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3:19-22) 구원의 확신이 없는 또 다른 이유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19-22)

 

모순된 신앙

 

예수 믿은 지 오래인데도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수시로 흔들려서 믿음으로 사는 삶에 활력이 떨어진 신자가 꽤 많습니다. 심리적으로 예민한 기질이 아닌데도 혹시 심판받지 않을까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는 신자들마저 있습니다.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워 보여도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그 해결책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평생 지은 죄를 죽은 후에야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결산 받는 행위 구원을 믿는 종교인이나 불신자에게 이 문제는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감히 구원을 확신하는 것부터가 하나님을 모욕 거역하는 죄라고 여기므로 그런 용어가 있다는 사실조차 잘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구원 확신은 기독교 신자만이 그것도 행위 구원을 철저히 부인해야만 논의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그 용어의 의미부터 생전에 자기가 하나님께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죽기까지 평생토록 그런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해답은 거의 도출된 셈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개인별로 다르겠지만, 구원 확신이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입니다. 자기 신앙을 어떤 방식으로든 또는 일부 측면이라도 행위 구원의 맥락으로 접근, 이해, 적용,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나 생각은 여전히 율법 아래 묶인 모순된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자기 믿음을 착하게 살아가는 일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많은 신자가 지닌 이런 모순된 믿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 구절인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에서부터 그 실마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논리적으로 조금 불합리합니다. 율법은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에만 미친다고 전제해 놓고, 이어서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한다”고 그와 상반된 뜻의 말씀이 따릅니다. 율법이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차원을 넘어서 심판으로까지 이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상 모순이 없어지려면 온 세상이 율법 아래에 있었거나, 아니면 모든 입과 온 세상이라는 표현이 이스라엘을 과장한 의미여야 합니다. 앞뒤 문맥상 아무리 따져도 그 둘은 타당하지 않으므로 과연 바울이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실패한 인간의 의

 

로마서 서두에서 본문 바로 앞 3:18까지의 내용을 한마디로 줄이면, 아담의 원죄 이후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진술입니다. 결론 부분인 3:9-18절에선 다윗 시편의 여러 구절을 인용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고, 의인도 깨닫는 자도, 하나님을 찾는 자도 두려워하는 자도 없다고 선포합니다. 대신에 모든 이가 죄짓는 데는 능숙해서 파멸과 고생에 빠져서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의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대해서 그 앞에서 이미 설명해 놓았습니다. 먼저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2:12)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즉 율법과 관계없이 범죄한 자는 모두 심판을 받기에 심판의 유일한 기준은 죄입니다. 이어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13절)라고 하나님의 구원 원리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죄라면 구원 기준은 당연히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또 본문이 행위 구원을 지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은 마땅히 죄에서 용서받는 것이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의미입니다. 율법을 가졌고 일상적으로 율법을 잘 지켰던 이스라엘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뜻도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은 율법과 무관하게 죄와 의로만 따지니까, 선민인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서 율법을 지키는 그 사회의 관습대로 따랐다고 무조건 구원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듣는 것보다는 행하는 것을 강조했는데, 반드시 율법 전부를 온전히 행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듣다’라는 히브리 단어 ‘쉐마’의 뜻처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신6:5) 차원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도 진심으로 율법 전부를 온전히 지킬 수 없었기에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본문도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20절)라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본성적 양심에 따라서 율법의 행위를 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14,15절) 이 또한 구원의 가능성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소지하고 지키려고 노력한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의에 전혀 미치지 못했는데. 율법 없는 이방인이 아무리 자기 양심대로 살았어도 구원받는 의에 도달하기에는 더더욱 역부족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모순처럼 보였던 19절의 뜻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택하여 그 민족의 역사와 개인의 삶에 직접 개입해서 어느 민족도 알지 못하는 큰 권능으로 보호 인도해 주었습니다. 당대의 다른 어떤 종교도 가르치지 못했던 고차원의 도덕률인 율법도 계시해 주었습니다. 현대의 발전된 윤리로 따지면 상대적으로 저급한 수준인데도 아무도 온전히 지키지 못했기에 모두가 심판받을 죄 아래에 처했습니다. 본성적 양심을 따라 살려고 노력했던 이방인의 처지도 똑같았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내린 결론대로 구약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실 때나 이방인에게 본성적 양심을 심어주실 때, 신학적으로 따지면 양심에 따라서 살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실 때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양심을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주셨다는 뜻이 됩니다. 문맥상 유대인의 율법이나 이방인의 양심이나 근본적으로 도덕률이므로 본문의 율법을 도덕으로 대입하면 그 뜻이 확실해집니다. 

