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5-17) 선악과 금령의 진짜 의미

조회 수 29 추천 수 0 2022.07.26 05:40:04

(창2:15-17) 선악과 금령의 진짜 의미

인간 타락 담화 (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전혀 성립되지 않는 불만 

 

선악과 금령만큼 왈가왈부가 많은 성경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반발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과 성경을 모르니까 얼마든지 그럴 만합니다. 문제는 신자들 중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둘째 치고 세상 사람들처럼 신화나 전설로 간주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선악과로 인해 인간 사회에 죄악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타락했으니까 하나님이 긁어서 부스럼만 생기게 했다고 오해 원망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마치 선악과가 없었다면 인간 세상은 의인들로 가득 차고 이 땅도 에덴동산 때의 유토피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 땅의 죄악상이 너무 심각하고 소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워 그런 감상이 드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아니라 계속 그런 의심을 갖고 있다면 신앙을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한 모든 인간들 중에 단 한 명도 단 한 번의 죄라도 짓지 않았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 땅의 생태계도 항상 쾌적하게 유지되고 노쇠나 질병 등으로 인한 고통도 없어서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이 지금의 우리처럼 연약하지 않고 삶에서 완전한 진선미를 실현해내어야 하는데 사실상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천사 같은 존재를 물질계 내에 수십억 명이 넘도록 만드실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신적 존재가 아니고도 인간이 죄를 평생토록 전혀 짓지 않으려면 두 가지 길 뿐입니다. 첫째 선과 악에 대한 윤리의식이 하나도 없는 짐승이나 둘째 모든 활동이 사전에 프로그램 되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로봇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두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을 신, 짐승, 기계 셋 중에 하나로 만들었어야 했다는 뜻입니다. 그 셋이 터를 잡고 살아야 할 세상도 각기 천국, 정글, 공장 셋 중에 하나로 만들었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할 당시에 전혀 꿈꾸지 않았던 그림입니다. 인간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의 이 모습으로 만드시길 원하셨고 또 그렇게 만드신 후에 심히 기뻐했습니다. 인간이 감히 신처럼 되고 싶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고유영역을 침범하는 너무나 교만한 생각입니다. 반대로 짐승이나 기계로 만족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준 인간으로서 고귀한 신분과 능력을 포기하는 너무나 패역한 생각입니다. 그런 의심은 결국 이 땅과 인간을 처음부터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부터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우연히 물질에서 진화되었고 이 땅이 전부라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안은 둘뿐입니다. 모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예컨대 마피아 두목이 되더라도 최대한 풍요 사치 쾌락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능력과 여건이 안 되면 어차피 인생이 아무 의미 없이 물질로 끝날 바에야 미리부터 자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원망 내지 의심의 실질적인 의미는 인간이 신적 존재 혹은 짐승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결론은 진화론자의 인생관과 사실상 맥을 같이 합니다.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은 이 땅의 인생을 초월해버리는 것이므로 자살하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또 짐승이 되는 것은 조폭두목처럼 사는 것이지 않습니까?

 

인간은 창조된 이후에 자의식이 생긴 존재입니다. 이 땅에서 이 모습 이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런 상황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인간의 숙명입니다. 모든 행동과 말은 물론 생각도 자신이 창조된 피조물이거나 우연히 생성된 물체라는 둘 중 하나의 범주 내에서만 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악과 금령은 오히려 인간의 실상을 너무나 정확히 표현한 합리적이고도 객관적인 진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신에 인간이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거나 신들이 인간처럼 되었다는 가르침이야말로 허구적인 신화일 뿐입니다. 그런 신화들은 인간의 삶에 의미 있는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자기가 천둥의 신이 되었다고 토르 복장을 하고서 그렇게 행세했다가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될 뿐입니다. 

 

무엇보다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죄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절대로 먹지 말라고 그러면 반드시 죽는다고 분명히 미리 경고했습니다. 비유하자면 10미터 앞에 커다란 맨홀이 있어서 그대로 걸어가면 빠져죽는다고 분명히 경고했고 실제로 빤히 보이는데도 고집스럽게 걸어가 빠져서 죽은 것과 같습니다. 미리 경고를 하지 않았고 어디에 보이는지 모르게 맨홀을 곳곳에 숨겨 놓았다면 분명히 그렇게 만든 하나님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보이고 분명히 경고했다면 맨홀을 둔 것이 사망의 원인이 결코 아니라 고집스럽게 걸어간 사람의 전적인 책임일 뿐입니다. 

 

정작 따져야할 질문

 

그렇다면 인간이 정말로 깊이 따져야 할 문제는 왜 맨홀을 눈앞에 두었느냐는 이유여야 합니다. 성경은 반드시 본문에서부터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었다고 말합니다.(9절) 그런데 인간이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인데 하나님이 왜 그것을 먹지 못하게 했는지 조금 의아합니다. 

