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화평하지 못하는 이유

조회 수 3570 추천 수 383 2005.08.15 17: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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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44) 팔복강해(18)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불신자 남편의 불만

신자 아내를 둔 불신자 남편의 불만이 무엇이겠는가? 예수 믿고 교회 나간다는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보다 다른 이유가 훨씬 많다. 예수를 믿었으면 남편에게 더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 새벽 기도 갔다 왔으면 남편 아침 밥을 더 정성껏 차려 주어야 하지 않는가? 아이들에게도 하나님 같은 사랑으로 뒷바라지 해야 할 것 아닌가? 집안 정리도 더 깨끗하게 해야지 집구석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왜 구역예배다, 심방이다, 전도다 하고 싸 돌아 다니는지 꼴도 보기 싫고 도저히 이해도 안 된다.  

남편이 혹시라도 그런 불만을 내비칠라 치면 하나님의 일 하는데 격려는 못해줄 망정 방해하고 있다고 아예 하나님의 원수인양 몰아세우는 데는 딱 질색이다. 다 아이들 공부 잘하고 당신 사업 성공하라고 내가 이 고생하는 것이지 내 혼자 좋아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아내는 사실은 종교 생활을 하고 있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불신자 남편이 기대하는 것 같이 해야 한다. 쉬운 예로 부부싸움을 전혀 안 할 수는 없지만 그 횟수는 점차 줄어들어야 한다. 부부 중의 어느 한쪽만 신자라면 당장에 부부가 같이 교회에 나가기 이전에 본문처럼 화평케 되는 모습이 나타나야 제대로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방인 선교의 발상지이자 거점이었던 안디옥 교회에서 신자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행11:26) 되었다. 이 때 ‘그리스도인’이란 원어로 따지면 ‘작은 예수(little Christ)’라는 뜻이다. 그만큼 모든 면에서 예수를 닮았고 또 그대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 십자가에 죽으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일이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도 다 십자가에서 순교했기 때문에 크리스찬으로 불리워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목적과 결과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화평’이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 소망이 없고 하나님이 없던 자”(엡2:12)들을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엡2:14,16) 하셨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 구분 없이 모두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 그들끼리도 서로 하나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신자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고후5:17)로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고후5:18)을 맡은 자다. 진정한 크리스찬이란 자기가 속한 가정, 직장, 학교, 교회, 사회, 민족, 국가 등 어떤 공동체에서나 항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화평케 하는 자를 의미한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교회

그러나 불행하게도 불신자들이 교인을 볼 때 어떤 이미지를 연상하는가? 모였다 하면 서로 싸우고 나눠지는 자들이다. 불신자와 신자, 불신자와 불신자끼리의 담을 허물기는커녕 신자들끼리조차 오히려 담을 쌓고 원수처럼 싸우니 도대체 어떻게 된 연유인가?    

물론 교회도 다른 모든 인간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죄인들이 모이지  완전한 자가 모인 곳은 아니다. 불완전한 죄인끼리 모이면 언제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또 교회 다니는 신자 가운데 진정한 크리스찬은 교회마다 다르겠지만 사실 20-30%도 안 될지 모른다. 나머지 70-80%는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가 아니라 교회의 멤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시기하고 싸우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변명과 핑계가 신자의 잘못에 대한 정당한 이유는 될 수 없다. 그 핑계대로 따지자면 불완전한 죄인이 모인 교회 안에 막힌 담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자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는 자일진대 20-30%나 되는 참 신자는 그 동안 도대체 담을 허물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아예 손을 놓고 방관만 했는가 아니면 혹시라도 담이 쌓여져 가는 것을 알게 모르게 거들은 것은 아닌가?

교회의 분쟁은 주로 어디에서 발단되는가?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모이는 제직회다. 그것도 제직회를 시작할 때에 찬양하고 말씀 보고 기도를 했는데도 그렇다. 제직을 맡을 때 가장 기본적인 자격 조건도 거듭난 신자라는 고백을 한 세례 교인 이상이어야 한다. 거듭난 크리스찬, 즉 작은 예수로 불리워야 할 자들이 먼저 분쟁을 시작하고 키우고 급기야는 분열까지 간다.