 

어떤 인간도 도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으니까, 하나님으로선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는 행위 구원이 결코 성립될 수 없다는 진리를 모든 인간더러 깨닫게 해주려는 뜻이었습니다. 인간이 착하게 살고 싶어 하고 또 그렇게 노력하며 하나님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누구라도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이 따로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도 당연히 구원해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당신의 은혜와 권능을 그렇게 많이 누리고도 죄로 타락해 있는 인간의 비참한 영적 실상을 드러내는 본보기로 세우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율법이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된다고 해놓고 후반에선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는”(19절b) 뜻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오늘날 불신자들이 자기 양심에 따라서 살려고 평생 노력해 봤으나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는 잘 알기에 죽기 직전에는 다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일을 크게 두려워하는데 바로 그것이 이 성경 진리를 입증해 줍니다. 

 

하나님의 의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인류의 영적 상태는 구약성경에 당신의 종으로 택해서 구원의 은혜를 준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의에 합격한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즉 그리스도의 의로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선언합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이 구원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구원 원리가 율법에서 새롭게 다른 것으로 바뀐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한글 성경 개역과 개정본은 “율법 외에 한 의”라고 번역해서 마치 하나가 더 추가된 것 같이 여겨지나 조금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어로는 ‘율법과 관계없는’ 의라는 의미이고 또 하나라는 개수를 나타내는 부정관사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근의 표준새번역은 “율법과는 상관없이”라고만 번역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구애받지 않는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의에 따라 이뤄지는데 그 원리는 영원부터 종말까지 변함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도덕적으로 따져도 평생토록 죄에서 해방되지 못하기에 오직 당신의 의로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당장 저부터도 솔직히 초등학교 1학년 바른생활 교과서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율법과는 별도로, 바꿔 말해서 시대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하는 도덕률과는 전혀 상관없이 본문 결론대로 십자가에 실현된 그리스도의 의를 온전히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는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의는 그리스도가 오기 전부터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21절b)인데 대표적인 증거 각기 하나씩만 들어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30:6)라고 합니다. 모세 율법부터 도덕을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어서 생명을 얻게, 즉 구원해 주신다고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4:4)고 행위가 아니라 진심으로 여호와를 사랑해야 당신의 백성이라고 엄숙히 선포했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10,11)고 십자가 복음의 정수를 입술로 고백했습니다. 요컨대 구약시대에도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움에 따라서 은혜로 베풀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평강의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만 얻을 수 있었음에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무도 미처 몰랐습니다. 아니 조금만 살피면 알 수 있었는데도 완악하게 거부한 것입니다. 모두가 원죄 하에서 그 영혼이 사탄에 미혹되는 바람에 자기들 정욕대로만 살고 있었으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직접 가르쳐서 알게 해주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죄에 빠져서 당신과 원수 되었음에도 그분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는지 십자가에서 실현해 보인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가?

 

오늘날 신자도 십자가에 실현된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알지 못하면 평강의 길에 들어갈 수 없기에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구원받아야 할 죄를 온전히 모르기에 자기 죄가 완전한 씻음을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그래서 평강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도덕을 지켜서 구원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면 구원받아야 하는 죄도 일차적으로 윤리적인 죄가 아니라는 뜻이고, 실제로 원죄부터 그러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서 이브와 서로 사이좋게 나눠 먹었기에 윤리적으로 따지면 부부간의 사랑을 실현한 아주 선한 행위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것이 원죄였지만, 단순히 그분의 계명을 어긴 종교적인 죄도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아직 종교 체계는 물론 그런 개념조차 인간에게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최초 인간 부부가 서로 소통 교제하며 사랑하면서 지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부모로 모신 가족과 같은 관계만 있었습니다. 