 

마찬가지로 분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야 합니다.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해서 과실 안에 영적으로 신통한 능력이 내포되어서 따먹으면 도덕적 종교적 안목이 훤히 밝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어도 된다고 했으니 그것은 선입니다. 그리고 이 과실만 먹지 말라고 했는데 당연히 악이니까 먹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선은 선악과만 빼고 다른 모든 실과를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선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바라지 않는 악을 고의로 능동적으로 행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악은 우리가 이해하는 선악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든 과실을 먹다보면 간혹 맛이나 모양이 떨어지는 것들도 있고, 급하게 먹다가 체하거나 배탈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먹어도 된다고 했으니 당신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 안에선 어떤 종류의 과일을 얼마나 많이 먹어도 선입니다. 요컨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고 그분 곁에 붙어있기만 하면 선입니다. 굳이 선을 행하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반대로 선악과만은 하나라도 따먹으면 악이 됩니다. 아무리 부부가 사이좋게 따먹고 또 그로 인해 몸도 건강해지고 둘 사이가 더욱 사랑으로 굳어져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그분의 편에 붙어있지 않으면 악입니다. 선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는 것으로 그분을 외면 배척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악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선을 멈추고 악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품을 벗어나지 않으면 그 일생을 당신께서 당신의 선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지만 벗어나는 순간 그 선을 받아 누리지 못하니까 곧바로 악에 함몰되어서 패망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금령은 한 마디로 당신의 사랑의 품을 절대로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거나 일부러 죄악으로 밀어 넣으려는 숨겨진 계략은 전혀 없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아름답고 의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한 가지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이전에도 인용했지만 필립 얀시는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신 하나님을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큰 쇼핑몰에 간 엄마에 비유했습니다. 엄마 손을 놓치면 큰일 나니까 절대로 손을 놓지 말라고 당부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지나쳐온 형형색색의 사탕을 파는 가게에 정신이 빼앗겨 엄마 손을 뿌리치고서 인파 속으로 뛰어서 도망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더러 손을 놓지 말라는 것은 아이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 그 혼잡한 쇼핑몰에서 아이의 안전을 보호해줄 수 있는 최선의 대책입니다.  

 

얀시의 비유는 그것으로 끝나지만 조금 더 확장해보겠습니다. 막상 아이로선 그 넓고 여러 갈래로 나뉜 쇼핑몰에서 캔디 가게가 어디인지 도저히 찾을 수 없습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자꾸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부끄러워지고 불현듯 자기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크게 두려워질 것입니다. 나아가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도망갔으니 꾸중을 들을까봐 걱정될 것입니다. 반면에 엄마는 자기 손을 뿌리치고 뛰어간 아이가 사탕가게 쪽으로 갔다는 사실을 다 알고  곧바로 아이를 찾으러 갈 것입니다. 설령 아이가 다른 곳으로 숨었어도 평소의 행동과 습관과 성격을 아니까 금방 찾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야단치지 않고 이제 엄마가 왔으니 울음을 그치고 아무 염려하지 말라고 따뜻하게 위로해줄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도 잡고 있던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선악과를 따먹자 곧바로 서로를 향해 부끄러워져서 무화과나무로 옷을 지어서 앞을 가렸습니다.(창3:7) 그리고 자기들을 찾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벌을 받을까 크게 두려워져 숲속 깊숙이 숨어들어갔습니다.(창3:10)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지만(창3:9) 그들이 무슨 짓을 했으며 어디에 숨어있는지 그분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 말씀의 진짜 뜻은 “지금 네가 있는 곳은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네가 범한 일의 결과가 네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너무 비참하다는 사실을 체험했을 테니까 어서 빨리 내 품으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먼저 찾아와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고 다시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여주겠다고 사랑으로 호소한 것입니다. 

 

선악과에 대한 인식을 바꿔라.

 

