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잘못하면 법원에 고소하라.(고전6:1-1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6:1-11)

 

하루도 멀다 않고 터지는 교회 스캔들

 

교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거룩한 낭비를 해야 하고 교회는 그 받은 돈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교회 돈을 개인적 용도로 임의로 오용 남용하면 횡령죄를 범한 현행범입니다. 이럴 때는 교회가 나서서 세상 법정에 고발해야합니다.

 

물론 그러기 전에 목사에게 개인적으로 소명 회개 보상 사죄할 것을 간곡히 요구하고 또 용서해주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모든 노력이 실패했을 때에 한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껏 오늘 본문을 통해 교회 분쟁은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선 안 된다고 배워온 것과 상충되어서 당혹될 것입니다.

 

작금 한국과 해외 이민한인교회에서 하루가 멀다 않고 터지는 스캔들이 바로 목사의 재정 비리입니다. 가뜩이나 기독교가 신망을 잃고 있는 판에 더욱 사람들로 교회와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같은 목사 입장에서 목사를 고발해야 한다고 말씀드려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합니다.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것처럼 부끄럽지만 그것이 해결책입니다

 

더 이상 이 문제를 쉬쉬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뭔가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심각하게 고민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최소한 성경적으로 정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도 간의 분쟁을 세상 법정에 의뢰하는 일이 잦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이해 적용할 때에 가장 자주 범하는 오류를 하나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모든 사안을 윤리적 종교적으로 옳고 그른 것으로만 나누고 또 그에 따라 신자가 행해도 되는 일인지 하면 안 되는 일인지 여부부터 결정하려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교회 분쟁을 세속 법정에 고소해도 되는지 하면 안 되는지 차원으로만 접근합니다. 그럼 바울이 정작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을 놓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잘 지키려는 의도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교회 안에 또 다른 계명이 만들어지고 그 준행 여부를 두고 문제 삼게 됩니다. 출발은 선했지만 결국은 신자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운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오류를 재현하게 됩니다.

 

구태여 세상 법정이냐?

 

먼저 바울은 너희 중에 분쟁이 생기면 세상 법정에 송사는 잘 하면서 왜 성도 앞에서 하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1절) ‘고발하고’라는 말 앞에 ‘구태여’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인데, 괜한 수고를 했으며, 더 좋은 방안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전제한 후에 차후의 논리를 전개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을 ‘불의한 자’라고 표현했지만 불신 세상이 사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 밖 즉,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함께 하지 않아서 불의(不義)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구원 진리와 당신의 가르침대로만 따르면 교회 안에서 그런 분쟁은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가능한 근거를 2,3절에서 어떻게 설명합니까?

 

성도가 세상과 천사를 판단할 권능을 가졌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로 선악 간을 구분할 수 있는 완전한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 법률은 상대적이고 제한적이며 불완전합니다. 그에 따른 판결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천사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시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때에 신자들이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천사들은 “성도가 부리는 영”(히1:14)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법정에 송사하는 사건을 두고 “지극히 작은 세상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2,3절) 옳고 그른 것을 누구나 쉽게 판단할 수 있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증거가 충분한 현행범인 셈입니다. 예컨대 돈을 빌려가선 떼먹었다든지, 계약서를 위반했다든지, 사기로 속였다든지 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4절에 대한 해석이 조금 애매합니다. 분쟁의 재판관으로 세운 “교회에서 경(輕)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 누구를 지칭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둘로 나뉩니다.

 

먼저 교회 밖의 세상 법관을 뜻할 수 있습니다.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야단치고 있는 문맥의 흐름과 일치합니다. 표준새번역본은 그래서 “교회에서 멸시하는 바깥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앉히겠습니까?”라고 혼동 없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세상 밖 사람을 불의하다고 해서 그들을 무조건 폄하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세상과 천사를 판단하는 신자의 권능과 비교되는 표현일 뿐입니다. 또 고린도 교인들이 세상 법관들을 그렇게 멸시했다면 그들에게 의뢰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당시 정황상 앞뒤 논리가 조금 맞지 않습니다.

 

둘째로 교회 안의 믿음이 제일 연약한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정도 문제는 그런 신자에게 맡기라는 명령형으로 또는 그런 신자가 맡아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풍자적인 꾸중의 뜻도 됩니다.

