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함에 응했는가? 택함을 입었는가?
마태복음 강해(204)



http://youtu.be/1rrTPesSP7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가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To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 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14)


왕자의 혼인잔치의 의미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한 사건으로 인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시비를 걸어왔다. 예수님은 천국 구원에 관한 세 비유로 답을 했는데 본문은 마지막 세 번째로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관한 비유다. 이 비유는 두 가지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2-7절) 사건은 왕이 종들을 보내 잔치에 초청했으나 오기를 싫어했기에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어 초청했다. 당시 먼저 초청장을 보낸 후에 잔치 당일에 종을 보내 직접 모셔오게 하는 관습에 빗댄 것이다. 그런데도 각자 자기 바쁜 볼일을 보러 가버렸고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죽였다. 왕이 잔치를 배설하고 격식을 차려 초청했는데도 말도 안 되는 짓을 자행한 것이다.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라면 왕에겐 가장 기쁜 날이다. 왕자가 결혼한다는 것은 왕국을 물려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얼마 후에는 왕자가 왕국을 물려받는 대관식도 열릴 것이다. 그런 잔치에 초대되었다는 것은 새 왕을 도와 왕국을 통치하는데 중요한 임무를 맡을 자들이다. 새로 왕이 될 자와 미리 인사 교제하라는 뜻인데도 거부했다. 왕이 군대를 보내 진멸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많은 선지자들을, 마지막에는 침례 요한을 보내어 메시아를 예비하라고 선포케 했다. 이 땅에 천국이 곧 도래할 테니 회개하여 천국을 침노하여 차지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기에 왕이 군대를 보내 심판했다. 그 군대는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러 보낸 이방의 앗수르나 바벨론을 뜻한다.

둘째(8-13절) 사건은 초청에 응하지 않은 자들을 왕이 멸한 뒤에 다시 종들더러 만나는 대로 데리고 오라고 했더니 잔치에 손이 가득했다. 손님을 보러 임금이 나온다고 했다.(11절) 당시에는 초청자가 연회장 입구에서 기다리거나 잔치에 미리 배석해 있지 않았다. 손님들이 먼저 가벼운 음료와 음식을 먹고 있으면 나중에 주인이 나왔다고 한다.

왕이 그 손님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하고 잔치 자리에서 쫓아내버렸다. 천국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끝까지 완악하게 거부하자 구원을 이방인들에게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 못 받을 자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나는 대로 심지어 악한 자(10절)마저 데리고 왔는데 단지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아내었으니 조금 심한 것 아닌가? 당시에는 주인이 잔치에 참석하는 자가 입을 예복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 지금 닥치는 대로 데려왔으니 집에 가서 예복으로 갈아입을 시간 여유도 없었고 왕의 잔치이므로 그 격식에 맞는 예복은 얼마든지 준비되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왕이 준 예복이 귀찮고 싫었다는 뜻이다. 공짜로 잔치를 베풀었다. 소와 살진 짐승(4절) 즉, 최고의 정성으로 준비된 잔치였다. 그는 기본적 예의도 없었다. 잔치가 싫은 것이 아니라 바로 주인이 전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잔치 참석자 중에 쫓겨 나갔으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 중에 구원을 받지 못할 자가 있다는 뜻이다.

이상한 결론(?)            

그런데 비유의 결론인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14절)는 말씀의 의미가 조금 석연치 않다. 하나님께 구원 받는 자가 구원 받지 못한 자보다 훨씬 적으며, 또 교인들 중에도 Born-again 한 Real Christian이 소수라는 점은 어지간한 신자라면 다 알고 있다. 이 결론도 분명히 그 사실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이 원리를 비유의 내용에 대입하면 뭔가 모순이 생긴다.  

우선 둘째 사건에서 잔치의 손님이 가득한데 쫓겨난 자는 단 한명이지 않는가? 그래서 혹자는 쫓겨나간 자는 가룟 유다이고 잔치에 남은 손님은 열한 명의 제자라고 해석한다. 그래도 여전히 택함을 받은 자가 더 적다는 결론과는 상충된다.