사실은 하나님은 선악과 금령 안에 그런 충만한 사랑을 이미 계시해 놓았습니다. 먼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16절)라고 모든 축복부터 제공해주었습니다. 그 축복에는 당신의 인간을 향한 사랑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첫째 각종 나무라고 했습니다. 맛과 향이 다른 과실을 맺는 온갖 나무를 양껏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각기 다른 과실을 종류와 양에 아무 제한 없이 먹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임의로 먹으라고 했는데 따먹는 시기 장소 상황 어떤 것에도 구애 받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 생존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물, 공기, 태양 빛 등은 물론 곡물 과일 야채 등은 인간의 발명품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기도 전에 인간더러 아무 제한 없이 누리라고 마련해 놓은 공짜 선물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과실을 인간의 임의처분에 맡긴 후에 딱 하나의 과실만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최고로 아름답거나 천국의 맛을 가졌거나 값으로 따져서 엄청나게 비싼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두었어도 아담이 예사로 지나쳤고 사탄의 꾐을 받기 전까지는 따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주 평범한 모습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하자면 이 금령은  굳이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평소대로 살고 있으면 얼마든지 쉽게 지킬 수 있는 차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 금령을 또 다른 미국 신학자는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어떤 교회가 자체 예배당 건물과 주차장이 없었습니다. 한 독지가가 자기 빌딩과 주차장을 영구적으로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무료로 빌려주면서 내부 수리나 장식도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딱 한 가지 조건만 붙였는데 매년 1월1일만은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주인이 특별한 행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 하루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 빌딩과 주차장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만을 기억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마저 없이 모두 맡겨버리면 처음부터 자기들 소유인 양 착각하고 자칫 남에게 팔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이 바로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임의대로 과실을 따먹으라는 축복을 다 베풀었는데 그런 축복이 절대로 그저 생겼거나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산의 모든 과실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동산이 인간의 것이 아니며 그 주인인 하나님이 따로 계신다는 진리를 반드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땅을 영구 무료로 인간에게 맡길 만큼 당신께서 인간을 사랑하니까 제발 그 사랑의 품을 떠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서 단순히 이 금령이 지옥 심판과 천국 구원으로 나누는 기독교 고유의 교리로만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러하지만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은 절대 그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심판하려는 저주의 계명이 아니라 이 땅에서 당신의 풍성한 사랑 가운데 살게 하시려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창조의 경륜에 비추어 따져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가장 먼저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당신을 대신할 청지기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뜻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으셨는데 쉽게 말해 당신께서 이 땅과 인간을 어떻게 다스릴지에 관한 계획을 인간더러 알도록 당신과 교통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주신 셈입니다.      

 

이제 동산의 모든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이 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관해 지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더러 내 사랑의 품을 벗어나지만 않으면 나머지 모든 것을 네 임의로 해도 내가 의롭게 이끌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이 이 땅을 그분 대신에 다스릴 수 있는 근거와 힘이 당신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 안에서 다른 피조물에게도 그분께 받은 사랑을 실현하면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소명을 감당하려면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처럼 그분께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또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알기에 자연히 주변에 나눠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모든 선한 것은 그분께로만 온다는 것을, 최소한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만 붙들면 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첫째 조항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고 해서 단순히 도덕적으로 경건한 계명에 충성해야 하고 종교적으로 신령한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살게 하신 목적을 그분께서 마련해주신 축복 안에서 실현하면서 살면 됩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아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과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해도 하나님의 영광에 단 한 치의 손상이 가지 않듯이, 그분의 기쁨도 인간을 만들지 않았어도 순전하시고 영원하십니다. 그분에겐 오직 온전한 진실 선하심 아름다움만 있기에 그분의 기쁨도 순전합니다. 그분의 기쁨을 앗아가거나 훼손시킬 존재 또한 영원토록 전무합니다. 창조 때부터 영원토록 순전하실 당신의 기쁨이 모든 피조세계에 특별히 인간에게 온전히 반영되어졌기에 심히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미국의 18세기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무한히 귀하게 여기시며 그 영광은 곧 자신에 대한 지식, 자신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만족과 기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 속에 이 영광이 나타나거나 전달되거나 피조물이 이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셨다.”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을 아주 기뻐하므로 피조물들과 인간 속에 그런 당신의 기쁨이 드러나게 하셨고 인간더러도 그런 당신의 기쁨과 연합하길 진정으로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주신 축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기뻐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필립 얀시의 비유로 돌아가면 엄마가 아이와 함께 쇼핑몰에 가면 누가 더 기쁘겠습니까? 아이보다 엄마입니다. 아이는 피곤해서 짜증 날 때도 있고 배고프다고 징징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아이가 그러는 것까지도 다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엄마로선 아이와 함께 지내기만 해도 기쁨으로 충만하지 그 외의 불순한 감정이나 생각은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이 땅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는 심정이 바로 그러합니다.  

 

창조된 이 땅만 주의 깊게 둘러보아도 그분의 기쁨을 같이 느낄 수 있습니다. 저희가 미국에 이민 온 약 30년 동안에 비교적 여유롭게 곳곳을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장엄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일일이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사진으로도 절대 담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은 정말로 아름답고 선하신 분이며 다 만드시고 나서 크게 기뻐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제 속에서 저절로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런 아름다움 속에서 그분이 마련해주신 맑은 공기를 마시고 푸짐한 음식을 먹으면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포한 말씀이 바로 저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문맥상으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완벽한 섭리를 설명한 후에 그 지혜에 감탄하여 내린 결론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조는 물론 그 후의 인류를 향한 모든 사역과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겐 그분만의 정미하고 신묘한 권능과 은총이 넘치도록 실현된 것입니다. 인간이 특별히 신자가 그분에게 바칠 것은 오직 감사와 영광뿐입니다. 