 

선악과 금령의 근본적 의미도, 하나님이 당신의 실체로서 아담과 이브와 함께 할 수 없으니까, 당신을 상징하는 그 과일을 보면서 한 시도 그들 곁을 떠나지 않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보증하는 의미로 에덴동산의 모든 관리를 그들의 임의에 완전히 맡기지만, 선악과만 따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 동산의 실제적 주인이고 또 가족 같은 관계에서 아버지라는 사실만 절대로 부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사탄의 꾐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는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 전혀 필요 없고 오히려 방해만 되니까 쫓아내고서 자신들이 동산을 독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가족 같았던 관계가 완전히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최초 인간 간의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그분에게서 어떤 선한 것도 공급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최초 인간은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수치심, 공포심, 불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미 그렇게 엎어진 결과를 원상으로 회복시키려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처분에 달렸습니다. 아담이 사탄에게 넘어간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선 인간에게 당신의 온전한 사랑을 다시 체험시켜 확신토록 해주어야 했습니다. 타락 이전에는 일상적으로 그냥 그분의 넘치는 사랑 가운데서 살았으니까 그 사랑의 귀함이나 의미를 제대로 몰랐습니다. 이제 그 사랑의 손길을 뿌리치고 보니까, 비유컨대 아들이 아버지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가출하고 보니까, 정말로 자신들에게 절실한 것은 오직 그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사랑뿐임을 저절로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탄이 이미 그 영혼을 망가트렸기에 아담과 이브는 큰 두려움에 휩싸여서 자꾸 숲속으로 숨어 들어갔는데, 하나님 쪽에서 먼저 그들을 찾아와 주었습니다. 모든 경과는 물론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다 아셨지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창3:9) 애타게 불렀습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내 사랑의 품인데 왜 엉뚱한 곳으로 자꾸 숨으려 드느냐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또 다 알고도 짐짓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묻자,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했던 최초 부부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그 전에 상대에게 감추고 싶은 자신의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부터, 하나님을 등지니까 죄로 추악해진 자신의 실체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나니까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부터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렇게 상실된 사람끼리 만나니까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참사랑은 사라지고 서로 분리하려는 죄악에 완전히 묶여버렸습니다. 부부끼리 과일을 사이좋게 나눠 먹었던 윤리적 의로움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배우자인데도 상대를 시기하고 다투는 윤리적 죄로 완전히 탈바꿈해 버렸습니다.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 사실은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한 바대로, 하나님은 그들의 파괴된 자아부터 바로 잡아서 다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짐승 제물을 대신 죽여서 그들의 죄를 사해주었고, 손수 그 가죽으로 튼튼한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들과 항상 함께할 것이라고 재확인하면서 이제 다시는 당신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아니 영원한 사랑의 징표인 가죽옷을 입고 있으니까 사실상 그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담 때부터 하나님의 구원 원리는 오직 당신의 사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라는 것 하나뿐입니다. 최초의 죄에서 구원하는 원리가 그것이었다면 그 후의 죄에서 구원 원리도 그와 똑같아야 합니다. 죄의 본질이 하나님 그분을 외면 배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구원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죄인인 자식과 다시 부자(父子) 관계로 복원하는 작업입니다. 

 

아담 이후의 인간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인해 자신은 선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므로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라는 자아만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구약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신약의 신자나 불신자나 죄를 지어도 스스로 윤리적으로 절제하고 선을 행하여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도덕적 영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오만과 고집입니다. 그런 구원 개념으로는 아무리 평생 노력해 봐야 결국 심판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고도 그 준행에 실패했다는 역사로 증명되었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바입니다. 

 

아담은 사탄의 거짓에 속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고, 그 후의 인간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풍요와 안락을 주지 않고 수시로 고난을 허락하니까 그 사랑을 끝까지 완악하게 의심했습니다. 인간이 원죄에 묶여 있다고 해서 항상 악을 행하거나 그런 생각을 지닌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대책 없는 의심을 지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가장 먼저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눈으로 보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요1:18)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갖게 했습니다. 

 

특별히 당신의 사랑에 대해서 오해하니까 아담에게 가죽옷을 손수 지어 입힐 때로부터 그 사랑이 전혀 변함없다고 알게 해주려고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대속 제물로 받은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그 사랑을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다시 회복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런데 그렇게 영접하게 되는 것부터 모세 율법에서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먼저 부어주시는 은혜에 따른 것이며 인간 사회의 신분 위치 권세 문화 지성 종교와 아무 관계가 없는 차별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요한도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3)고 밝혔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것이 죄이며, 그분 쪽에서 바로 잡아서 당신의 자녀로 다시 품어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아무 자격 조건 실력 공적 없어도 당신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시는 구원이라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구원을 받는 데에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로, 성령의 간섭에 따른 반응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결론 내린 것입니다. 