비유를 해석할 때에 단어, 숫자, 구절 하나하나에 다 의미를 부여하다보면 사공이 많은 배가 산에 오르는 형국으로 엉뚱한 해석이 도출된다. 강조하려는 주제 하나만 붙들고 그에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

주님은 지금 주인이 주는 예복을 입지 않았기에 쫓겨나갔다는 구원 받지 못한 이유를 강조하고 있다. 한 명만 구원 받지 못했다는 숫자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난 교회사를 보나 현재 주위를 살피나 불신자가 신자에 비해 항상 숫자가 많은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않는가?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몸만 잔치에 나온 것이지 마음은 딴 곳에 있다는 증거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왕의 아들의 잔치를 비유의 주제로 삼았다. 이 토론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의 권세를 시비를 건 것 때문에 발단되었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당신이 바로 왕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셈이다.  

또 혼인잔치를 벌린다는 것은 이 땅을 통치할 왕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제사장과 장로들더러 지금 너희가 아무리 성전 제사를 경건히 드리고 율법을 성실히 준수해도 그 마음의 중심에 여호와가 없으며 그 보내신 아들인 당신을 메시아로 믿지 않으면 구원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정작 이상한 점은?

비유의 결론에서 정작 따져볼 사항은 따로 있다.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청함을 받은 자는 구원 밖에 있는 유대인들이다. 택함을 입은 자는 예수님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헐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나중에 참여시킨 이방인들이다. 그럼 구원 받은 이방인의 숫자가 그렇지 못한 유대인들보다 훨씬 많지 않는가?

그렇다고 이 14절마저 숫자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해선 안 된다. 잔치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명의 경우는 비유 안에 있는 내용이다. 비유를 해석하는 원칙에 따라 핵심 되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기에 숫자에 의미가 없다. 그러나 본문은 예수님이 비유 전체(2-13절)를 해석하여 말씀하신 결론이다. 그 말씀대로 택함을 입은 자가 더 적다는 것은 영원하고도 절대적 진리다.  

거기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택함을 입었다고 자부했었다. 본문의 첫째 사건에서도 왕이 초청한 자들이 누구인가? 평소에 왕이 잘 알고 있고 중책을 맡기려고 작정한 자들이다. 왕자의 결혼식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자들만 골라서 초청장을 보낸 것이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의 우상을 숭배하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었다. 그 후손인 유대인들을 하늘의 뭇별처럼 번창하게 해주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했다. 실제로 그 후손을 세상의 어떤 민족도 겪지도, 아니 알지도 못하는 기적적인 은혜로 보호하고 인도했다.  

반면에 본 비유의 둘째 사건에선 악하든 선하든 아무나 데리고 오라고 했다. 사전에 선별해서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결론(14절)을 왕의 택함을 입은 유대인들은 적은 이도 구원을 받지 못했고, 왕의 청함을 받은 이방인들은 많은 이가 구원을 받았다고 설명해주어야 논리적으로 비유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님의 결론대로 택함 받은 소수만 구원 받는 것이 진리다. 반면에 비유에선 분명히 택함을 받은 이는 유대인인데 이 결론과 어떻게 관련지어서 해석해야하는지가 과제로 남는다. 예수님이 틀린 말씀을 하실 리는 없지 않는가?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려고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과정 중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정한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 선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열방들 앞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그분을 따르는 백성답게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할을 맡기려 선택했다는 자체로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선택의 목적이 역할을 맡기는 것이라면 구원 목적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무엇보다 한 민족 전체로 이뤄지는 법은 없다. 항상 개인적으로만 이뤄진다. 이 비유의 의미를 해석한 결론인 14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집합적 의미를 지닌 두 그룹으로 단순 대입하면 안 된다. 이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하나님 구원의 절대적 진리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함에 당신과 당신의 뜻을 분명 유대인을 먼저 선택하여 계시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그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의 모든 이방에까지 전파되도록 작정하셨다.

따라서 본 비유의 첫 사건은 예수님 오시기 전의 인간, 특별히 이스라엘의 상황을 뜻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할 소명을 실현하는데 실패했다. 오직 자기들의 안위와 형통에만 관심을 쏟았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이 땅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만 추구했다.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은 완전히 실종되었다.