교인들이 거창하게 직장과 사회와 국가와 민족을 화해시키려 들기 이전에 교회 안에서라도 화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신자들 중에 교인끼리 화목은 둘째 치고 부부, 부모 자식, 형제 친척, 등 가장 가까운 사람 사이에도 원수처럼 지내는 자가 수두룩하다. 그것도 거듭난 신자임에 틀림 없어 교회에서 아주 존경 받는 믿음이 좋다는 사람까지 그렇다. 도대체 교인마저 남들과 화평하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역설적이지만 그 원인은 신자들이 자꾸 스스로 남과 화평하려 들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리 모두 남과 원수 사이로 지내길 원하는 자도 없고 또 일부러 그렇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자기 믿음이나 소원과는 상관 없이 이상하게 관계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담이 쌓이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심지어 화평하려고 오고 가는 말에 오히려 상처가 덧나는 경우마저 있다.

인간은 말로서 알아 먹고 고치는 존재가 절대 아니다.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야 그나마 조금 정신을 차리는 고집 불통이다. 솔직히 우리 모두 어렸을 때 부모님의 훈계, 자랄 때에 형제나 친구의 충고, 결혼 후의 배우자의 잔소리에 마음이 녹아지고 그대로 따라서 고친 적이 많은가 오히려 반발하고 미워한 적이 많은가? 내 자신이 그러할진대 남은 나와 똑 같거나 더할 것이라고는 왜 생각 못하는가? 직접 행동으로 남을 섬기는 데도 한계가 있다. 시간과 경제적으로 쪼들릴 때는 화평하려는 마음은 있어도 도저히 실천이 안 된다.    
        
화평을 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

신자가 화평케 하지 못하는 아주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모든 경우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유다. 신자 스스로 자기 자신과 화평하지 못한 자는 남과도 화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평강을 유지 하지 못하고 내 속에 평화가 없는 자가 남과 평화를 이룰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와 불화 한다는  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열등감, 기질이나 성품 상의 결점, 의지력의 결핍 등과는 다른 차원이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된 신분, 위치, 소속, 특권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해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대부분의 신자가 작은 그리스도가 되려고 노력은 하지만 이미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있다는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후에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바뀌었고 또 그 예수님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어 있지 않아 “그저 주여 믿습니다”만 연발하고 있다. “믿습니다 아멘!” 하여 신자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었기에 이미 신자가 된 것이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믿기 전과 달라진 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에 감사하는가? 기도하면 암 같은 불치병이 낫는 것인가? 죄송하지만 심지어 무당도 굿을 하면 죽을 병에서 고쳐 주기도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신자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권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신자란 자기 속에 보배 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이미 성령의 전으로 바뀐 자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게”(롬8:1) 된 신분으로 바뀌었다. ‘결코’ 없다는 것은 단순히 없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뜻이 아니다. 절대로 두 번 다시는 없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정죄에서 영원토록 해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예수를 믿으면 절대 지옥에는 안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단순히 예수 믿어 천국 가게 되었다는 뜻으로 그치지 않는다. 로마서 8장에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신분의 특권을 어떻게 결론짓고 있는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7-39)

당시 유대인들은 환난, 곤고, 핍박이 닥치면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율법을 어긴 적이 있는가? 이웃에게 구제를 등한히 했는가? 성전 제사를 잘못 드렸는가? 기도와 금식을 정해진 때에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들은 이런 죄책감이 들 때 잘못된 행동, 말, 생각을 회개하고 고치려 들지 않고 하나님 쪽에서 신자에 대해 뭔가 흡족하지 않아 기분이 상했던 일이 있었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성경은 신자에게 환난이나 핍박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에 환난이나 핍박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자식을 초달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징계의 성격으로 오는 환난과 곤고는 있지만. 죄에 대한 형벌의 성격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징계도 하나님이 신자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를 벌주기 보다는 구하기 위한 것이며 그 배경에 있는 당신의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대신해 죽이실 만큼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떤 피조물, 악의 세력, 죄악 등이 방해를 해도 절대로 줄지 않는다. 그래서 로마서 8:1은 한 마디로 하나님은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니 감히 세상의 어느 누구도 너를 정죄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네가 죄를 지어 내가 징계를 할지라도 너를 향한 내 사랑은 절대 변함이 없는데도 왜 너는 불안해 하느냐?”라고 묻고 있는 것과 같다.

