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기적들이 황당무계해 믿지 못하겠습니다.

 

[질문]

 

인간인 애굽의 주술사가 기적을 행했다는 성경기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들어갔다 살아나온 일도 믿지 못하겠으며, 하나님도 떡을 5천개나 그냥 만들어내었다니 너무 허무맹랑해서 믿어지지 않습니다.

 

[답변]

 

애굽 주술사의 기적(?)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된지라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출7:10,11)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는 것 즉, 무생물에 생명을 주입하고 특정 종류의 동물로 만드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술사들이 “그(자기들의) 술법으로” 뱀을 자기 품속에 숨겼다가 지팡이를 던지는 척하며 뱀을 던진 것입니다. 오늘날의 마술사들처럼 눈속임일 뿐입니다.

 

“아론이 팔을 애굽 물들 위에 펴매 개구리가 올라와서 애굽 땅에 덮이니 술객들도 자기 술법대로 이와 같이 행하여 개구리로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였더라.”(출8:6,7)

 

아론이 지팡이를 잡은 팔을 애굽 물들 위에 펴니까 개구리가 올라왔습니다. 단순히 명령만 했어도 개구리가 땅으로 올라왔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애굽 술객들은 첫째와 마찬가지로 “자기 술법대로” 이와 같이 행했다고 합니다. 단순히 팔만 편 것이 아니라 팔을 펴면서 독한 약물을 강에 뿌렸음을 의미하고 그러니 개구리가 견디지 못하고 뭍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이 또한 너무나 유치한 속임수입니다.

 

“그들이 그대로 행할 새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어 땅의 티끌을 치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생축에게 오르니 술객들이 자기 술법으로 이같이 행하여 이를 내려 하였으나 못하였고 이는 사람과 생축에게 있은지라.”(출8:17,18)

 

애굽 술객들도 처음 두 번은 비슷하게 흉내 내었지만 눈속임에 불과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이 세 번째 기적은 도무지 따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술법이 통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성경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아론은 티끌을 이가 되게, 그것도 애굽 전 지역에서 생기게. 했습니다. 첫 번째 기적처럼 무생물을 생물로 바꾼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첫째 기적에선 술사들이 자기들 품에 숨긴 뱀 한 마리를 지팡이인양 던져서 속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같은 피조물인 인간 주제에 티끌(무생물)을 이(생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바꿀 수 없습니다.

 

나아가 성경은 “이는 사람과 생축에게 있는지라”고 말합니다. 이는 너무 작아서 사람 눈에 보이지 않고 사람과 짐승의 몸에 들어붙어 있습니다. 자기 몸에서 잡아낼 수도 없고 그래봐야 한 마리입니다. 사람들과 짐승에게서 일일이 찾아내어 땅에 티끌처럼 쏟아지게는 더더욱 할 수 없습니다. 이 셋째 기적부터 아예 애굽 술사들은 흉내를 낼 엄두도 못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들도 곧바로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19절)라고 바로에게 고했습니다. 그전 까지 자기들이 행한 것은 마술(magic show)이었던 반면에 모세와 아론이 행한 것은 하나님의 기적(God’s Miracle)이라고 술사들이 인정 고백한 것입니다. 성경을 천천히 앞뒤로 잘 살펴보면 참으로 정미하고 완전한 기록임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극렬한 풀무 불에서 생환하는 기적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

 

