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10:1,2) 이중인격적인 목회자들

조회 수 1140 추천 수 39 2008.02.03 17: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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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인격적인 목회자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후10:1,2)


본문을 언뜻 보면 바울이 이중인격을 가진 위선자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을 직접 만날 때는 아주 겸손하다가 돌아서면 뒤에서 아주 매섭게 야단치는 자처럼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에선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유순하나, 떠나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강경하다고들 합니다.”라고 바울을 헐뜯으려는 자들의 일방적 평가라고 분명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그들은 바울더러 교인들 앞에선 우유부단하게 자기 요구를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면서 왜 편지로만 야단치느냐고 비방했습니다.

문제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처럼 아무리 거짓선생들이라도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을 퍼트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많은 교인들이 함께 오해했다는 것은 그 모함이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직접 만나면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지만 서신으로는 아주 엄하게 권고했던 것만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겉으로 드러난 태도보다 그 속에 담긴 내용에 따라 사역이 평가 받아야 합니다. 사역 내용의 평가 또한 그 궁극적 동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져야 합니다. 태도에 의해 내용과 동기까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의 진정한 동기는 알지 못한 채 겉모습만 보고 비난했습니다.  

사역자라고 해서 무조건 성도들에게 온유와 관용으로만 대해야 한다든지 그 반대로 엄하게 다스려야만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사역자에겐 진리를 선포하는 것만이 우선 과제이지 진리를 어떤 그릇에 담아내느냐는 그 다음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문제입니다. 나아가 글로써 진리를 기술할 때는 필연적으로 엄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갖는 특성 때문에라도 모호하거나 타협하는 내용이 포함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진리로서의 빛을 잃을 뿐 아니라 쉽게 비진리로 변질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진리를 사람들에게 말로써 전하거나 실제 삶에 적용시킬 때는 온유와 관용이 따라야만 합니다.  

예컨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원수나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거나 위해서 기도까지 할 필요는 없고 미워하지만 않으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신자들이 당장 그렇게 실천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야단만 칠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 본인도 온전히 지키지 못하기에 그렇게 되도록 피 흘리기까지 사역자와 교인이 힘을 합해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할뿐입니다.  

바울 자신은 교인들을 대면하면 편지에서처럼 엄하게 대하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5,6절) 그들로 어떻게 하든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복종케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누구라도 복음 안에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진리는 단 한 치의 오류나 가감 없이 전하되 그 진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는 인내와 관용으로 대했습니다. 적대자들로부터 어떤 비방을 받더라도 자신의 관심은 오직 성도가 새 생명 안에서 바뀌고 자라는 것뿐이었기에 진정 아비의 심정과 사랑으로 끝까지 인내하고 용서하며 권면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바울 사역의 동기는 단 한명이라도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복종케 하는 것이며, 그 내용은 골고다의 십자가이며, 태도는 온유와 관용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거짓 교사는 설교도 교인들이 듣기 좋아하는 것, 권면도 그들의 기분을 거슬리지 않은 것만 골라서 했습니다. 그들은 시종일관 온유해 보이지만 그 숨겨진 동기는 오직 자신들의 현실적 유익뿐이었습니다. 교인의 영적 상태가 어떻게 되던, 복음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관심 밖이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현실적 보상만을 추구하며 진리도 교인들의 입맛에 맞게 얼마든지 왜곡해 전했습니다.

바울 때나 지금이나 교회 안의 사정은 어찌 이리도 동일합니까? 아니 죄로 부패한 인간 세상에선 항상 동일했고 또 동일할 것입니다. 사역자들조차 복음을 아주 약하게 전하거나 아예 전하지 않으니 자연히 죄에 대해 무감각하며 그저 환난과 궁핍만 없애고 잊으려는 종교적 최면을 원하는 교인들만 양산되고 있습니다. 현실적 안락과 감정적 충만을 돈으로 사러 다니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입맛에 맞도록 조정하려 듭니다. 외형적 경건이 참 영성으로 둔갑되며 그리스도의 빛 대신 세상 철학과 사조가 강단에서 인기몰이를 합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그를 불러온 죄악에 대한 저주가 없으면 교회의 존재가치는 일절 없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가 강단의 중앙에 바로 서있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다시 오심을 계속해서 선포하지 않으면 목회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성경적 가르침과 그 구체적 적용도 오직 십자가 복음에만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그것도 바울처럼 목회자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직접 몸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흔히들 교회에서 죄에 대한 저주를 선포하면 교인이 안 모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일단 끌어 모아 놓고 나중에 복음을 가르치면 된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복 준다고 불러 모아놓고 저주를 선포하면 그야말로 목회자는 일구이언을 했고 기독교는 위선으로 전락될 뿐입니다. 또 목사의 말이 처음과 나중이 달라질 수 없으니 치유와 성공 신학만 가르치게 됩니다. 그렇게 모은 자들은 교회 멤버는 될지언정 거듭난 신자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한 명의 엘리야를 찾으십니다. 곳곳에 숨겨둔 한명이 모여 칠천 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한 곳에 칠천 명이 모였다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십자가 보혈로 거듭나면 천국에서 팡파르가 장엄하게 울려 퍼집니다. 또 그런 자를 통해 당신의 이 땅을 향해 계획하신 역사를 진행시켜 나갑니다.

바울은 누구라도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는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행세를 했습니다. 쓸개도 없이 비굴하게 이 사람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든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선포하되 그 진리 앞에 온전히 복종케 하려는 목표를 끝까지 붙들었고 그 결과가 대면하면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는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개인적 권력, 명예, 갈채, 재물, 안위, 그 어느 것에도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상대가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되살아나는 일에만 자신의 전부를 걸고 일생을 통해 매진했습니다. 당연히 온유와 관용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는 그 마음이 복음을 향해 열리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바울처럼 진리는 담대하게 선포하되 성도들은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는 것이 절대 이중 인격적이 아닙니다. 강대상에선 복음 대신 세상 가르침으로 일관하다가 교인들에겐 억지 권위를 과시하며 자기 입맛대로 조종하려는 자가 위선적입니다. 단 한 명의 바울 같은 사역자가 있을 때에 극한 가난 가운데도 넘치도록 연보하는 마게도니야 교인 같은 신자들도 나올 것입니다.

2/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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