 

문장은 ‘교회가’가 아니고 ‘교회에서’ 경시하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법적 구성이 교회가 동작이 주체가 되는 ‘교회가’가 아닙니다. 원문은 어떤 장소의 안을 의미하는, 영어로 ‘in’에 해당하는 전치사를 사용해 ‘교회에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둘째 해석이 더 합당한 셈인데 이번에는 세상법정에 고발하는 것을 야단치는 문맥과 합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 해석을 택하든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전체 흐름과 강조하려는 주제와는 상충되지 않습니다. 지금 소송하고 있는 안건은 누구나 판단이 가능한 명백한 잘못이기에, 교회의 초신자에게 맡겨도 판단이 가능하므로, 교회 밖에 맡길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분쟁이 아니라 죄이다.

 

그렇게 명백하고 간단한 사건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는 이유는 그럼 무엇입니까? 바울이 지극히 작은 세상일이라고 했으니 교회 안의 하나님의 법으로는 판단이 아주 쉬운 안건입니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고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고 말했듯이 이미 불의가 완연한 일입니다.(7,8절)

 

그럼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올바르게 서있는 교회라면 반드시 한 쪽이 쉽게 지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정죄 받을 수밖에 없는 자가 교회 밖의 넓은 인맥을 동원하고 뇌물도 제공해서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왜곡된 판결을 이끌어내겠다고 노리는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오히려 상대에게 덮어씌울 목적입니다.

 

둘째는 한 쪽의 잘못이 명백한데도 교회에서 그렇게 판결을 내려주지 않은 경우입니다. 교회 안의 의사결정 구조와 그 집행에 뭔가 부정불법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법정에라도 호소해서 자신의 손해를 보상 받고 누가 옳은지 따지며 최소한 자신의 이름과 자존심이라도 지키겠다는 몸부림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분쟁이 그러하듯이 고린도 교회의 경우도 이 두 경우에 다 해당될 것입니다. 

 

지금 논의하는 담임목사의 횡령이라는 문제에 관해선 먼저 확실히 해둘 요소가 있습니다. 법정에 고소하려면 반드시 두 이해 당사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교인들끼리 사소한 분쟁을 갖고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라고 합니다. 고소란 두 당사자 중에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혹은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 법의 판결에 의존하려는 시도입니다. 원고와 피고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교회 돈을 담임목사가 오용하는 것은 분쟁이 아닙니다. 시시비비를 따질 두 당사자가 없습니다. 한 개인이 저지른 명백하고도 일방적인 죄입니다. 완전 불신자로 교회에 갖나온 자라도 목사 잘못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목사와 목사 편을 드는 재정 담당자들과 당회나 교인들 즉, 교회를 두 당사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목사는 절대로 교회 위에는 물론이고 동등하게라도 맞설 수는 없습니다.

 

요컨대 목사의 개인 비리는 고린도전서 오늘의 본문에 해당되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엉뚱한 성경구절로 판별 적용하고 있는데 그 출발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재정장로가 간곡히 권면하라.

 

이런 경우에 반드시 적용되어야 할 성경구절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5-17의 교인의 잘못을 교회가 치리하는 원칙에 관한 말씀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주님은 먼저 누군가 죄를 범한 일을 알게 된 관련당사자나 증인 혼자서만 그 잘못을 범한 사람을 찾아가서 회개하도록 개인적으로 권하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빠른 회개의 기회를 주려는 뜻입니다.

 

예컨대 목사가 재정장로에게 개인적으로 급한 일이 있어 돈이 필요하니 얼마를 지불해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목사가 죄를 범하는 혹은 죄에 넘어가려는 순간입니다. 재정장로는 반드시 간곡히 당부하면서 단호하게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목사님 나름의 사정은 이해가 되기에 이번 한 번만은 제 책임 하에 지불해드리겠습니다. 당회원들도 제가 설득시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라도 목사님이 직접 당회에 이 일에 대해 소명해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런 편법적 지불은 절대로 해드릴 수 없습니다.” 재정장로 혼자서만 목사와 개인적으로 상대하여 권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불행하게도 목사님들이 처음부터 자기 말이면 무조건 복종하는 신복을 재정 책임자로 세웁니다. 죄송하지만 처음부터 교회 돈을 공모해 대놓고 해먹겠다는 의도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사단이 발생한 후에 소송해도 되느냐 따지기 전에 처음부터 교회의 재정관리 시스템을 교인들 다수가 참여하여 검증할 수 있는 방식이 확립되어 있으면 쉽게 해결됩니다. 그럼 애당초 문제가 생길 소지가 없거나 확연히 줍니다. 한국 교회들도 교회마다 정관을 제정하여서 규정대로 공평하고 투명하며 민주적으로 운영해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 일이니까 복잡하게 사회처럼 법으로 따지지 말고 은혜로 넘어가자,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얼버무려선 안 됩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자 핑계입니다. 교회에서 은혜가 작용해야 할 부분은 돈이 개입되지 않은 예배, 찬양, 기도, 성경공부 같은 영적 차원의 일입니다. 성도 간에 조금씩 의견이 다를 수 있으나 서로 인내 포용해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은혜로 넘어가는 모습입니다.

