하나님이 마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이 나를 심어놓은 환경과 시간과 역할에서 그냥 그대로 그분께서 나를 통해 당신의 영광만 드러내어주길 바라고 순종하면 됩니다. 바로 그 때, 그 장소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 헤아려서 그대로 행하면 그만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에 열심을 내어서 그분을 깊이 알아가며 그분의 뜻에 대한 분별력과 주어진 현실에서의 적응력을 키워야 합니다. 한마디로 에스더처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주님 앞에 서있기만 하면 됩니다.

역으로 말해 내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헌신, 실천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덤비면 오히려 낙심케 되는 일이 더 많이 더 자주 생긴다는 것입니다. 나와 내 주변과 교회를 영적으로 크게 부흥시켜야지 노력하면 오히려 영적 침체가 필연적으로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기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입니다. 성경이 본문 앞에서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3절)고 말한 까닭입니다.      

우리를 귀히 쓸지, 천하게 쓸지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이나, 특별히 선한 일을 행하여서 귀한 그릇이 되려고 덤비면 그 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낙심과 피곤뿐입니다. 신자가 영적 침체를 겪지 않거나,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죄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뜨겁게 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히 행할 일입니다. 학생이 공부하는 것, 아니 인간이 밥 먹고 누워 자는 것과 방불합니다. 또 그러겠다고 실천하는, 아니 마음먹는 순간 이미 영적 침체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보다는 선한 일을, 그것도 성도와 교회를 위해서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할 때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부흥했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순간이 영적 침체로 넘어가는 관문임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영생을 이미 얻은 것 이상의 보상을 바라거나, 조금이라도 그것만으로는 충족치 않다고 여기지는 순간 곧바로 침체가 닥치게 마련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골고다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는 길만이 영적으로 부흥, 아니 침체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또 그것이 풍성하고도 은혜로운 승리를 맞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2/18/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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