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13-15)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감나지 않는 신자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구원 토론 (8)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3-15)
초대교회 신자의 믿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면서 구약에 능통한 그가 이해하기 쉽게 모세의 놋뱀 사건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정복 직전까지도 당신을 원망한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내 물려 죽게했으나, 진정으로 회개하고 순전한 믿음으로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다 살려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얼마 후에 십자가에 달릴 당신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해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육신의 생명만 낫게 해준 모세의 놋뱀과 달리 주님의 십자가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 주님은 인간 랍비라면 도무지 입에 올릴 수도 없는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구약 성경이 예언한 마지막 때에 있을 영의 부활이 지금 너에게도 가능하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예언을 인용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하실 여호와를 믿으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주체가 되어서 그 진리만 간단하게 선포함으로써 당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었습니다.
나아가 당신만 유일하게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고 했는데 아무도 모르는 하늘의 일을 당신께서 알려주겠다는 뜻입니다. 그 일은 본문대로 바로 당신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늘의 비밀을 가르치고 영생을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뿐입니다. 주님은 지금 당신이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인간 중재자가 아니라, 바로 구원를 주는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사칭하는 것은 그분을 모독하는 죄로 유대 사회에선 사형에 처해집니다. 주님이 온전한 인간으로 그치면 아무리 유대 사회와 종교를 개혁하고 싶은 열정이 컸다 쳐도 유대인이라는 그 본성때문에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내용을 가르친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도 주님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가 처음 한두 번만 주님께 반문한 후로 찍소리도 못했던 까닭입니다. 주님의 표정과 말투에서부터 신적 권세가 느껴진 위에 그 내용에서 완전히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됨으로써 실제로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신령한 모습으로 하늘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주님이 감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신성모독의 말씀을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하나님임을 온천하에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도 분명하게 입증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가 500명이 넘었고, 승천의 현장에 있었던 제자가 12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아 그 영이 거듭남으로써 예수님에 관한 믿음이 지금의 니고데모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확고해졌습니다. 주님이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당신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를 전혀 의심치 않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심어준 순전한 믿음인지라 자신들의 부활 영생도 확신하고서 그 격심한 핍박은 물론 순교까지 기꺼이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역사상 가장 순수했기에 오늘날의 신자가 반드시 그대로 본받야할 본이 됩니다.
십자가 죽음만 보는 신자
그러나 지금은 주님의 실체를 직접 만나볼 수 없고 성경의 문자적 기록을 통해 간접적인 접촉만 가능합니다. 그마저 무려 2천 년이라는 시간적 공백과 지구 반대편이라는 공간적 거리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믿어서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를 체험적으로 확신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 가르침의 의미마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신자가 제법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단순히 예수님이 인간이 고안한 처형 중에 가장 고통이 심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그 숭고한 희생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엄청난 멸시 박해 고통을 감당하신 분인데 어떻게 그분이 가르치는 대로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식의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얻는다고 하니까 문자 그대로 그분을 믿어보려고 의지적인 노력만 합니다. 그 결과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예수님 그분과 자기와 직접 연결되는 친밀하고도 개인적인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런 신자들의 주님과의 관계를 비유하자면, 생판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이 진 엄청난 빚을 대신 갚아주었으나 도무지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어서 곤혹스러워하는 꼴입니다. 당장에 빚이 없어진 것은 기쁘긴 하지만 그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으로 그치면 다행이나,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기분이 나빠지기도 합니다. 도대체 나와는 아무 일면식이 없는 자가 왜 내 빚을 갚아주었지, 혹시라도 불순하거나 숨겨진 의도는 없는가 불안해집니다. 나아가 내가 돈 벌어서 갚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너무 쉽게 끝나버려서 괜스레 자존심까지 상합니다.
비유가 조금 과장되긴 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인식을 정말 솔직히 까뒤집어 보면 이런 신자가 꽤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완전히 씻어주었기에 그 은혜를 믿으면 영생을 준다고 하니까 감사하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개인적인 교통이 생기지 않으니까, 심지어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온전히 믿어지지 않으니까, 매일 그분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는 간증은 아예 할 수 없습니다. 목사나 믿음 좋은 신자가 일상적으로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사실일까 단순히 종교적 공치사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런 신자는 본문에서도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후반부에만 초점을 맞춰 읽습니다. 자기도 어쨌든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영생을 얻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안도감은 가집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단순한 공식에 자기 믿음을 대입하고 치웁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는 예수님과 직접적이고도 개인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서 불안합니다. 말하자면 영생을 얻는 방법에만 신경을 쓴 것인데, 그래서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전반부 말씀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자가 왜 들려야만 했고 그렇게 된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그 인자를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있을 텐데도 말입니다.
