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죄일의 아사셀 염소의 의미

조회 수 554 추천 수 0 2018.10.06 12:22:14

(레16:20-22) 대속죄일의 아사셀 염소의 의미

구약성경강해(5) / 레위기강해(5)

 

“그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살아 있는 염소를 드리되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16:20-22)

 

대속죄일이 따로 필요 없지 않는가?

 

이스라엘 전 백성의 지난해에 지은 모든 죄의 사함을 받는 날이 대속죄일입니다. 아사셀 염소를 광야 멀리로 떠나보냅니다.(22절) 염소에 전가된 모든 죄를 그 뿌리이자 원흉인 사탄에게 돌려보낸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은 나중에 아사셀의 염소를 절벽에서 떨어트려 죽였습니다. 죄를 돌려보내는 것을 넘어서 아예 말살하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온갖 죄악으로 타락했고 특별히 우상을 숭배한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심판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포로 귀환 후에 크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순종하겠다는 다짐을 확고하게 한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대속죄일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아서 성화에 적용하고 침례 요한이 말한 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레위기 제사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려야 하며 그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매번 죄를 범할 때마다 제사 드려 다 용서 받았다면 구태여 따로 대속죄일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미처 회개하지 못한 죄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사회에선 남들이 다 아는 공개적인 죄를 짓고도 속죄제나 정결례를 지내지 않으면 히브리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영구적으로 혹은 일시적으로 그 사회에서 추방을 당합니다.

 

따라서 대속죄일 제사란 남들이 모르게 죄를 짓고도 속죄하지 않는 경우와 미처 죄인 줄 모르고 습관적으로 지은 죄까지 하나 남김없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는 것이 근본 뜻입니다. 쉽게 말해 주일 예배 때에 대표 기도하는 분이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대표해서 하는 기도는 성도 각자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알아도 일일일 열거할 수 없으니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에도 그렇게 말하면 아주 큰 잘못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왜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예사로 그렇게 기도합니다.

 

모르게 지은 죄는 없다.

 

흔히들 자범죄(自犯罪)는 즉, 죄인 줄 미리 알고도 지은 죄는 반드시 회개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단은 구원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영단번의 완전한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진심으로 회심하고 그 대속의 은혜를 믿은 자는 더 이상 정죄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범죄라고 해서 회개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 죽이는 꼴이 됩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신자에겐 모르게 지은 죄란 사실상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죄를 지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죄를 짓고 난 후에는 본인의 양심상 잘못이라는 자각이 듭니다. 습관적인 죄란 오래 동안 동일한 죄를 범했다는 뜻입니다. 본인이 모를 리 없습니다. 늦잠 자는 것 같은 죄가 아닌 단순한 생활습관도 고치려 애를 쓰는데 죄를 범해 놓고 모른다는 것은 아예 말이 안 됩니다.

 

치과 의사가 환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때가 제일 빠른 때입니다.” 누구나 치과는 무서워 가길 꺼려해서 차일피일 미루다 도저히 어쩔 수 없을 때에야 마지못해 갑니다. 그럼에도 치료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를 회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할 당시는 미처 몰랐고 한참 후에야 깨달았을 수 있습니다. 오래 동안 습관적으로 짓긴 해도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남들은 아무도 모르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특별히 징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일단 신앙양심에 찔리면 그 때가 가장 빠른 때로 곧바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대속죄일은 하나님이 어쨌든 일 년은 기다려 준다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도 해가 바뀌면 지난해의 죄는 물론 오랜 잘못과 허물을 고치려고 결단하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신자는 해가 바뀌길 기다릴 것 없이 매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 믿은 후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 중의 하나는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치장하여서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모든 힘을 쏟으며 살아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항복한 후로는 인생의 목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며 무슨 일을 하든 그분의 영광을 높이길 원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현실적인 형편은 궁핍하여 사람들로부터 멸시 천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직 하나님만 따르기로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행했고 세상 사람들이 다 하고 있으므로 양심의 가책이 없었던 사소한 불법과 부정에도 심히 찔리게 됩니다.