 

반면에 돈이 개입되면 문제는 달라져야 하고 또 달라집니다. 돈이 악한 것이 아니라 이기적 탐욕적 죄의 본성이 살아있는 인간이, 목사도 포함하여, 문제입니다. 돈이 개입되는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철두철미하게 냉정하고도 합법적으로 관리 운용되어야만 합니다.

 

목사가 돈을 개인적으로 남용하다가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 사죄한다면 교회는 그 이후부터 은혜를 작동시켜야 합니다. 목사님이 진정으로 뉘우쳤고 현재 갚을 돈이 없으므로 이번만은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없던 일로 치고 용서해서 다시 받아들여줄 테니 앞으로는 그런 일이 절대 없고 목사직분도 더 은혜롭게 수행해달라고 품어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돈을 운영하는 일에선 교회법에 따라야 하고 또 교회법은 반드시 사회법과 일치해야만 합니다. 미국에선 교회는 비영리기관으로 반드시 법인으로 설립되어야 하고 법원에 등록해야 합니다. 또 아주 엄격한 자격기준에 따라 연방 국세청의 면허를 받아야만 합니다. 또 국세청이 정해 놓은 회계 기준과 방식에 따라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면세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교회에 허용하는 면세 혜택도 교회법인의 재산에만 해당되지 목사의 사례비 즉, 소득은 과세 대상입니다. 목사로서 비용공제 항목은 다양하고 비교적 여유 있게 제공하지만 목사도 반드시 매년 소득을 신고하고 세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국교회들은 공정한 재정관리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어서 재정 비리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반드시 공개적으로 합법적으로 해결합니다. 횡령이 확실하면 사법기관이 당연히 개입합니다. 환자가 아픈 줄 알고도 치료하지 않으면 의사가 처벌받아야 하듯이 현행법을 어겼다면 목사라도 검찰이 나서서 고소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검찰의 직무유기입니다. 

 

세리나 이방인처럼 여겨라.

 

예수님은 처음에 한 사람이 찾아가 회개를 권해도 듣지 않으면 두 세 증인이 권고하고 그래도 따르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나서도 말을 듣지 않으면 놀랍게도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합니다.(17절)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세리는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으로 여기고 식사교제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구원 밖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까지 나섰는데도 명백한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 밖으로 출교 내지 파문시키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신 귀한 종으로 목사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직접 징계하신다고 말합니다. 교인들이 주의 종을 징계 내지 심판하면 큰 죄로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목사님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목사는 맡은 직분과 역할만 다르지 하나님 안에선 동일한 신분과 위치에 있는 성도들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초대 교회에선 그래서 왕족과 노예가 함께 어울렸고 또 목사와 일반 교인끼리 형제와 자매로 부르며 서로가 서로를 동일하게 섬겼습니다.

 

길게 설명할 여유가 없어 간단히 말씀드리면 오늘날의 목사는 초대교회로 치면 성경교사와 장로의 중간쯤 직분이고 잘 봐줘서 장로에 해당됩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장로를 더욱 존경하라는 권면이 목사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딤전5:17) 역으로 따지면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목사는 존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은 목사를 존경하라고 했지 무조건 순종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저도 목사인데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말씀을 맡은 자로써 가르침과 기도 사역에 목사 특유의 영적 권능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단 제 자신이 영적으로 충만하고 말씀을 제대로 전할 때에 그것도 꼭 그래야만 할 때에 성령이 상대 성도에게 역사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무슨 일에나 목사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은 성경에 없고 이 또한 부끄럽지만 목사들이 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고린도 전서 오늘의 본문 9,10절에선 불의한 자들이 범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할 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지 못하고 구원 밖으로 내쫓기는 자들입니다. 바로 앞 8절에서 자기 잘못을 세상 법정의 힘을 빌려 상에게 덮어씌우려는 자부터 포함됩니다.