세상 사람들은 신자들을 두고 성경에 기록된 허무맹랑한 기적들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너무 어리석다고 비하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구약시대에도 그런 맹목적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상기 본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당시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였습니다. 그에게 대적할 나라와 인간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이룬 엄청난 업적을 기념하고 왕국의 영원한 발전을 기원하는 뜻으로 금 신상을 세워서 누구나 그 앞에 절하며 경배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에서 포로로 잡혀온 세 사람은 끝내 절하기를 거부해서 극렬한 풀무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왕은 너무나 교만하게도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고 큰소리쳤습니다. 너희들의 신 여호와에게 아무리 간구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능히 건져내실 분이다. 그리하지 않더라도 절대로 금 신상에는 절하기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그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지만 혹시라도 우리들이 그분에게 지은 죄가 있거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분만의 뜻이 따로 있다면 우리를 불에 태워서 죽일 수도 있는 분이다. 그래서 만약 여호와가 우릴 건져주지 않더라도 그분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며 죽을 것이지만 실존조차 않고 인간의 손으로 빚어 만든 너희 우상에게는 절대로 경배할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오직 창조주 여호와 참 하나님만 믿고 따르겠지만 기적을 베풀어주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적과 상관없이 그분만이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기에 우리 형편이 어떻게 되던 믿음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분이 열방에 당신을 증거할 제사장나라로 세우려고 우리 선조를 따로 불러내었는데 우리도 지금 비록 포로로 잡혀 와있지만 우리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그분께서 반드시 들어낼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그들 셋을 살려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며 그전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게 해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죄로 떨어지자 자기들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라 믿었던 바로 그 우상나라를 통해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으로선 이 신실한 믿음의 세 사람을 통해 이제는 바벨론에게 당신의 권능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특별히 느부갓네살 왕의 “나를 대적할 인간은 물론 신도 없다”는 그 엄청난 교만을 꺾어주어야만 했습니다. 당연히 그 극렬한 불 속에서도 세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게 지켜주셨습니다.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단1:6,7) 상기의 세 사람은 포로로 잡혀 와서 바벨론 식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또 그 이름으로 이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 시기에 만약 한국 사람이 일본 이름으로 개명했다면 그 과거 행적이 부끄러워서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적국에서 큰 공을 세워도 개명한 사실은 끝까지 숨기거나 일본식 이름 자체는 구태여 밝히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성경이 바벨론식 이름 그대로 기록한 것은 상기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그 영향력이 엄청나서 바벨론에서도 다 아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이 사건의 역사성과 진실성을 성경은 정미하고도 진실 된 기록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14:17-21)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당시에 한 사람이 한 끼의 식사로 먹는 양, 남자 어른들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차도록 남겼습니다. 여자와 남녀 아이들까지 합치면 약 2만 명입니다. 너무 황당한 기록 같습니다. 황당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지어낸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일생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복음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푸신 수많은 기적들 중에 네 저자가 다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오병이어 기적 하나뿐입니다. 다른 기적들은 주로 개인적으로 혹은 적은 무리 앞에서 이뤄져서 저자들이 그 모두를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또 복음서를 저작한 순서가 달라 다른 복음서가 먼저 기록한 내용은 생략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각 저자들이 느낀 감동이나 의미가 기적마다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만 네 저자가 빠트리지 않고 기록했다는 것은 그만큼 감동이 컸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그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체험한 기적을 예수님의 일대기에서 빠트릴 수는 도무지 없습니다. 그 수많은 증인들이 나중에 복음서를 읽고 잘못되었다고 항의할 것입니다. 참고로 복음서들은 그들 세대가 살아있을 때에 저작되어서 이미 교회마다 회람되고 있었습니다.

 

이 오병이어 기적을 복음서가 기록하지 않는 것은 비유하자면 어떤 대통령의 전기를 기록하면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누락하는 꼴입니다. 실제로 이 기적을 체험한 유대인들이 그 엄청난 은혜와 권능에 감격해서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6:14,15)

 