졸지에 전 자식과 모든 재산을 잃고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악창으로 괴로워하는 욥에게 세 친구는 “네가 지금 그 꼴이 뭐냐?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아서 벌 받았지? 네게 죄와 허물이 없으면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허용할 리가 없지 않느냐?”라고 다그쳤다. 또 불신자 남편은 신자 아내에게 “새벽 기도 40일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가 기도한 꼴이 겨우 이게 뭐냐? 예수가 우리 밥 먹여 주냐? 차라리 그 시간에 가게 문 일찍 열고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것이 낫지?”라고  구박한다. 그러나 신자가 된 특권은 어느 누가 그런 주장과 반발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남편이 야단치더라도 속으로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내 교회 가는 것을 말릴 수는 없어 그래 예수가 밥 먹여 준다”고 반발하면서도 신자니까 끝까지 교회를 가야 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겉으로는 남편에게 고분고분하게 굴든 같이 맞대놓고 싸우든 더욱 자기 믿음만 지킬 결심을 단단히 하라는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그렇게 자신이 없고 약한 차원이 아니다. 남편의 잔소리 때문에 감정이 상하고 믿음이 흔들리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남편의 구박 가운데 들어 있는 “예수가 밥 먹여 주냐 차라리 그 시간에 돈을 더 벌자”는 그 사상과 생활 방식에 절대 반대하고 그렇게 살 뜻은 죽어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란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나 대신 십자가에 죽이신 그 사랑 안에 나는 영원토록 잠겨 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환난과 시련도 나를 넘어뜨리지 못한다. 이제 이렇게 바뀐 신분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며 그 특권을 놓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확신하며 실제로 그렇게 사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환난 가운데도 염려 대신에 소망을 키우며 평강을 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자기 자신과 화평하는 것의 본질이다.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룬 신자는 이제 이웃과의 화평도 다른 각도로 접근하게 된다. 예수 믿는다고 닥달하는 남편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임을 믿는다. 단지 나에게 비췬 예수님의 광채가 아직 그에게는 비취지 못해 지금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도리어 마음이 아프고 불쌍해진다. 믿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해는커녕 잔소리만 한다고 같이 따지거나 교리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언젠가는 틀림 없이 하나님이 그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서 신령하고 거룩한 당신의 자녀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눈물로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린다.남편이 바라는 대로 새벽기도나 구역공부 갔다 오면 예수 믿는 주부로서 자녀를 돌보고 남편을 시중 드는 일을 정말 정성껏 더 잘하게 된다.

나아가 자신이 남편과 화평하기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남편을 하나님과 먼저 화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상적인 아내라면 남편과 화평하게 지내길 소원하고 또 그렇게 노력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교회 가는 문제로 서로 싸우는 것도 따지고 보면 화평하자는 것이지 일부러 사이 나빠지고 헤어지자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문제는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성의와 열심만으로 다른 사람과 화평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한 경건한 노인의 고백
        
존 맥스웰 목사가 한 신실한 노인 신자에게서 이런 고백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가 청년 때는 “이 세계를 변화시킬 능력과 은혜를 달라. 그러면 화목케 하는 직책을 열심히 수행하겠다”는 기도를 했다. 중년에 와선 “내 주위의 가장 가까운 사람 단 한 명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의 내용이 바뀌었다. 그러다 노년에 와선 “남을  변화시킬 능력보다는 저부터 먼저 변화시켜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만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은 그냥 두고 자기만 먼저 바꿔 달라는 기도를 했는데도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변화되었다. 그래서 비록 지난 세월 동안 시간을 낭비하긴 했지만 말년에나마 인생을 헛되게 살지 않게 된 것에 감사한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대형 교회로만 신자가 몰리는 까닭이 무엇인가? 담임 목사님의 말씀이 좋고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그 많은 회중 속에 들어가 숨으려는 뜻도 아주 많다. 남과 관계를 맺기 싫고, 이웃과 화평하기 귀찮고. 남에게 상처 받고 싶지 않다는 심보다. 남을 섬길 여유와 시간이 없을 뿐 아니라 내 코가 석자라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본인이 자신과 화평하지 못했다는 표시일 뿐이다. 인간을 화평하게 하는 자로 바꿀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뿐이다. 물론 사단이 부단히 그 일을 방해하지만 그래도 최종적으로 그 사랑을 받아 변화되고 안 되고는 본인의 책임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화평시키는 힘을 막는 자는 자기 자신 외는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바뀌어진 신분, 위치, 특권에 관한 확신이 없어 교회 안에서조차 사람에게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시련이 끝나면 평안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기실 그것은 착각이다. 잠시 잠간 동안 편안해질   뿐이다. 참 신자라면 환난 중에도 얼마든지 참 평안이 생긴다. 예수 안에 있어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끊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찾아 자신과도 화평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꾸 주위 환경이 화평해지기만을 간구한다.