 

일단 교회에 출석하면?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형제를 바보라고 말로 모욕을 주는 것은 인격적인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또 예쁜 여자를 보고 음란한 마음을 품으면 영혼으로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된 후로는 그 가르침에 대해 절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동보다 말이나 생각으로 지은 죄가 훨씬 더 많고 더 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행동과 말은 자주 외부 자극에 따라 반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누가 주입하거나 강요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내 속에서 저절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추하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이 이미 죄에 찌든 존재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당신은 죄인이니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십시오.”라고 전도를 받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도 그랬지만 예수쟁이들이 더 위선적이고 뒤로 호박씨 까면서 누가 누구더러 죄인이라고 하느냐는 반발이 생깁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예컨대 마누라 등쌀에 끌려서 교회에 나오게 되면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하지 않아도 스스로 회개하려고 결단한 적이 없어도 설교를 계속 듣다가 어느 샌가 예수님이 까닭 없이 좋아집니다. 신자에게 성령이 함께 하고 교회는 그런 신자들의 모임이라 성령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심령의 깊숙한 내면의 마음 밭을 뒤지어 엎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자기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자기야 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절감합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가슴이 쓰리기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소망하게 됩니다.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지는 것이 예수 믿은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기 믿음을, 심지어 구원 받았는지 여부를 의심해봐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미쁘신 하나님에게 자기 죄를 자백하면 사해주신다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요일1:9) 신자가 남들이 모르는 죄를 지었거나, 남들은 죄라고 여기지도 않은 사소한 불법과 부정을 범했거나, 여전히 습관적으로 무의식중에 죄를 지었거나, 그럼에도 너무나 나태해서 미처 회개하지 못했을지라도, 일단 스쳐지나가는 생각으로라도 자각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실토해야 합니다. 속에 있는 것을 완전히 다 끄집어내어 주님께 자기 입으로 토설해야 합니다.

 

스스로 자백하기가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입술로 시인하며 발설하기는 더욱 부끄럽고 싫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얼버무려선 안 됩니다. 육하원칙에 따라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잘못을 범했는데 왜 그것이 잘못인지까지 상세하게 주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물론 반드시 그런 문장을 만들어 직접 말로 고백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기 마음으로는 정확히 그렇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는 주일 예배를 드리든 혼자 개인적으로 기도를 드리든 매번 대속죄일의 제사여야 하고 아사셀의 염소를 절벽에서 떨어트려서 죽여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보다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는 당연히 하나님에게 하지만 사실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백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무엇을 행했으며 어째서 그것이 죄가 되는지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하고 또 어떻게 고치겠다고 결단해야 하나님이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는 것은 마치 하나님에게 Sorry 한마디 하고 때우려는 셈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기도할 것이며 나아가 평생토록 습관적인 죄를 고칠 생각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일단 Sorry했으니 즉, 신자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했으니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 얻어낼 것만 길게 끈질기게 뜨겁게 강청하듯이 기도하여 응답만 받아내겠다는 심사입니다. 이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와 정반대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먹고 마실 것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십니다. 반면에 당신의 나라의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자가 필요한 것을 다 아시니까 먹고 마실 것은 구태여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자는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이전에 이미 지은 죄들을 철저히 회개하여 그분과의 관계부터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주지 않는데 어떻게 신자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회개의 기도부터 먼저 길게 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그 후에 간단히 구하면 됩니다. 지금신자들은 이 순서를 완전히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구하는 것을 비전이라는 명목으로 최대한 크게 잡아서 떼쓰듯 강청하는 기도를 해서 응답만 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좋은 믿음이라고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가 잘못하면 어떻게 야단을 칩니까?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그것이 잘못인지 네 입으로 정확하게 말해 봐! 또 그것을 어떻게 고칠지 스스로 생각해 봐! 그리고 혼자서 열심히 노력해서 고쳐. 정 힘들면 아빠 엄마가 도와줄 께!”라고 합니다. 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진정으로 잘못을 시인만 하면 언제든 용서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잘못에 대해 벌주려는 것이 본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식이 정말로 마음을 잡고 부모 말 잘 들어서 학교성적이 올라가면 더 잘하라고 최신형 스마트폰 노트북 얼마든지 사주지 않습니까? 인간의 부모도 이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어떤 것을 원하겠습니까? 또 신자가 그대로 행했을 때에 얼마나 큰 복을 주시겠습니까?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