 

그 중에는 간음, 도적, 탐욕의 죄도 있습니다. 바로 일부 목사들이 개인적으로 범하는 비리들입니다. 물론 목사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한두 번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도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은 정죄 받아야 합니다. 또 비리를 지속적으로 행하기에 교회가 공개적으로 소명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거부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목사 쪽에서 먼저 세상 법정에 의뢰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런 자를 지금 구원 밖에 있다고 즉, 거듭난 신자가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바울도 너희 중에 음행하는 자를 내어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고전5:5) 목사가 성적 잘못을 범하고도 회개치 않으면 출교시키라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내어주면 그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고 단서를 달았습니다. 출교나 파문이 계기가 되어서 언젠가 회개하는 것이 그 본인에게 마지막이자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출교나 파문이 그에게 더 좋은 기회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고린도전서 본문은 목사 개인의 비리를 세상 법정에 고발해선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교회까지 나서서 목사에게 간곡히 권고해도 안 되면 출교 시켜야 합니다.

 

그 전에 교회의 회계 재정을 민주적으로 운영해야만 합니다. 밀실에서 지도층 몇 사람의 결정으로 돈이 운영되어선 결코 안 됩니다. 교회의 일을 일일이 교인들에게 물어서 시행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교회가 감사 검증 수정할 수 있는 체계는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또 그렇게 바꿔가는 한국교회들이 차츰 늘고 있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발전입니다.

 

바울이 정작 강조하는 내용은?

 

본문에서 바울이 정말로 강조하고자 하는 그래서 가장 중요한 사항이 따로 하나 더 있습니다. 어떤 성경본문이든 결론에 주목해야 하는데 11절 전반에 너희 중에 불의한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온갖 악행(9,10절)을 저지른 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는 원래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고린도스럽다’는 말이 성적으로 방탕한 자를 말하는 형용사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11절 후반에선 복음 안에서 씻음, 거룩함,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 불의한 자들이 교회에 출석한 후로 회심하고 중생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 애끓는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여러 번 방문했고 또 편지도 몇 차례 보냈습니다. 아주 애착이 많고 관심을 쏟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역할 당시는 십자가 복음의 열매들이 맺혔는데 지금 바울이 부재하자 분쟁과 음행 등이 다시 번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라고 합니다.(5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느냐고 예리하게 꾸짖은 것입니다. 성령의 씻음에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권능이 실종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도 잘 짓지 않는 죄들을 예사로 짓고 그마저 세상법정에 소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서로 복음 안에서 기도하고 말씀으로 권면하면 얼마든지 바로 세울 수 있는데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느냐고 야단친 것입니다.

 

우리말로 번역은 안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씻고 거룩해지고 의로워지는 세 단어 앞에 각기 ‘그러나’(but)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반대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씻을 수 없고, 도무지 거룩해질 수 없고, 도무지 의로워질 수 없는 그런 흉악한 죄들을 범한 그 흉악한 죄인들이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지고 거룩해지고 의로워졌다는 것입니다.

 

요점은 이전에는 그랬는데 왜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실종되고 성령이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있을 때는 복음의 생명력이 성령 안에서 살아 역사했으나 바울이 떠나자 불의한 죄에 다시 빠졌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편지를 쓸 때에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분파가 나눠져 세력 다툼을 했고, 음행이 만연했고, 세상 법정에 소송을 했고, 무엇보다 바울을 헐뜯는 거짓 교사들의 선동마저 있었습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장로가 있다면 교인들이 배로 존경하게 되고 배운 말씀이 살아서 지금 꾸짖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말씀을 경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과 천사들도 판단할 권능을 가졌는데 왜 그 권능을 활용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말씀과 기도에 전혀 열심을 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교회 일을 법원에 갖고 간 것보다 말씀의 권능이 약해졌음을 꾸짖는 데에 더 초점이 모입니다.

 

교회 안에 신령한 분위기를 만들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본문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를 하나로 줄이면 성도가 세상과 천사를 판단할 수 있는 권능이 있음에도 왜 그 권능을 활용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분쟁은 물론 목사의 비리를 세상 법정에 절대로 갖고 가선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강조하는 목사님들의 해석에 신자들이 아무런 분별없이 무조건 따르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또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들에 분쟁이 더 많습니다.

 

목사를 필두로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면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가 충만히 일어납니다. 영적인 분위기가 신령해지고 경건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불의한 분쟁이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분쟁을 일삼으려는 자들은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가거나, 마음 밭이 깨어져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됩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이 임하면 죄에 찌든 영혼이 그러나 씻어지고, 그러나 거룩해지고, 그러나 의로워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성도들끼리도 힘든 일, 눌린 일, 마음 깊숙한 상처와 갈등 등을 꺼내 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해서 기도하면 위로 평강 자유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함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며 함께 전진할 수 있습니다.

