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주위에 몇몇분 육체적인 병으로 인해서 생명이 위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을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다가 멈칫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꼭 살아야 하는가? 라는 의문 때문입니다.
불신자 분의 경우에는 조금이라도 살아계실때에 주님을 전하여 구원의 길을 가기를 바라기에 꼭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의 경우는 위같은 이유가 적용하지 않아서 벙쪗던 것입니다.
제가 불신자로서 처음으로 감동받고 주님을 대적하는 마음이 누그려 졌던 이유중 하나가
제 직계가족중 유일하게 하나님을 믿었던 분의 장례식에서 담임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슬퍼하지 말아라,천국에 가셨으니 슬퍼할 이유가 없다."
죽음이 더 이상 비극이 아니게 되어버림이 제게 큰 감동이었습니다.
이런 가치관까지 버무려 지니까
단순히 주변사람이 슬퍼지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이유도 무색해져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의 생명의 관한 근본적인 신앙관이 잘못된것 같습니다.
조금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것 같아 질문을 드립니다.
죽음을 축하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은 물론 타인의 믿음과 구원에 관하여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녔다는 이유로, 장로나 권사 또는 집사라는 이유로, 신앙을 고백했다는 이유로, 또는 누가 봐도 착하게 살았다는 등등의 이유로 천국을 당연시하는 것은 참으로 가난한 믿음이며 창조주를 멸시하는 오만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육신의 본성, 죄의 법에 매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그 진리를 잊은 자는 신자가 아닙니다.
한시적으로 영벌이 유보된 이 땅에서의 삶은 영생을 찾아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습니다. 죽음은 단지 이별일 뿐이지만 그 이별이 영원할지 혹은 찰나일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천국에서의 재회는 다만 우리의 바램일 뿐입니다.
행복님 원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신자의 죽음은, 설령 사고사라도 낙원으로 가니까 축하해주어야 할 성격인 것은 맞습니다. 실제로 장례식에 흰색이 아닌 분홍꽃으로 장식하고 밝은 찬송을 틀며 유족더러 절대 울지 말고 웃음으로 조문객을 맞으라고 유언하신 분들을 몇 분 보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할 작정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두 다리는 땅에 딛되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벌리며 살아야 하는 유일하게 특이한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가족 친지들에겐 고인과의 육신적 이별은 항상 큰 아쉬움과 슬픔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족에게 고인이 상기와 같은 유언을 공개적으로 남기지 않는 한, 또 설령 그랬다 해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슬픈 감정이 앞서고 강하므로 조문객이 섣불리 축하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의 죽음은 굳이 표현하자면 울면서도 웃어야 하는 이중적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죽음으로 이 땅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낙원으로 가니까 꼭 슬퍼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경우 살아계실 때에 주님을 전해 받아서 구원 받아야 하니까 꼭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복음을 전해야 할 신자도 가능한 꼭 오래 더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빌립보서 1:18-26과 3:10-16을 서로 대조해서 꼭 읽어보십시오.
그분에게 아직 할 일도 많이 남았을 것이고 남아 있는 가족도 그분과 함께 더 오래 사랑하며 살고 싶을 것입니다. 출생과 죽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정에 달렸고 기도를 해도 죽을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니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분의 선하신 뜻 안에서 응답해주길 바라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