둘째 사건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천국복음이 악한 자이든 선한 자이든 즉,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아무 차별 없이 전해졌음을 뜻한다. 인간의 개인적 자격 능력 성품 조건 등과는 무관하게 구원으로 초대되었다. 그래서 인간들이 그 초대에 응해 교회로 나오지만 그것은 구원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구원이 실제로 완성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예복을 하나님이 입혀주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구원으로 태초부터 작정한 소수의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예정구원의 교리를 설명한 것이다. 그것도 교회에 출석한 교인을 상대로 해서 말이다. 잔치에 나오지 않은 자들은 비유의 첫째 사건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보내신 군대에 의해 진멸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자 된 것이 이 결론에 비추어 어느 쪽인지 점검해 봐야 한다. 예수님의 초대에 내가 응해서 잔치에 나온 것은 분명하다. 과연 하나님의 예복을 하나님 당신께서 나에게 입혀주셨다는 확신, 아니 체험이 있는가? 없는가? 혹시라도 그런 구원의 원리나, 예복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은 아닌가?  

무엇보다 하나님의 예복을 입었다는 뜻부터 확실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가 완전히 누더기 같아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로 덧입혀선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을 의롭다고 칭해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정답이다. 그러나 교리적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지 그 사실이 자신에게 이미 일어났음을 절감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도 실제로 그 예복을 입고서 살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예복을 입고 있다는 구체적인 의미를 알아서 실천하고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남들이 내가 하나님의 예복을 입고 있음을 보고 알 수 있어야 한다.

본 비유의 진짜 뜻은?

비유에서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한마디로 너희는 청함만 받았지 택함은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에겐 엄청나게 심각한 의미다. 유대인만의 독특한 정체성은 자기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긍심이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하루에 세 번씩 감사 기도하는데 첫째가 바로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것에 감사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었고 그 손자 야곱을 통해 열두 지파로 번성케 했다.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어 시내 산에서 거룩한 율법을 수여하면서 제사장 나라로 세웠고 약속의 땅을 선물로 주었다. 모든 유대인들의 피 안에 있는 가장 핵심적인 DNA이자, 유대인을 유대인답게 만드는 첫 번째 자존심은 바로 선민의식(Zionism)이다.

예수님은 지금 그것을 여지없이 부숴버렸다. 앞의 두 비유에서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지 않은 첫째 아들임을, 또 포도원을 통째로 삼키려고 주인의 아들을 죽인 진멸당해 마땅한 악한 농부라고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자기들이 정답을 맞혔듯이 아마도 그들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은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진 윤리적 종교적 차원의 죄다.      

주님은 이 세 번째 비유에선 그들더러 정답을 맞춰보라고 질문하지 않았다. 질문했어도 그들이 두 번 속지 세 번째는 안 넘어간다고 다짐하고는 대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아예 비유와 해석을 이어서 말씀하셨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그들의 도덕적 종교적 죄악을 야단치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너희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들의 인간으로서 정체성마저 완전히 부인했다. 최대한 양보해도 그들이 세상에서 최고로 귀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하루에도 세 번씩 감사 기도하는데 그중에서도 첫째 기도이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쓸모없는 헛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여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그 선택 자체가 헛것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미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악은커녕 모순과 부족과 허점도 있을 수는 없다. 당신께서 하신 일에 대해 스스로 자책할 일은 아예 없다.

하나님이 그들을 택한 이유는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기”(신7:7) 때문이었다. 그들을 택함에 이스라엘 쪽의 어떤 근거, 이유, 조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않고는 생존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기 때문이었다. 그들로 하나님이 입혀주는 그분의 예복만 입고 살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점차 그 선택받았음을 자기 자랑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잘나서, 최소한도 예뻐서 하나님이 택한 것으로 여겼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권세를 자기들이 독차지해서 사람들에게 휘둘렀다. 지금 하나님 당신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감히 대제사장의 허락도 없이 성전에서 가르쳤다고 야단치고 있다. 하나님더러 무슨 일을 하던 자기들에게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지극히 완악하고 불경한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고, 최악의 죄다.

내가 신자가 된 연유는?  

예수님의 구원 초청에 내가 응했지만 하나님의 예복을 그분이 입혀주지 않았다면 내 속에 그분의 십자가 은혜가 없다는 뜻이다. 이신칭의의 교리를 사실상 믿지 않는 것이다. 신자란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것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와 중요성이 완전히 뒤바뀐 자다. 자신의 이전의 정체성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함으로써 철두철미 깨어지고 완전한 새것으로 대체되는 체험을 한 자다.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새 예복으로 분명히 갈아입어야 한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어져 이 땅을 당신 대신에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귀한 직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렇게 놀라운 진리와 은혜에 대해 전혀 감사치 않고 관심조차 없이 이 땅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고만 했다. 그 수단과 방법에 악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안한 경건한 철학, 사상, 도덕, 종교도 포함되지만 그것들을 동원해서도 여전히 내 소견에 좋은 대로만 행했다. 그런 지난 삶이 전도서 기자의 한탄처럼 헛되고 헛되었다는 자백은 물론 바울처럼 한갓 배설물에 불과했다는 실토가 저절로 나와야 한다.