 

신자 각 사람에게 성령이 내주하기에 교회는 항상 한 믿음, 한 소망, 한 주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만 머리로 모시고 오직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일을 두고 기도 순종 헌신하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납니다. 반면에 그분을 등지는 순간 모든 불의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교회가 자정(自淨)하는 능력을 잃었다면 일차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담임 목사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가 개인적인 비리를 지속하고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은 지금 죄송하지만 그런 자를 두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불의한 자라고 말합니다. 본문을 교회 일은 세상 법정에 절대 가져가면 안 된다고만 해석 적용한다면 구원 밖에 있는 목사에게서 십자가 복음을 계속 배우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런 목사는 교회에서 파면 출교시켜야 합니다. 교회마다 그런 제도를 하루 속히 갖추고 실현해야 합니다. 작금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들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본문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입니다.

 

현대교회는 사정이 다르다.

 

본문을 이해함에 초대교회 당시와 오늘날의 교회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음도 감안해야 합니다. 당시 시민사회를 주관하는 법률의 내용은, 특히 고린도 같은 이방세계에선 모세의 율법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수준이 낮았습니다. 예컨대 남자들의 성적 방종에 대해선 아주 관대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율법에선 남자도 동일하게 엄격한 벌을 받습니다. 그런 문제로 분쟁이 일어날 때에 율법으로 판결해야지 세상 법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각 이방 지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따라 도덕적으로 아주 의롭게 사는 모습과 경건한 신앙에 감복이 되어서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신약성경에 “경건한 사람”이라고 표현된 이들이 그들입니다. 교회가 그만큼 높고도 완전한 도덕률을 갖고 있는데 왜 그보다 수준이 훨씬 낮은 이방 세계 법률에 의존하느냐고 꾸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와 교인이 세상을 판단할 권능을 가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비록 이방인들도 많이 출석했지만 초대교회는 아직은 유대인들이 주류였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 중심으로 생활하는 종교적 민족이었습니다. 모든 삶이 성전 회당 중심이었고 모세 율법으로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영적이지 않은 일상생활의 분쟁이라도 교회 안에서 율법으로 판결이 가능했는데도 세상법정으로 갖고 갔다고 야단을 친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날에는 세상법률이 아주 정미하고 공평해졌습니다. 사회적으로 모든 측면에서 개선 성숙되었기에 당시 미개한 사회에 적용되는 모세 율법보다 더 우월한 규정도 많습니다. 교인들끼리의 분쟁을 사회법에 의존해도, 아니 그러는 것이 더욱 공의로운 판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솔직히 사회법이 교회가 갖고 있는 정관이나 관련 규정들보다 더 나을 수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이전과 달리 교회생활과 일상적 삶이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성전이나 회당 중심의 삶이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교인들끼리 분쟁을 세상 법정에 호소하고 있고 또 그런다고 꼭 잘못이라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 본문을 두고 교회 분쟁을 세상법정에 의뢰해도 되는지 여부를 교리적 신학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현대신자들에게 분쟁의 법정소송 금지의 실제적 효력은 상실되었기에 바울이 권고한 그 정신을 자신의 상황과 믿음에 따라 개별적으로 참조 적용하면 될 것입니다. 

 

교인들끼리의 분쟁은 가능한 서로 용서하고 은혜로 덮어두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잘못이 있을 때는 개인적으로 조용히 잘못을 고쳐줄 것을 요구하고 그러지 못하면 사회법에 호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의 생각과 판단에 달렸습니다. 소송한다고 믿음이 나쁘다, 믿음으로 행해선 안 될 큰 잘못을 범했다고 정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같은 교회 교인에게 분명 사기를 당해 엄청난 손해를 일방적으로 입었는데 믿음으로 은혜로 덮어두라고는 아무도 섣불리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본문에 따라 담임목사의 개인적 비리를 덮어두라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 가르침대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목사가 따르지 않으면 세상법정으로 가든지, 다수 교인이 목사를 쫓아내던지, 따로 나가 교회를 새로 시작하면 됩니다.

 

정작 한국교회가 시급히 수행해야할 과제는 이런 성경구절의 잘못된 적용을 바로 잡고 정확하게 가르치는 것과, 교인들이 공사를 구분해서 법에 따라 치리할 수 있는 체계와 규정을 각 교회마다 확립하고 시행하는 구조적 개혁입니다.

 

8/5/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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