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5:1) 부활은 믿지 않고 아는 것

조회 수 1163 추천 수 41 2007.11.07 20: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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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믿지 않고 아는 것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


생물학자 파스퇴르는 죽어가는 딸의 침대 곁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단지 과학적으로 규명된 진리만 알 뿐이다. 그러나 내가 믿기를 원하는바 그저 믿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그것을 믿으려고 한다. 나는 이 아이를 다른 세상에서 만나기를 기대한다.”

이는 과학자인 그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또 해선 안 되는 비과학적인 고백입니다. 쉽게 말해 딸과 천국에서의 재회는 믿어지지 않지만 믿고 싶고 또 (억지로라도) 믿지 않고는 이 사랑하는 딸과의 이별이 너무나 가슴 아파 견디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과학자로서의 논리를 몽땅 버릴 만큼 천국을 믿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나아가 과학적인 자료와 실험으로 입증할 대상과 단지 가슴으로 믿어야 할 대상은 다르다고 인정한 셈입니다. 즉 과학이 다루지 못할 영역이 따로 있다는 것을 당대 최고의 과학자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어떤 방식이든 입증 되는 것은 구태여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 사실(fact)을 지식으로 저장하면 됩니다. 입증 되지 않는 것이라야 믿음(faith)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믿고 싶은 소망을 믿음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만 믿으라는 뜻이 아니라 믿음에는 입증되지 않아도 주저, 당혹, 의심이 개입 되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 믿는다고 하지 않고 “안다”고 말했습니다. 부활이 과학적,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주관에 바탕을 둔 막연한 소망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선례가 있기 때문에 믿는다는 단순한 뜻도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실 십자가 현장에 있지 않았고 부활의 도를 전하는 제자들을 나사렛 이단으로 몰아 핍박하기 바빴던 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자체가 그에게 부활의 믿음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똑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하시어 천국 보좌에 계신 예수님이 신자 개인에게 어떤 형태로든 사랑을 직접 부어준 체험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말하자면 하나님이 신자에게 천국 존재를 알게 하는 경로와 은혜가 각기 다 다르기 때문에 부활이 객관적으로 입증은 안 되지만 신자 본인에게 만은 아는 바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천년 전의 골고다 부활의 진리를 배워 믿어선 파스퇴르처럼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지 자신에게 아는 바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9,12,13)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본 체험이 확실히 있는 자는 그분을 보지는 못했지만 천국의 존재를 믿는 정도가 아니라 알게 됩니다. 또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앎의 정도는 더 깊고 넓어집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을 알고 사귀며 그분의 뜻을 이뤄드리는 신자로선 천국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입니다.

이신론자(理神論者) 프란시스 베이컨은 “사람들은 이미 죽은 상태가 아니라 죽은 순간을 두려워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미국 영화배우 우디 알렌도 “나는 죽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순간을 겪고 싶지 않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로선 죽음 이후는 존재의 멸절(滅絶)로 봅니다. 즉 아무 고통을 못 느끼는 아니 느낄 수도 없는 무(無)의 상태니까 구태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죽는 순간만은 살아있는 동안에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하는 너무나 생소한 체험입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죽기 때문에 당연히 두려워집니다. 죽는 순간에만 고통이 없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안락하게 죽을 수 있을지 연구하고 실행합니다. 생명의 주인이 따로 있음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받을 때에 전혀 자의로 받지 않았고 또 그 생명이 없어질 때도 전혀 자의가 작동될 수 없음에도 과학이 조금 발달했다고 죽음을 감히 인간이 관장하려 듭니다. 생명의 주인에 대한 너무나 완악한 교만이자 거역입니다. 나아가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음은 아예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런 자에게 심판이 따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그가 얼마나 선하게 살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영생에 대한 믿음의 근거는 우리 머릿속의 논리가 아니라 우리 가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각자를 향해 어떻게 인격적으로 개별적으로 사랑하셨는지 체험했기에 부활을 믿는 정도를 넘어서 아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 자신이 성령 안에서 바울처럼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부활을 체험했기에 부활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신자더러 그 단계에서 더 나아가기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우리에게 부은 바 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개인이 천국을 아는 일에만 적용하지 말고 주위에 나눠주어 남들도 알게 하라고 합니다.  

나아가 그런 나눔 가운데 서로가 하나님의 존재를 더 깊이 알게 된다는, 즉 부활한 생명들이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부활을 누리고 살기에 육신적으로 죽는 바로 그 순간만 지나면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은 단지 물질계의 천국에서 영적인 천국으로 넘어가는 통과 절차일 뿐입니다.

물론 신자도 죽음 자체는 너무나 생소하고 때로 고통이 수반할 것이기에 두렵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안다면 얼마든지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넘길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너머를 진짜 열정을 갖고 기대하기에, 단순히 소망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내가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 바울은 천국의 삼층천까지 가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습니다. 정말 당장 천국에 가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있게 되기를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 천국을 알게 해주고 또 천국 공동체를 설립하기 위해 주님이 직접 부르실 때까지 이 땅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訃音)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8) 신자 모두에게 부활이 선물로 주어진다고 합니다.

당신은 천국을 소망하십니까? 믿으십니까? 아니면 정말로 아십니까? 그래서 너무 기대하기에 빨리 가고 싶습니까? 혹시라도 단지 믿고 싶기만 한 것은 아닌지요?

11/8/2007

조인구

2007.11.08 07:23:04
*.137.166.51

아멘 !!!

국중후

2007.11.08 09:56:54
*.137.166.51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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