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강해(1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마5:7)
설교자에게 가장 큰 유혹
목사가 설교를 준비할 때에 교회를 빨리 성장시키고자 하는 욕심에 그만 자기도 모르게 넘어가 가장 쉽게 범하는 잘못이 하나 있다. 잘 믿기만 하면 만사 형통한다는 메시지를 준비하는 것이다. 믿음을 만병통치약으로 선전하면 가뜩이나 고달픈 삶의 행로에 지친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자 교회로 모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업이 부도나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암에 걸릴 확률은 신자 불신자를 불문하고 대동소이하다. 물론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셨듯이 신자를 언제나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고 보호하시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성경에도 분명히 그렇게 약속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그런 약속들에는 언제나 명시적으로든 아니면 전체 문맥상의 흐름에서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었다고, 그리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종교적 활동에 열심과 정성을 다 바쳤다고 해서 하나님이 조건반사적으로 복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목사가 그런 유혹에 잘 넘어가는 이유는 사실은 신자들이 그런 설교를 듣기 좋아하고 심지어 요구하기 때문이다. 목사도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만 신자도 그런 생각이나 기대를 접어야 한다. 신자들 중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반발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아가 기도가 응답이 안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며 무응답 자체가 응답이라고까지 이해하는 믿음 좋은 신자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자도 정작 현실의 큰 시련과 환난에 부닥치면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가? “대체 하나님이 왜 이러시는가? 그렇게 기도 많이 하고 봉사와 헌금과 전도와 구제에 열심이었고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왜 고난을 주시는가? 제대로 믿음도 없고 교회도 건성으로 다니며 뒤에서 나쁜 짓은 골라 하는 사람은 아무 탈 없이 잘만 사는데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가?” 머리로는 기복신앙을 부인하면서도 속으로는 잘 믿으면 형통해야 한다는 개념에서 진전된 것 하나 없다. 믿음에 문제가 없으면 현실에서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 믿으면 복을 많이 받는다는 기복 신앙과 어법(語法)이 긍정에서 부정으로 바뀌었다 뿐이지 내용은 똑 같은 것이다.
긍휼히 여기면 긍휼을 받는가?
본문에는, 신자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요, 신자만이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으며, 또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다는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했다. 이제 그 세 번째 의미를 살펴 볼 차레다. 그런데 이웃을 긍휼히 여긴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된다면 방금 믿음의 실천을 잘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따져 본 내용과 서로 상충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신자가 가진 믿음의 수준이나, 그 믿음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정도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전제나 조건이 절대 될 수 없다. 긍휼이란 단어의 정의가 무엇인가? 전혀 그럴만한 처지, 조건, 상태, 자격이 안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원수 되어 있었음에도 하나님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사하고 새 생명을 허락한 것이다.
긍휼 안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만 있지 인간 쪽의 조건은 단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고 구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의거하여 인간을 의롭다고 칭해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한 그 숭고한 희생이 갸륵해서 덤으로 봐주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 당신 되는 예수님이 태초부터의 구원 계획에 따라 죽으셨다. 아담의 범죄 이후 그가 회개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긍휼은 작동되기 시작했지 않는가? 오직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당신의 자녀가 어떤 죄악 속에 있던 단지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므로, 나아가 사랑이신 당신의 품성 때문에 십자가 구원 외의 길은 있을 수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 당신이 보기에 심히 좋게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그 자녀가 타락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긍휼을 베푼 것이다. 나는 네 하나님이며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것 외의 다른 이유는 전혀 없다.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구원해주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 조건, 전제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왜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는가? 이를 역으로 말하면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며 나아가 긍휼히 여기는 자만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가 된다. 긍휼의 본질대로 인간이 남에게 긍휼히 여기든 말든 모든 자에게 아무 조건 없이 긍휼을 베푸실 것 같으면 구태여 이런 말씀을 따로 할 필요가 뭣 때문에 있는가?