 

선악과는 십자가 복음이다.

 

지금껏 이 금령을, 사실은 금령이라는 표현 자체가 부적합하지만, 아담의 불순종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가르쳐져 온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순종했느냐 불순종했느냐가 심판과 구원의 기준이라고 아주 제한된 의미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되어서도 성경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벌 받지 않나 불안해지고 심하면 구원의 확신도 흔들립니다. 

 

구원은 오직 그분의 사랑의 품에서 벗어났느냐 아니냐가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맘껏 부어주시려고 이 땅을 창조했습니다. 최초 인간도 처음에는 넘치도록 그 사랑을 체험하며 누렸습니다. 모든 과실을 다 먹어도 되지만 딱 하나만 금지했습니다. 그 하나를 먹으면 독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 금한 것이야말로 다른 것 다 먹으라고 한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사랑의 배려입니다. 그런데도 사탄의 꾐에 빠져서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발로 차버린 것입니다. 일 년 내내 주인처럼 빌딩과 주차장을 맘껏 사용하다가 새해 첫날만 주인을 위해서 비워주면 되는 그 간단한 일마저 귀찮고 싫어서 통째로 그 빌딩과 주차장을 차지하려든 것이 인간의 타락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은혜도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교리로만 인식해선 안 됩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수긍 동의하고 그 후에 교회생활에 충성 봉사한다고 구원 받았다는 증거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정도로는 신앙생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선악과 금령의 사랑부터 미처 모르니까 현실 고난으로 조금만 힘들어도 열심히 믿은 보람이 없다고 여기고 의심과 원망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말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죽기 까지 죄를 저주하고 당신께서 죽기까지 죄인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가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잘못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죄를 지은 자들을 전혀 차별하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십자가상의 우편 강도였지 않습니까? 매국노 세리 우상숭배자 이방인들 나아가 당신을 배반할 제자들까지 겸손히 당신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똑같이 사랑해주었습니다. 

 

당신께서 죽기까지 저주한 죄의 본질은 인간이 죽기까지 당신을, 참 하나님을 배척 거역하는 죄입니다. 그래서 제발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와서 다시는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감 수정 타협 포기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바로 선악과 금령입니다. 

 

신자는 자살을 할 수 없는 신분이다. 

 

바울은 도덕적 종교적으로 하나님 앞에 흠이 하나가 없다고 자부할 만큼 당대 최고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혀 몰랐던 간단한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당신께로 나오는 자는 세리 이방인 창녀 귀신들린 자 불치병자 불구자 어느 누구라도 기뻐하신다는 진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은 당연히 그런 자들을 미워하고 미워해야만 한다고 믿고서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로 정죄하며 예수 믿는 자들을 앞장서서 죽이러 다녔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하나님보다 높아졌던 것입니다. 

 

그에겐 도덕적 종교적 우월감 자부심만 있었지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기쁨과 사랑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주도하여 스데반을 처형시킬 때에 그의 얼굴에 넘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구약의 전문가이면서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최초로 계시한 선악과 금령도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이 그러하듯이 율법적으로만 해석 적용한 것입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조건 없는 용서를 받고 오히려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지고선 자신이야 말로 그분의 참 사랑을 거부하며 선악과를 따먹은 천하죄인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생전 처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삼일 간 완전히 봉사가 되었다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체험을 한 바울로선 이런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당신의 참 사랑 안으로 품어주었을 뿐 아니라 절대로 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삶에서 매일 체험적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쇼핑몰의 아이 비유로 돌아가면 땀 흘리며 헐레벌떡 찾아온 엄마를 만나자 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다시는 엄마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실현할 것입니다. 

 

불신자에겐 조폭두목 아니면 자살이 사실상 가장 현명한 삶의 방안입니다. 신자는 그 정반대로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과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선악과 금령이 없었다면 즉, 차라리 이 땅에 태어나지 말았으면이라는 한탄을 절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넘치는 자연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기합니까? 그분의 기쁨 안에 살아가는 신자 자신과 주변 이웃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럽습니까? 이 땅에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태어난 것을 너무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주님의 기쁨을 모르는 자들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신자라면 바울처럼 그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섬기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그래서 절대로 실망과 좌절에 빠져 주저앉아 있어선 안 됩니다. 물론 육신이 여전히 연약해서 감정적 현실적 상처와 고난 가운데 때로 침체될 수는 있습니다. 그럴 때마나 성령의 인도 아래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 큰 소망과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구원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의 기쁨에 참여하고 있는 이 땅의 나의 삶이 너무 감사하기에 그 기쁨을 주변에 나눠주고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 하나님 밖에선 절대로 순전한 기쁨이 생길 수 없다는 진리를 피부로 실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 금령의 진짜 뜻입니다. 

 

(5/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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