유대인들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표현한 것은 자기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백성들의 그런 소망을 저버린 셈인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전까지의 모든 기적은 개인적으로 이뤄졌으나 이번만은 2만 명 모두가 기적의 은혜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단체로 기적을 베풀 능력이 있다면 자기들 나라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로, 다른 말로 왕으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사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서 죄에서 구원해주러 온 메시아였습니다. 현실적으로 안락과 풍요를 주러 온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대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인류 역사상 가장 의로운 일을 많이 행하신 의인이자, 신적 권능으로 수많은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남자 성인 5천명의 증인이 번듯이 살아있는데 거짓을 지어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기적만큼 사실성이 가장 보장되는 기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분에게 그런 정도의 기적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당시는 한두 끼 굶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설교를 듣느라 밥도 먹지 못한 것을 불쌍히 여겨서 간단하게 행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기적을 보는 신자의 태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성경은 이 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태초가 언제인지 하나님이 어디에서 어떤 상태로 존재하며 어떤 분인지 등에 대해선 아무런 사전 설명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창조의 순서와 과정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긴 하나 아주 생략되고 상징으로 표현한 문학적 진술이지 데이터나 실험으로 입증한 과학논문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은 창세기 1:1을 온전히 믿어야만 다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무에서 이 우주를 창조하시는 분이 이 땅의 인간들도 무에서 창조하시고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인류 역사에 개입해서 이끌고 계시며 결국에는 당신의 뜻대로 완성시킨다는 내용에 관한 계시입니다. 인간 선각자가 각성하여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선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종교적 계명을 편집한 책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이해와 접근을 다르게 합니다. 성경은 창세기1:1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그래서 그 이후에 기록된 기적들도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이 너무나 손쉽게 이뤘음을 믿는 자들만을 위한 책입니다. 기록된 기적들이 인간의 상식으로 따져서 황당무계하게 여겨지니 성경은 물론 그 하나님도 못 믿겠다고 여기는 것은 그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평생을 읽어도 성경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지성이나 도덕성에서 모자란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의 첫 마디는 하나님이 인간을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는 물질계 안에서 찰나 같은 인생을 살다 죽는 피조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피조물이 하나님이 행한 일이 이해가 안 되니 못 믿겠다는 것은 모순 중에 너무나 큰 모순이며, 궤변 중에 궤변이 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20) 이 말씀이 그런 이들에게 적용될 것입니다.

 

성경의 기적에 대해서 논할 수 있으려면, 그것도 그 진실성과 역사성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그 의미를, 성경을 온전히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기적에 대한 의미는 기적을 베푸신 자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분을 믿지 않는 자가 기적의 의미는 물론이고 그 진실성과 역사성을 따질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말 속담에 비유하면 완전히 자다가 남의 집 봉창을 두드리는 격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상기에 열거한 세 가지 기적들은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살펴본 대로 성경에 기록된 설명만으로도 그 진실성, 역사성은 보장되고 인간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도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일차적인 뜻이, 애굽 사람들을 혼내려고, 당신을 믿는 세 사람을 풀무 불에서 건지려고, 배가 고픈 유대인들을 먹이려는 차원이 아닙니다. 셋 다 애굽, 바벨론, 유다 사람들 앞에 당신의 당신 되심을, 살아 역사하는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주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래서 기적의 의미를 이렇게 풀어서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두 종류의 인생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진짜 큰 기적은 바로 우리가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그렇게 자기를 이 땅에 존재케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스스로 계획은커녕 기대 추측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명이 있고 하루하루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향유하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 삶에는 고달픈 일들이 수시로 생기고 지금도 여전히 큰 고통 중에 있는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따져서 내가 이 땅에 아예 존재도 하지 않은 편이 더 좋았을까요, 아니면 비록 희로애락을 겪으며 힘들게 살더라도 이 땅에 존재하게 된 편이 좋았을까요? 저는 분명히 후자라고 믿습니다.

 

질문자와 저는 평생을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기에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에 대해, 그분의 기적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는 이것 자체부터 너무나 큰 기적이지 않습니까? 우리 두 사람 다 전혀 계획 예상도 않던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어진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이 또 어디 있습니까?

 

불신자들은 이 땅에 아무 의미 없이 우연히 던져진 잃어버린 존재가 인간이라고 여깁니다. 그럼 그 인생에도 아무리 스스로 의미를 찾아서 재미있게 살아보려 해도 끝까지 허무 갈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연히 던져진 물질이 뛰어봐야 여전히 물질, 크게 잘 봐주어야 짐승에 불과하니까 말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성경의 창조 기사와 그 이후에 기록된 모든 기적을 순전히 믿습니다. 또 하루하루의 삶이 비록 고달파도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 안에 붙들려 있는 너무나 큰 은혜요 기적임을 알기에 감사 찬양하며 그분 뜻에 순응합니다. 이 두 인생 중에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성경을 당연히 그 기록된 기적들 모두를 믿느냐 아니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4/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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