영원히 행복해지는 비결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행복하기 원하는가? 하루가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머리가 산뜻해지고 새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하루는 간다. “일주일이 행복하려면 여행을 가라.” 맞는 말이다. 집을 떠나 낯선 곳에 이르면 며칠은 아주 즐겁다. 그러나 사실 아무리 즐거운 여행이라도 일주일이 경과하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한 달이 행복하려면 집을 사라.” 집을 사면 정말 신난다. 부부와 전식구가 함께 집을 꾸미고 가꾼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면 서서히 고치고 손 볼 데가 눈에 띄고 골치거리로 둔갑할 뿐 아리나 장식하는 일도 시들해진다.
“일년이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 결혼으로 인한 행복이 일년 밖에 안 가면 너무 짧은 듯한가? 집안의 장남이었던 어떤 목사님이 자랄 때에 너무 고생하며 외롭게 커서 결혼하면 아내와 함께 있고 또 같이 힘을 합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날 밤을 지낸 다음날 새벽 곤히 누워 자고 있는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자니 앞으로 박봉으로 어떻게 아내와 동생들을 먹여 살리나 걱정이 앞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결혼의 행복도 12시간을 채 못 넘긴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영국 사람이 결혼으로 일년 동안 행복할 것이라고 한 것은 그나마 후하게 봐준 것 같다. 아마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의 신혼 시절 동안만은 부부 둘이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의미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평생 동안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슈퍼 로또에 당첨되어 돈 걱정 하나 없이 호사스럽게 보내면 되는가? 영국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 본문처럼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인간이 누리는 행복 가운데 가장 크고, 깊으며, 흔들리지 않고, 싫증나지 않아 오래 지속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학창 시절에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일일 봉사로 방문해 본 적이 있는가? 농촌 봉사 활동을 몇 주씩 다녀온 적이 있는가? 자기의 아까운 돈과 시간을 투자했고, 몸은 피곤하여 녹초가 되었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기쁨을 맛 보았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그 기쁨이 친구들과 운동하고 생맥주집에 가서 노닥거리는 재미와, 심지어 여자 친구랑 데이트 하는 기쁨과도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가?
세상에도 신나고 재미 있고 기쁜 일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한결 같이 끝나고 나면 항상 “이것이 전부가 아닌데… 이것말고 더 즐겁고 행복한 일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텐데?”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또 거의 대부분의 세상 재미들은 함께 즐기는 자들과 시기, 다툼이 일어나며 심지어 허무함, 죄책감마저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는 내가 겨우 이런 결과를 얻으려고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던가라는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심령 깊숙이 미처 채워지지 않은 공허감으로 인한 미련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 부분을 메워줄 뭔가를 소원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 재미란 필연적으로 더 신나고 더 화끈하고 더 오래가는 것들을 끊임 없이 찾고 또 찾게 만든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는데도 아무런 아쉬움이나 부족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선전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인 스릴, 서스펜스처럼 감각적으로 말초신경을 건드리며 대뇌의 표피를 짜릿하게 자극하는 그런 재미는 전혀 없다. 그러나 세상의 것이 주지 못하는 의미와 보람과 가치가 가슴 뿌듯하게 채워진다. 지금껏 느낀 재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격이 소리도 없이, 빛도 발하지 않고, 아주 조용히 스며들지만 우리 존재 전체에 완벽한 행복감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 준다.
세상의 재미는 내가 겨우 이 꼴밖에 되지 않는가 라는 자기 모멸로 끝나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재미는 나도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구나라는 자부심을 형성시킨다. 세상 재미는 잠시 잠간 그 때뿐이지만 이웃 사랑은 그 일이 끝난 후에도 한창 감동이 남고 아무리 오랜 후에 회상해도 그 여운이 줄거나 가시지 않고 오히려 새록새록 돋아 난다.
