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7:1-15) 모든 신자가 정작 배워야 할 믿음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며”(11절) 현대의 성도는 성경의 기록과 시공간적 차이가 크기에 더더욱 “성경을 - 반드시 앞뒤 문맥을 잘 살펴가며” 간절한 마음으로 상고해야 한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강론했다. 세 번이나 부흥집회 했으면 그곳 사람들의 마음도 예수님에 대해 많이 열려있었다는 뜻이며 그래서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에게 복음의 열매가 열렸다. 섣불리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베뢰아 사람들보다 더 완악하다고 판단해선 안 된다. 죄로 타락한 인간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추악한 냄새가 진동할 뿐이다. 오직 십자가 복음만이 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만으로 집회를 끝낼 계획이 없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시기한 유대인들의 방해로 어쩔 수 없이 베뢰아로 사역지를 옮긴 것이다. 거기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선동 방해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13절) 그럼 베뢰아에는 데살로니가보다 유대인들이 훨씬 적었다는 뜻이다.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들이 많아서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나왔고 베뢰아의 적은 숫자의 유대인들이 마침 바울 아니 복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베뢰아에도 교회를 설립하려고 당신의 사랑하는 종으로 택하여 예비해놓은 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정작 주목해야 할 사항 둘이 있다. 먼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저자의 불량한 사람들과 떼를 지어 바울 일행을 박해했다는 것이다. 사도가 전하는 내용이 잘못되었으면 진리로 반박해야 하나 도무지 그럴 수 없었다는 뜻이다. 또 자기들 힘으로 막아야 하나 불량배를 동원했다. 불량배는 돈을 안 주면 움직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바울 일행을 그곳 회당에 출입시키지 않겠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데살로니가 회당의 유대지도자들은 헌금을 많이 하는 귀부인들이 적지 않게 사도를 따름으로써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이 종교지도자들마저도 십자가 복음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돈의 노예가 된다. 정확히 말해 항상 돈을 주인으로 삼고 있기에 십자가 복음을 멀리 한다. 요컨대 회당 지도자들이나 불량배들의 영적 수준이 똑같다. 오늘날 일부 교회분쟁에도 불량배가 돈으로 동원되지 않는가? 주님이 하나님과 돈 둘 중에서, 하나님과 사탄 중에서라고 하지 않고, 네 주인을 분명히 정하라고 명하신 까닭이다.
둘째는 애꿎게도 야손과 그 형제들이 핍박을 받았다는 것이다.(6절) 사도들이 미리 피신해버려 그들이 당해야 할 곤욕을 엉뚱한 사람이 치렀다. 사도들도 같이 돈으로 불량배를 동원해서 회당지도자들에 맞서 조폭들의 전쟁을 일으킬 수는 결코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도 없다. 피신이 하나님의 뜻이며 또 그랬기에 베뢰아에도 복음이 전해졌다.
불량배들이 사도들을 찾으려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사도들이 데살로니가에 3주 머무르는 동안 그의 집에서 숙식했고 또 그가 미리 피신시켰다는 뜻이다. 야손은 처음부터 모든 수고와 피해를 각오했다. 야손은 물론 그 형제들도 “다 가이샤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고”(7절) 담대히 대답하며 기꺼이 보(保-벌금)을 내었다. 그들에겐 정말로 돈이 아니라 “예수가 자신들의 임금”이었다. 예수를 대적한 유대인들은 돈으로 불량배를 동원함으로써 자기들 임금이 돈이라고 스스로 공표한 셈이다.
결국 “이것이 그러한가”하고 성경을 상고해야 할 주제는 자기에게 정말로 돈이 아니라 예수가 왕인지 살펴보는 것이어야 한다. 야손은 답을 얻어 그 답대로 행동했다. 신자라면 야손처럼 살고있어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성경을 상고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9/9/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