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이네르바이젠의 예리하고 서글픈 바이올린의 선율을 들으며 밤 하늘의 달을 보면 푸르고 서늘한 색조를 띄는 것 같다. 왠지 울적한 날엔 그 선율에 맘과 몸을 실은 채 흐느껴 울고 싶다. 그냥 하염없이 울고만 싶어지는 그런 날이 있다.
이별 연습을 평생을 통해 해왔다라 생각한다. 아니 인생은 이별의 연속이라 표현하고 싶다.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의 얼굴이 떠 오른다. 막내딸이라 유난히 사랑해 주셔서 그랬는가 돌아가신 날은 울음소리를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이 귀퉁이 저 귀퉁이 피해 다니면서 흐느껴 울다가 울다가 가슴이 터지는 통증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 밖엔 없다.
요즘들어 그 아픈 통증이 아리하게 느껴지며 다가온다. 분명 내 감정에 고장이 생긴 것이다. 내 영적 감정에 고장이...
교회가 세워지며 덩그마니 남겨진 세 가정, 그 가운데 막내둥이 집사님이 다음달에 학업문제로 네바다로 떠난다고 한다. 그 소식을 접하면서부터 내 감정에 이상신호가 온 것 같다.
함께 울고 웃으며 그 모진 시간들을 고통이라는 이름 아래 고통의 크기만큼 하나님의 품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음을 서로 고백하면서 발 빠른 노루가 되어 어느사이엔가 말씀의 은혜에 함께 푸욱 잠겨버리게 된 나의 이웃, 목숨을 건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전우의 얼굴을 보면서 느껴지는 감정이 이런 것일까? 참 잘 견디었다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 할 수 없는 이 맘...
그런데 떠나간단다. 우리를 두고 떠나간단다. 남겨진 우리들 보다 훨씬 더 맘이 아플터인데, 혼자 떠남은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 길일까? 안스러워서 더욱 내 맘이 이리도 아픈가 보다.
문득 이선우님의 큐티노트가 떠 오른다. 저녁에는 떠남의 기도로, 아침에는 바라봄의 기도로... 나도 그리해야겠다고 다짐해 놓고선 잊고 있었다.
이별 앞에서 아픈맘을 다스릴 수 있는 길을 바라봄의 기도가 있기에 소망이 있는 것 같다. 막둥이 집사님이 지금은 떠나 버리는 것 같지만 그곳에서 또 다른 공동체 속에 아름다운 예수 이야기를 흩뿌릴 때에 우리는 또 커다란 원을 그리며 하나가 되겠지.
그렇게 바라보니 한결 맘이 포근해 진다. 떠나 보내는 맘도 어느사이 넉넉해 지는 것 같다.
오늘도 지고이네르바이젠의 선율은 가늘고 날카로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지만 그 음악에 맞추어서 짚시의 춤이라도 한바탕 출 수 있을 것 같다.
서로 어루어져서 예수님의 사랑을 노래하며 춤을 추는 우리 모두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임에는 분명하기에 말이다. 주말에 만나서 따끈한 커피 나눠 마시면서 떠남과 바라봄의 기도를 함께 이야기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