나아가 이웃 사랑은 누가 가르쳐 주거나 강요한 것도 아닌데 앞으로 더욱 이 일에 헌신해야겠다는 다짐이 저절로 생기며 실천하게 된다. 말하자면 오랫동안 모르고 또 잊고 있었던 자신의 참 모습을 되찾은 것 같다. 왜냐하면 이웃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아 창조했다는 것 자체가 그분의 본질인 사랑을 인간에게도 근본 품성으로 나눠주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인간의 진정한 정체성은 이웃을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인데도 아담의 타락으로 그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이웃 사랑이 아닌 곳에서 자꾸만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려 들지만 애당초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세상 재미는 아무리 추구해도 결코 충족해지지 못하고 항상 그 끝은 공허로 실패하게 마련이다. 인간은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절대로 완전한 행복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평생을 행복하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영국 속담은 성경적 진리에 해당한다.
왜 하나님은 북한 정권을 그대로 두시는가?
흔히 하나님은 왜 북한 정권을 심판하지 않고 계속 그냥 두고 보시는가 의아해 하는 신자가 많다. 김정일 같은 천하 죄인을 당장 벼락을 맞게 해서라도 없애야 하나님의 정의가 공평하게 증명될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악을 다루는 가장 근본 원칙은 죄인을 그 죄 중에 그대로 둔다는 것이며 또 그것이 가장 큰 형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4,26,28)
하나님이 악인에게 벌을 주지 않고 가만 두는 것이 어떻게 가장 큰 벌이 될 수 있는가? 좀 설명이 이상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라. 김정일에게 벌을 주어 정신을 차리게 만들면 김정일 자신에게는 그것이 벌인가 상인가? 벌을 받아 정신 차려 좋은 사람이 되면 바로 그것이 상이다. 죄악 중에서 육신과 정신과 영혼이 썩이진 채로 가만 두어서 완전히 썩어지게 만드는 만큼 사실은 더 큰 벌은 없다.
죄인을 정욕, 욕심, 상실한 마음대로 둔 결과를 성경은,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2:29-31)고 증거하고 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예수가 “밥 먹여 주나!”라고 큰소리치며 세상에서 투기, 사기, 부정부패 등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물질만 쌓고 온갖 쾌락을 추구하는 모습이 사실은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비록 잠시 잠깐 육신은 편안하고 재미 있을지 몰라도 그런 것들로는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쓰리고 텅 빈 심령이 그와 반비례로 썩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원인 모를 짜증, 눌림, 불안, 염려 때문에 결국 그들의 발 걸음은 기껏해야 점쟁이, 술집, 도박장, 섹스, 마약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고 그럴수록 하나님과는 더 등을 지게 되는 것 자체가 영원한 형벌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들은 죽어서 지옥을 가는 것이 아니라 벌써 이 땅에서 사는 것 자체가 지옥이며 몸뚱이는 살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불신자가 받는 벌을 역으로 따져보면 바로 신자가 하나님에게 받는 축복이 된다. 이웃을 사랑하고 불쌍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면 신자의 속에 자연적으로 충만하게 기쁨이 넘치는 것 바로 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말하자면 불신자가 죄에 그냥 거하도록 하는 것이 벌이지 따로 형벌이 따르지 않듯이, 신자를 이웃 사랑하는 그 사랑 속에 그냥 두시는 것이 복이지 그것으로 인해 따로 상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신앙 생활 잘 하고 이웃을 사랑했으니 하나님의 큰 축복이 뒤따를 것으로 기대해선 안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품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말하자면 인간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이웃간에 사랑하도록 장착해 놓았다. 그러나 인간이 사단의 꾐에 넘어가 자기 욕심에 눈이 멀고 쥐뿔도 잘난 것 없으면서도 자기가 최고인 줄 착각해 제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노력함으로써 그 프로그램을 못쓰게 만들었다. 이미 바이러스가 먹은 프로그램으로는 인간이 무슨 수를 써도 작동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선 찾고 또 찾아도 행복의 주머니를 채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예수님의 치료의 광선이 그 허황해진 심령에 비추이면서 그 바이러스가 제거된 자가 신자다. 그 빛 속에서 “내가 나의 형상으로 닮게 만들었던 나의 품 안으로 되돌아 오라. 왜 문 밖 세상에 나가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느냐?”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신자가 예수를 믿었다고 더 거창한 행복을 보상으로 주시지 않는다. 단지 이웃 사랑하는 프로그램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품성의 바이러스만 제거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고 이웃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된 것 뿐이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 것 그 자체가 신자가 누려야 하고 누릴 수 있는 평생의 행복이다.