 

신자에게 모르게 지은 죄란 사실상 없습니다. 전부다 자범죄로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 출석한지 얼마 안 되면 믿음이 연약하고 성경적 지식이 아주 얕을 수 있습니다. 또 그래서 옛날 습성에 젖어서 아무 생각 없이 죄인 줄도 모르고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순전한 마음이 있었고 또 정말로 죄인 줄 몰랐다면 하나님에게도 그것은 이미 죄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것마저 형벌을 내릴 만큼 율법적 강압적 독선적인 분이 아닙니다.

 

대신에 반드시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당신께서 만들어 주십니다. 그 전에 신자에게 그런 소원을 심어주어서 영적 진리를 배우도록 그분께서 모든 여건을 주도하십니다. 성령이 간섭하여서 죄에 민감하게 영성을 바꿔주시고 당신께서 변화 성장시키십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죄에 아주 민감해져서 처음 얼마 동안 죄책감에 더 심하게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자신의 추한 영적 실체에 실망하여 자신이 싫어지고 더 괴로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여러 모로 윤리적 종교적 제약이 많아져 더 고달프고 불편해집니다. 나아가 예수를 믿었는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직도 내 모습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어서 자괴감마저 듭니다.

 

그러나 괴로워 할 일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 믿지 않을 때는 전혀 그런 각성이 없었지 않습니까? 세상의 형통과 출세만을 목표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당연하고 잘 하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예수 믿기 전에는 검정 옷을 입고서, 모두가 검정 옷을 입은 채, 빛도 없이 어두컴컴한 곳에 함께 모여 살았던 것입니다. 옷에 얼룩이나 먼지가 묻어도 미처 알지 못했고 간혹 눈에 띄어도 다른 사람들은 얼룩이 더 크고 더러운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냅니다. 모두가 그런 것을 예사로 여기니까 자기도 아무 죄책감 없이 어둠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믿으면서 완전히 흰 옷으로 바꿔 입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하나님이 이미 의인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모두가 흰 옷을 입고 있는 너무나 환하게 밝은 빛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아주 작은 얼룩만 튀어도 금방 표가 나고 너무 더러워보여서 괴로워집니다.

 

그러나 괴로워지는 그때가 가장 빠른 때로 옷을 빨아 입으면 다시 새하얗게 깨끗해집니다. 항상 흰 옷을 입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작은 티끌만 묻어도 매번 털어내고 빨아 입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전의 검정 옷은 다시는 입지 않을 뿐 아니라 쳐다보기도 싫어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게으른 본성을 지녔습니다. 신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혹시 회개에 게으르게 되면 신자에게 내주하신 성령님이 미세한 음성으로 그 잘못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 음성을 계속 듣지 못하면 반드시 영적인 눌림이 생깁니다. 뭔가 까닭 모르게 마음이 편치 않고 기쁨이 상실 됩니다.

 

계속 그 상태로 있거나 추가로 잘못을 범하면 성령님께서 빌 바를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주십니다.(롬8:26) 그래서 알지 못하지만 영적인 눌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 때는 비로소, 본문의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을 제정하신 뜻에 비추어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가 차면 비로소 징계를 하십니다.(히12:8) 당신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속담에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계모가 와선 전처의 자식이 미우니까 먹고 마실 것을 실컷 주고 편하게 잠만 자게 해서 공부를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데리고 온 자기 친 자식은 먹을 것은 절제 시키고 회초리를 때려가며 공부를 열심히 시켜서 출세시킨다는 것을 풍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없으면 그분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세상의 악인이 형통해서 잘 살아도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두십니다. 또 그들은 오직 세상에서 출세 형통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기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만 끌어 모으기에 당연히 부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신자가 불신자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것 하나도 부러워 할 것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신자를 대신해서 간구해주시고 또 천국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주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여 역사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하나님 바로 그분이 우리가 잘 되라고 친히 회초리를 들고 우리를 징계하시니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날마다 깨어지는 목사