신자가 시련과 환난 중에 화평을 유지하지 못하면 평생을 가도 절대 참다운 화평을 맛보지 못한다.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피조 세계에 속한 모든 것은 부패하여 왜곡되어 있고 또 그 속에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절대 환난이 끊이지 않는다. 신자 개인의 믿음으로 바뀔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의 본질은 시련을 끝내는 실력이 아니라 환난 중에 하나님과 화평하여 자신과 이웃과도 화평을 이뤄내는 실력이다.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에 천사들이 이 땅에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 가운데 평화가 있다고 찬양 했다. 또 그것이 하늘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육신하신 하나님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 죄인들과 당신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담을 통과한 자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당신께서 무한한 사랑으로 끝까지 돌보신다. 이 십자가의 영광을 제대로 확신하는 자는 항상 자신과 화평하고 또 그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막힌 담을 허는 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이 화평케 하는 자의 복 앞에 어떤 복을 말씀하셨는가? 하나님을 보는 축복이었다.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이 화평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신도 자기와 화평을 이루었고 또 남과도  화평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왜 예수 믿는 것이 당당하고 자신이 없는가? 왜 교회에서마저 서로 상처 주고 시기하고 분쟁하여 나눠지는가? 종교는 흘러 넘치는 데 제대로 된 십자가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불신자 남편과도 종교 문제로 다투지 신앙으로 화평하려 들지 않는다. 남편을 정말 하나님과 화평시키려는 뜻은 없고 어떻게 하든 교회로만 끌고 가든지 자기 종교 생활에 방해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갈수록 신자들이 불신자들 앞에 고개를 못 들고 있는데,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힘이 빠지고 그 의미가 퇴색되었는가? 그럴 리는 절대 없지 않는가? 십자가 안에서 제대로 화평을 누리지 못해 자신을 스스로 정죄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이단을 두고 “스스로 정죄한 자”(딛3:10,11)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 안에 있다면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자라는 뜻이다. 예수 십자가 안에 들어 오지 않았기에 혹시 하나님에게 잘못 보인 것이 있는가 염려하여 그저 열심과 정성을 바쳐 복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이다. 신자마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정죄한다면 단지 입술로 주여주여 하는 것 빼고는 이단과 다를 바 무엇이 있는가?

진짜로 화목하는 직책이 무엇인지 알고 실천하는 신자는 스스로도 화평을 누려 넉넉히 승리한다. 그가 속한 공동체는 하나님의 왕국으로 변한다. 하나님과 화평 속에 모든 해결책이 다 들어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그 화평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과 화평 하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 자신과 그가 속한 공동체에 하나님과의 화평이 더더욱 넘칠 수 밖에 없다. 지금 당신은 이런 복을 누리고 있는가?


김순희

2011.02.04 13: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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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화평을 위해 우리의 방법은 이웃의 비위 맞추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것들이지만 그것을 들어 줌이 화평이라 착각했더랬습니다.

진짜로 화목하는 직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 가운데 푸~욱 빠져
살아가며 모든 이웃들이 그 사랑 가운데 또 푸~욱 젖어 살기를 소원하도록 기도함이 바로
화평의 직책임을 이 시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날마다순종

2020.08.02 19:08:56
*.14.99.253

존 맥스웰 목사의 "저부터 먼저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라는 노년의 기도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인간을 화평하게 하는 자로 바꿀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뿐이다. 물론 사단이 부단히 그 일을 방해하지만 그래도 최종적으로 그 사랑을 받아 변화되고 안 되고는 본인의 책임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화평시키는 힘을 막는 자는 자기 자신 외는 없다는 것이다" 말씀에 신앙을 돌아보며 점검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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