이전에는 아예 원수로 지내며 외면했던 천지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믿고 그 거룩한 이름을 아는 것, 그래서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 주일날 하나님의 전에 나와 찬양하고 말씀 들으며 경배하는 것, 하나님의 신령한 사람이 되어 의와 생명과 거룩을 실천하며 빛 가운데로 걸어갈 수 있는 것, 현실에선 비록 여전히 환난과 시련이 겹치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의 영광된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고귀한 소망을 놓치지 않고 더 키워 가는 것, 세상에서 어떤 죄악과 흑암과 사망의 세력이 덮칠지라도 절대 실망과 좌절에 빠지지 않고 당당하게 대적하며 승리하는 것… 등등 신자의 행복은 수도 없이 많다.
사실 너무 고상하고 복잡하게 표현할 것도 없다. 하나님께 언제 어떤 모습으로 있든 담대하게 나아가 무엇이든 간구할 수 있게 된 신분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신자의 행복의 본질이다. 문제가 해결되어 시련이 끝나야 행복해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다. 신자의 행복은 다르다. 어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다.
신자와 불신자의 가장 큰 차이?
신자와 불신자가 가장 다른 점이 무엇인가? 신자가 더 거룩하고 신령해지고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인가? 아니다. 현실적, 지성적, 도덕적으로 불신자보다 더 나아진 것 하나 없다. 오직 한 가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 하나뿐이다. 불신자에게서 믿음을 더한 것이 신자이고, 신자에게서 믿음을 빼면 불신자다. 더도 아니요 덜도 아니라 믿음을 소유한 것만이 가장 큰 아니 유일한 차이다.
믿은 것 그 자체가 바로 신자의 행복이라면 성경은 왜 긍휼히 여긴 자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마치 보상으로 받을 것처럼 약속하고 있는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야 신자가 쉽게 알아 듣고 남들에게 긍휼을 베풀려고 열심을 내기 때문인가?
교도소의 사형수들을 전문으로 사역하는 박효진 장로가 인터뷰한 기사를 한 기독교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가 간수로 근무하면서 처음부터 그런 흉악한 죄인들을 사랑한 것은 아니라고 실토했다. 오히려 그런 자들을 볼 때마다 너무 한심하고 나쁜 놈들이라 반드시 뜯어 고치는 것이 자기 소명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훈계하고 심한 경우 무지막지하게 때리기도 해 ‘지옥의 사자’라는 별명이 붙어 죄수들 사이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때는 아무리 때려도 반응이 없어 독이 올라 죽을 만치 때려도 도대체 변하지 않고 더 나빠졌다.
그런 어느 날 본인이 성령 체험을 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고 그의 심령이 거듭난 것이다. 비로소 그 사형수들보다 오히려 자신이 먼저 고침을 받아야만 할 죄수임을 깨달았다.
그 때부터 죄수들을 바라보면 너무나 불쌍하고 측은해졌다. 감옥 밖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자들은 겁이 많고 체면 의식 때문에 속으로는 똑 같은 죄를 수 없이 범하면서 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거나, 아니면 더 영악하고 치사해 죄를 짓고도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갔을 뿐임을 알았다. 물론 자기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반면에 어리석거나 성질이 급하거나 돈과 권력이 없는 자들만 감옥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똑 같은 죄인 된 입장에서 서로 부등켜 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자 자기 혼자 정의와 성의를 갖고 고쳐보려 할 때보다 죄수들이 더 쉽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런 당신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은 그 죄를 다 안고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살아 계셔서 당신과 함께 하고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단순한 복음에 흉악무도했던 사형수들이 눈물을 쏟으면서 고꾸라졌다.
