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그리고 기이하게도, 성경은 전도사나 목사 혹은 장로들이나 열심히 읽고 연구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교인 중에도--적지 않다. 이들은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 또한 그렇게 여긴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이들이 적어도 두 단계로 신자를 분류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보통 신자"와 "사역자/직분자/신학자"로. 그들은 목사나 장로가 될 생각이 없다면 성경을 열심히 읽을 필요가 없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제자란 말은 대학원생처럼 여겨진다. 신학자나 사역자나 직분자로--소위 "주의 종"으로--봉사하기 위해 특별 "훈련"을 받아야 하는 남달리 "믿음 좋은" 신자들이 제자라고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신자와 제자를 그렇게 구분짓고 있지 않다. 한 군데만 보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느니라."(행 6:7) 여기서 "제자"란 곧 믿고 따르는 자 곧 "신자"임이 명확하다. 그런데도 도대체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사람들이 제자를 더 헌신된 별도의 신자라 여기게 되었을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일까? 하지만 주 예수께선 그의 사도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하셨다. 즉 모든 믿는 자는 그런 헌신과 충성이 요구되는 제자여야 한다는 말씀이다.신자는 믿음의 측면에서, 제자는 헌신의 측면에서 표현한 말일 뿐 그 둘은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자는, 그의 믿음이 참된 것이란다면, 제자일 수밖에 없다.
사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듣고 따르던 숱한 무리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던 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며 그들의 참 동기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현세의 안녕이란 것을 지적하시고, 자신이 영생을 주는 생명의 떡이요 생수임을 믿으라고 하자 다 예수님을 떠나고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 사도 요한은 열 두 제자만 남았음을 굳이 밝히고 있다. (요 6장) 그런데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며 계속 예수님을 따르던 열 두 제자마저 주님의 십자가 처형을 전후하여 주님을 배신하고 떠났음을 우리는 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장담한 열 두 제자의 믿음 또한 정도의 차이일 뿐 현세적인 믿음이었던 것이리라.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주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 일에 대해 알아감에 따라, 주를 증거하고 죽음을 불사하고 기꺼이 당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이 신자 중에 어떤 헌신된 자들이 특별한 훈련 과정을 이수하여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굳이 그 둘 간의 순서를 정하자면--제자들이 진리에 눈이 띄면서 신자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참된 제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혹자가 잘못 믿고 있듯이 신자답게 살아감은 즉 제자됨은 후일 받을 상급에 걸린 사안이 아니다.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주님의 제자로 살지 않는 신자에겐 그의 사후에 하나님 나라가 보장되어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목사 장로 신학자들만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 각인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신자임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길이다.
2015. 03. 01
정말 그랬습니다. 성경을 매일 읽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은 목사님들만의 몫이라고,
교인인 나는 교회만 다니고, ;교회에서 조금 봉사하고, 주일성수 십일조하면 뭐 그냥 최소한 지옥은 안가겠지'하는 안일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교리와 성경에 거의 관심은 없고, "교회에서는 찬양과 위로를 받고, 자신은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말씀대로 산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는 신자들이 대부분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