 

구원 확신이 없는 이유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진짜 이유가 이제 완전히 밝혀졌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친자녀가 되어서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는 구원 체험을 아직 겪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또 자기가 구원받아야만 할 죄를 행동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윤리적 죄로만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참 신자가 되지 않았으므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데 믿음을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그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온전히 이해하고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정작 문제는 그런 원리를 제대로 알고 심지어 중생의 체험이 있음에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경우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둘입니다. 첫째는 현실적 환난이 겹치니까 그리스도의 의를 잠시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가보다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 환난의 원인이 사실은 거의 신자 자신의 실수, 잘못, 고집, 교만, 죄악 때문임을 잘 모릅니다. 신자에게 아무 잘못 없이 정말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이라 쳐도 심판일 리는 없으며 그분의 뜻은 거룩하고 완전합니다. 신자의 믿음을 정금처럼 성숙시키려는 훈련이며 징계가 없으면 친자녀와 친부모의 관계가 아닙니다. 나아가 그런 환난으로 이루실 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신앙생활을 죄 안 짓고 착하게 사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신자라면 그렇게 살아야 하나 불신자도 그런 노력을 합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물론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차원도 불신자와는 달라야 합니다. 모든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졌다는 맥락으로 접근 이해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자신의 성화 과정이나 수준을 그때그때 일어나는 개별적인 사건, 행동, 말, 생각 등에 따라 단편적 수직적 일회적으로 그것도 도덕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이런 죄를 저지르고도 과연 신자라고 할 수 있는지 자책감, 죄책감, 불안감, 수치심이 잠시는 들 수 있어도 그것에 묶여선 안 됩니다.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피해서 숲속 깊이 숨었을 때의 모습입니다. 구원도 그렇지만 성화를 자신의 의로 이루려는 노력도 끝까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말로 헛되고 헛된 수고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어떤 죄인도 차별하지 않는다면, 죄의 종류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자도 개별적인 죄로 자기 의나 믿음에 스스로 차별을 두어선 안 됩니다.

 

아들이 한두 번 잘못했다고 그 관계를 끊자고 덤비는 아버지는 인간 세상에도 없습니다. 또 아들도 자기가 잘못할 때마다 아버지가 야단치거나 호적에서 파낼 것이라 무서워한다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전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는 독선적 도덕 선생 아니 심판관이며, 아들은 아버지의 율법에 묶인 학생을 넘어서 종입니다. 참된 자식이라면 당연히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히 노력해서 훌륭한 어른이 되려고 하고 또 그래서 죄도 안 지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평생토록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하는 마라톤처럼 지루하면서 별로 신나지 않는 여행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거룩하게 살면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외롭고 척박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평생 알지도 못하고 신자만이 걸을 수 있는 참 평강을 얻는 길입니다. 세상만사를 당신의 뜻대로 거룩하게 주관하는 하나님 아버지가 한시도 떠나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로 맺어진 그 관계가 절대로 수정 포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독생자 생명과 맞바꾸어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큰 사랑은 한시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십자가 보혈의 피로 맺어진 그 관계를 하나님 쪽에선 절대 끊지 않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22)라는 약속을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입니다. 

 

윤리적 맥락에서 자기 믿음의 수준을 개별적으로 가름하는 것도 엄격히 말해서 눈앞의 현실적 평안을 바라는 것과 동일한 신앙입니다. 영적 불안이나 의심과 도덕적인 죄책감도 자신의 정서를 괴롭히는 고난으로 여기므로 어떻게든 그런 것들에 휩싸이기 싫다는 뜻입니다. 빨리 선을 행해야만 이런 기분 나쁜 상태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기에 일종의 행위 구원 적인 맥락입니다. 

 

가장 좋은 믿음은 그래서 평생토록 신자가 그리스도의 의 안에 거하여서 구원의 확신에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이 예수 십자가에 실현한 권능과 사랑을 누리며 자기 삶에도 실제로 적용 실현하는 것입니다. 너무 거창하게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윤리적 죄를 당연히 짓지 말아야 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죄의 본질과 근원부터 따져야만 죄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언제 어디서든, 어떤 환난 중에도 진정으로 감사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첫째 항처럼 평생토록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평생 묶여 있기에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진리를 잊지 않는 것이 신자가 하나님께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의로움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때로 윤리적 죄로 넘어져 죄책감이 심지어 구원의 의심마저 살짝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의는 시기적으로도, 즉 예수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도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죄에 넘어질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실현된 하나님의 의에 온전히 맡기고 안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사탄에 특별히 자기 속에 남은 죄의 본성에 넘어져도 예수님의 차별 없는 은혜만 소망하면서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어야 가장 좋은 믿음입니다. 

 

(6/16/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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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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