하나님의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서 자기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확실하게 정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 그분만을 소망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사랑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정밀하고 오묘한 인도와 간섭을 실제로 체험하며 살기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그 은혜가 너무 귀해서 혼자만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소개하고 나눠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생의 해답을 찾은 자의 삶이다. 답을 찾았기에 살아가는 방식이 이전과 360도 달라지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정체성도 새로운 피조물임을 아는 것이다. 내 피 안에 가장 중요한 DNA가 이전의 인간적 자존심, 특별히 남보다 단 0.1 밀리미터라도 앞서려는 욕심은 다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대체된 것이다.

그렇게 바뀔 수 있는 계기가 절대로 내 능력은 물론 계획, 의도, 시도가 아니었고 심지어 꿈조차 꾸지 않았다. 도리어 정반대로 하나님을 비방 거부하기만 했었는데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으로 성령이 역사하여 이 자리에까지 이른 것이다. 내가 내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이라고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이유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구원의 은혜를 주신 까닭도 이스라엘을 택하심과 똑같다. 세상 인간 중에 가장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라는 것이다. 또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일방적으로 택한 것이 나를 편애함도 아니요, 택하지 않은 자들을 독선적으로 미워함도 아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하나님 앞에서 죽을 마땅한 죄인임에는 하나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나를 택한 목적은 다른 이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살리려는 것이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하게 주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 세상 땅 끝까지 보내시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혹시라도 본문의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처럼 하나님께 면허증을 보자고 하는 것은 아닌가? 이 기도가 왜 이리 응답이 안 되는지 혹시 능력이 모자란 것 아닌가 의심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면 교회 출석하지 않고 하나님과도 등 돌리겠다는 불평하지 않는가? 또 하나님더러 사전에 나의 허락부터 받으라고 요구하지는 않는가? 이런 저런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어야 한다고 미리 엄포를 놓지 않는가 말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예복을 입었다는 증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강도와 열심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누구나 하나님 예복을 입은 것을 보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분의 옷을 입고 있으면 하나님이 당연히 이웃을 더 사랑하라고 채워주신다. 그분에게 미리 엄포를 놓거나 라이센스를 보여 달라고 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의 청함에 내가 응하는 것만으로도 교회 안에선 얼마든지 충성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입지 않고는 교회 안이나 밖에서 동일하게 행할 수 없다. 신자가 자신의 신자된 정체성을 날마다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청함에 내가 응했는지, 하나님의 예복을 그분이 입혀주셨는지 여부다. 현실적으로는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즉, 남이 내가 하나님 예복을 입고 있는지 보아 알게 하는 것뿐이다.

1/26/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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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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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무덤을 밟고 지나가는 이성적인 믿음 (민수기강해#15-민14:4-10) [1]

(민14:4-10) 예수님의 무덤을 밟고 지나가는 이성적인 믿음 구약성경강해(25) / 민수기강해(15) - 가데스 바네야의 불순종(5)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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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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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눅15:14-19)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둘째 아들 돌아온 탕자 시리즈 (5)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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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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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7,10,32) 그런데도 아직인가? 그러나 이제는인가?

(눅15:7,10,32) 그런데도 아직인가? 그러나 이제는인가? 돌아온 탕자 시리즈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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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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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4:8-12) 내년에도 지금까지처럼 똑같이 살아라.

(요14:8-12) 내년에도 지금까지처럼 똑같이 살아라. 2021 송구영신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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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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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0:1-7&17,18)생명을 살리는 선지자로 기도하라-기도시리즈(8) [1]

(창20:1-7 & 17,18) 생명을 살리는 선지자로 기도하라. 기도 시리즈 (8)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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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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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1]

(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룻기 강해 (8)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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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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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1]

(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4)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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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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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하나님이 세우신다.(출애굽기강해#3-출1:15-22)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하나님이 세우신다. 출애굽기 강해 (3)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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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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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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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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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1]

(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5-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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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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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8:23-26)주기도문의 구약성경버전-기도시리즈(7)

(창18:23-26) 주기도문의 구약성경 버전 기도시리즈 (7)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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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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