 

신자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은 또 다른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신자가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나 여건까지 미리 다 막아주십니다. 흑암의 세력이 절대 틈타지 못하도록 평생을 두고 신자의 전후좌우를 두르고 동행해 주십니다. 신자를 죄에 넘어뜨리려 왔던 사탄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목사로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가 처음 믿었을 때부터, 목사가 될 것은 꿈도 꾸지 않았음에도 성령님은 더럽고 추한 세상과 멀어지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구태여 간증하지 않겠지만 실제로 많이 체험했습니다. 이 또한 예수 믿고 바뀐 것 중의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제 이야기를 덧붙여서 죄송하지만 예수 믿고 나서 현실의 문제와 고난을 해결 받은 것은 처음 얼마간뿐이었습니다. 그보다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미세한 음성을 들으며 제 자신이 깨어지고 또 깨어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깨어지고 있고 날이 갈수록 더욱 많이 깨어지며 죽을 때까지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고 명백한 잘못이나 죄로 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로 인해서 남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 많이 힘들어 했을 것 같은 사람과 사건들이 일일이 세밀하게 깨우쳐 주십니다. 저에게 아직도 이런 추하고 치사하고 비겁한 면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 있는지 깨닫고 놀랩니다. 만약에 이런 제 속의 추한 모습을 고치기는커녕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죽었다면 얼마나 비참했을까 두렵기까지 합니다.

 

큰일에는 별 문제없으나 아주 사소한 일에서 더 잘 넘어지는 제 자신을 제가 매번 봅니다. 단순히 윤리적 각성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 삶의 지혜나 이 세태에 대한 영적 분별력도 주님이 심어주십니다. 무슨 일이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으로 해석이 되고 십자가로 적용 실천할 수 있으며 그 열매도 십자가로 맺게 해주십니다.

 

교만하게 듣지는 마시고 정말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는 모두가 배설물이자 그 어떤 의미와 가치가 없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난 것이 아니라 저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또 그 역사가 정말로 오묘하고 풍성하고 광범위함을 절감합니다. 이제 갓 믿은 신자는 물론 불신자나 어린이에게서도 십자가 복음을 더 깊이 풍성하게 발견하게 해줍니다. 모든 사람, 모든 사건, 모든 여건에서 내가 부족해서 반드시 배우고 고쳐야 할 것들을 알게 해줍니다.

 

그 모든 일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주관하는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각성과 은혜가 내 실력이나 이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전혀 생각해보거나 알지도 못하던 분야에서 지혜를 주시거나 저를 반성 회개케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자신의 의지력이나 인내심을 키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평생토록 성령의 미세한 음성을 가능한 많이 들으려는 씨름입니다. 초자연적으로 신비한 체험을 하거나 직통계시를 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범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분명한 인도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면 반드시 나에게만 주는 그분의 명백한 메시지가 따로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아니라 육하원칙에 따라 내모든 추한 것을 구체적으로 회개했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메시지도 나의 언어로 육하원칙에 따른 정학한 문장으로 전환하여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섬길 때에 더 강력히 나타납니다. 성도의 교제가 단순히 고통을 나눠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 믿음이 연약하고 여전히 수시로 죄에 넘어질지라도 성도 각자에게 성령이 내주해 있습니다. 모두가 신령한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신자의 모임은 그래서 성령 공동체입니다. 성령님이 각 신자의 영에게 직접 역사합니다. 하늘에서 주는 놀라운 위로와 평강과 은혜가 넘치도록 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주시고 그 모임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맺힙니다. 단 각 신자가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그 영이 깨끗하고 순전해져 있다면 말입니다

 