심지어 사형 집행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전혀 두려움과 떨림 없이 담대했다. 너무나 큰 변화에 당황하며 처다 보는 교도관들에게 오히려 “꼭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래야만 천국 갑니다”라고 전도하며 죽는 자도 있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고생하는 것 보니 그냥 불쌍해서 내가 가진 여유를 조금 나눠서 도와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박 장로가 사형수들을 좀 인간답게 만들어주겠다고 시도한 것도 분명 교도관이라는 신분상의 여유가 있기 때문에 단순히 도와주려 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성의와 열심이었을 뿐이다. 이웃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나눠주지 않으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야말로 죄인 중의 죄인이요, 내가 만나는 모든 이웃도 똑 같은 죄인임을 알 때에 그들의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상처, 눌림, 메임, 원한, 분노 들이 비로소 눈에 뜨이기 시작한다. 그것을 씻어 주고 감싸 안고 위로하려고 들면 들수록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나의 섬김과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대신에 저 사람을 지으시고 지금도 섭리하고 계시며 구원하여 복 주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긍휼, 위로만이 그를 살려 낼 수 있음을 확신하여 하나님 당신만의 은혜로 이 사람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눈물로 호소해야 한다.
그래서 참 신자란 남을 도울 때에 비록 오해와 반발과 멸시와 박대를 당하더라도 어떠한 억울함도 없으며 자신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법이다. 자기의 성의와 열심으로 도와 주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가 바친 만큼 비례해 성과가 나지 않아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또 오직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그들을 변화 시킬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상대가 아직은 긍휼을 베푸는 분이 누구인지, 왜 이런 긍휼을 베푸는지, 또 그 긍휼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알게 될 때까지 인내 가운데 소망을 갖고 더 기도하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셨을 때에 자기를 처형한 자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며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셨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박해자들의 용서를 빌었지 않는가?
하나님은 신자가 신앙 생활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자기가 가진 조그마한 여유를 억지로 내어서 이웃을 억지로라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물론 기쁘게 받으시고 때로는 보상도 하신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 모두 내 코가 석자 아닌가? 우리가 이웃을 도우면 얼마나 도왔는가? 돈으로 메울 수 있는가? 시간으로 때울 수 있는가? 어쩌면 그들 보다 내가 더 슬프고, 상처 받고, 눌린 적이 많지는 않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 없이는 이 자리에 성하게 앉아 있을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예수를 안 믿으면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는다는 뜻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망하거나 돈이 없어 쩔쩔맨다는 뜻도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 안에 들어가 그 은혜에 잠기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영혼의 안위와 평강을 맛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긍휼을 제대로 한 번이라도 맛을 본 자는 자꾸만 그 긍휼을 또 찾게 된다. 한시라도 그 긍휼이 떨어지면 자신은 또 다시 세상에서 헛걸음을 디딜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예를 든 박 장로님처럼 이웃에게 예수님의 긍휼을 제대로 베푸는 자는 그 긍휼의 풍성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 긍휼을 이웃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미쳐 주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되고, 또 자신의 사정이 힘든 자는 더더욱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을 찾고 또 찾게 된다. 하나님의 긍휼의 넓이와 깊이와 길이를 조금씩 알아갈수록 그 긍휼에 더 빠져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기도하면 더 기도하고 싶고, 찬양 부르면 더 찬양 부르고 싶고, 말씀 보면 더 말씀 보고 싶어진다.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면 자신도 또한 긍휼을 더 갈급하게 원하게 되며 하나님은 당연히 긍휼을 무한정으로 베풀어주신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신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소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축복이다. 나아가 긍휼은 신자가 긍휼을 또 찾게 만들고 하나님은 또 채워주므로 긍휼 그 자체가 신자의 행복이다. 본문의 뜻은 바로 이것이며 신자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도 평생을 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