제가 날이 갈수록 깨어지고 있다고 해서 인성과 성품과 태도가 겸손해진 차원만이 아닙니다. 너무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제가 너무나 무익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철두철미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주님이 맡기신 목사로서 사명을 다하고자 하나님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제가 받은 그대로 순전하게 전하겠다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럼 정말로 주시는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고 실제로 살아 역사하는 것을 체험적으로 느낍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쁨이 넘치고 그 자리에서 주님 앞에 저절로 완전히 항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행하라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고난과 문제에서 구출만 해주려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죄에서 구원해 천국 영생만 주려고 피 흘리신 것도 아닙니다. 신자를 궁극적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시키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이 왜 아무 말씀을 않고 묵묵히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첫째로 인간은 말로 해선 알아먹고 고칠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말 대신에 당신의 행동과 사역과 삶을 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당신을 닮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자에게 당신의 영인 성령을 내주케 하신 것입니다. 모든 신자더러 당신을 닮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를 닮은 신자들끼리 예수 공동체를 이 땅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광채로 빛나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끼리 힘을 합쳐 빛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어떤 공동체에서나 단 한 명의 신자라도 예수 닮은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교회는 물론 직장 가정에서 누구라도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가정에선 아버지이자 남편이 그래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남편 더러 주님처럼 모두를 사랑하라고 명했고 다른 모든 가족은 순복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대속죄일에 아사셀 염소를 사탄에 돌려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절벽에서 떨어트려 죽였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하는 제물로 죽으심으로 해서 더 이상 우리에겐 정죄함이 없습니다. 또 죄에게 당당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주일 예배가 단지 지난주에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에 대한 속죄제로 그쳐선 안 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도 정말로 인간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반드시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모습을 실제로 실현해보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당신만의 신적인 능력으로 일으키신 기적은 우리로선 닮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신적인 성품에는 얼마든지 참여하여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함께 하는 성령의 권능으로 그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성령님에게 마음 문을 열고 그분의 인도에 따르십시오. 미세한 그분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를 활짝 여십시오. 그분의 권능을 결코 제한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을 향해 신자가 얼마나 많이 마음을 여느냐에 따라 그분의 권능도 더 많이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주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그 사실만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주는 모든 신자는 범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주님과 똑같은 완성된 자리까지는 어느 누구도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을 우리를 통해 우리 주변에 비출 수는 있습니다. 특별히 종교적 행위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예수 믿는 자라고 다른 이가 알아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이 믿는 그 예수를 나도 믿고 싶다는 관심과 호기심을 드러낼 정도까지는 충분히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반드시 알아주길 원하는 한 가지는 당신께서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뿐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꼭 행하길 원하는 것도 하나뿐으로 당신께서 거룩하니 신자도 거룩해져서 주님을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대속죄일에 바쳐진 두 염소의 뜻이 바로 이 둘입니다.

 

9/30/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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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주님이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질문한 뜻은? master 2023-11-28 8
26 저만의 부끄러운 비밀로 너무 괴롭습니다. master 2021-01-07 79
25 (겔3:5,6) 모국어가 더 어려운 이스라엘 master 2020-10-10 22
» 대속죄일의 아사셀 염소의 의미 master 2018-10-06 554
23 무의식적으로 지은 죄에 관해? master 2018-09-18 73
22 해가 서쪽에서 뜬 체험이 있는가? master 2018-01-27 35
21 신자가 누릴 두 종류의 평안 master 2017-12-03 55
20 슥 1:1-6 회개의 시한(時限)이 정해져 있다. master 2017-12-01 70
19 구원 후에도 왜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하는가? 운영자 2012-07-16 619
18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운영자 2011-04-17 428
17 매일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는 신자들 운영자 2011-03-25 472
16 죄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라. 운영자 2010-08-18 596
15 회개기도란 무엇인가요? [1] 운영자 2010-01-05 8478
14 신자가 범한 죄를 어떻게 씻는가요? 운영자 2009-12-22 1607
13 왜 죄 없는 자가 죽어야 하는가? 운영자 2009-11-07 709
12 더 많은 죄가 구원의 조건이다. 운영자 2009-11-07 743
11 기술도박과 사기도박 운영자 2009-11-07 972
10 합의하여 이뤄지는 죄의 용서 운영자 2009-11-07 626
9 참 회개만 해도 염려는 사라진다. 운영자 2009-11-07 749
8 아직도 고아원에 살고 있는 신자들 운영자 2009-11-07 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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