앞에 든 비유로 돌아가면 내 빚을 대신 갚아준 그 사람은 전혀 모르고 빚이 갚아졌다는 결과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갚은 빚이 아니므로 혹시 은행 직원과 다툼이 생기면 채무 변제를 취소하고 다시 돈 갚으라고 요구하지는 않을지 불안해집니다. 과연 내가 받은 구원이 확실한지, 조금이라도 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는지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빚이 다 없어졌으니까 그동안 갚으려고 모아 놓은 돈으로 다시 사업을 시작해 큰 돈을 벌어야지 결심하고 시행합니다. 더 의로워지려고 자신의 의지로 노력하고 또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면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으리라고 기대합니다. 혹시 다시 빚지더라도 그 사람이 또 갚아주겠지라는 타성에 젖은 믿음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예수 믿으면 앞으로 짓는 죄도 다 용서 받을 수 있다니까 다시 죄를 지은들 아무 문제 없다고 예사로 여깁니다. 심지어 큰 죄를 지어도 큰 용서를 받을 수 있으니 더 좋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착각까지 합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십자가
다른 사람이 빚을 대신 갚아주어도 그 빚이 다 갚아졌다는 사실만 인식해선 온전한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은 당연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이유로 그 빚을 대신 갚아주었는지 정확히 알아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비추면 인자가 나무에 달려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자신과 체험적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주님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신분으로 나무에 달린다고 말했다는 진리를 되풀이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항은,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기에 당신께서 스스로 기꺼이 달리셨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사탄에 미혹된 유대와 로마의 당국과 그들에게 조종당한 유대 대중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으나, 하나님이신 주님이 그 모든 상황과 사건들을 주관하신 것입니다. 미리부터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했고 또 그대로 실현된 것이 절대로 어쩔 수 없어서 십자가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지금도 니고데모에게 그 일을 예언해 주고 있으며, 특별히 나무에 달린다는 표현도 구약 성경의 모세 율법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율법은 시신을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라고 하면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신 당신이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는다는 뜻이 되므로 더더욱 인간의 논리로는 말이 안 됩니다. 니고데모가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있는 또다른 까닭도 주님의 말씀이 이해도 안되며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원망하여 불뱀으로 심판 받았으나, 모세의 중보기도로 응답받은 대로 장대에 매단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나았습니다. 놋뱀은 움직일 수 없으니 불뱀을 죽였다는 뜻이 되며, 또 그 뱀의 죽음으로 백성들의 죗값이 다 치뤄졌다는 것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이 백성들의 죗값을 대신 다 짊어진 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백성의 죄를 놋뱀에게 다 물렸으니까 이제 당신의 그 사랑을 순전하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낫게 해준다는 뜻이었습니다. 물렸던 상처를 치료하고 살아나기 위해서 너희가 행할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그런 놋뱀의 역할을 당신께서 감당하겠다고 니고데모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죗값을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대신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으로선 백성들의 죗 값을 일일이 물어야만 하지만, 성자 하나님을 십자가에 죽여서 그 죗값으로 받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정작 저주받아야 할 인간 죄인은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품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당신의 독생자에게 모든 저주를 퍼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기 직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쳤습니다.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을 미리 아시고서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려고 짐짓 괴로운 척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 당시만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완전한 인간으로써, 즉 완전한 인성만의 상태에서 실제로 하나님이 쏟아부은 엄청난 저주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 느끼면서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완전한 죽음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간을 그분과 화해시키려는 한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골고다 언덕과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성자로서의 신성을 완전히 포기한 채 하나님의 죄에 대한 저주를 혼자서 몽땅 감당한 것입니다.모세의 놋뱀 사건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행할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는 것 외에는 하나도 필요엾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으려면?
이제 어떻게 해야 예수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밝혀졌습니다. 신자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서 주님과 같은 절규를 스스로 외치는 체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 교리를 지식적으로 수긍 동의하는 고백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실제로 자신은 오직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는 하나님의 불같은 저주를 받았다고 처참하고도 비통한 심정으로 절감 고백해야 합니다.
바꿔 말해서 믿음은 십자가에 달려 정작 죽어야 할 자는 자신임을 온전히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출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지금 당장 죽임을 당해도 전혀 억울하지 않는 철두철미 죄인임을 절대 부인할 수 없어야 합니다. 이런저런 죄를 많이 지었어도 사형에 처해질 정도는 아니라고 여기면 예수님을 절대로 온전히 믿지 못합니다. 만약에 자기 성품을 의롭게 가꾸어서 죄를 안 짓고 이웃과 더불어 착하게 살려고 신앙생활 한다면 골고다 십자가 근처에도 오지 않은 것입니다.
간혹 내 죄를 스스로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면 되지 굳이 다른 사람의 죽음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도 있습니다. 주님이 직접 모세의 놋뱀 사건과 비교한 것도 뭔가 미개한 원시 종교의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의 공로에 힘입어 의롭게 된다고 하니까 더 그렇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 사회의 종교적 다툼으로 인해 한 유대인이 로마에게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과 내 죄 사함과는 연결 고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단지 교리적으로 인류를 위한 숭고한 희생에 머물러선 그분과 개인적인 관계가 생길 리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을 조금 알기 쉽게 비유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선생님이 급한 일로 칠판에 숙제를 적어 주고서 잠시 외출 했습니다. 돌아와 봤더니 모두가 떠들고 노느라 숙제는 아무도 하지 않았고 교실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선생님으로선 학생 모두를 벌주어야 하지만 대표로 반장만 불러내어 몽둥이로 학생 숫자대로 때리고 나서 모두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반원이 반장에게 미안하긴 해도, 진정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지지 않으며 반드시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선 반장이 선생님의 지시를 정확하고도 엄격하게 전달하지 않아서 자신이 잘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반장 책임이라고 간주하는 자가 있습니다. 학급을 통솔하지 못한 반장의 책임도 크니까 맞아도 싸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거기다 잘못한 자기가 벌 받아야지 애꿎은 반장에게 벌 준다고 자존심도 상합니다. 말로만 야단쳐도 쉽게 고칠 수 있는데 굳이 반장을 피가 날 정도로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선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런 아주 질이 나쁜 선생의 말은 따라야 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그 후로는 아예 귀를 닫을 것입니다. 반장도 그 악한 선생에게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라고 불쌍하게만 여기고 치울 것입니다.
반면에 반장이나 다른 학생들이 잘했던 못했던, 자기 잘못이 컸기에 진심으로 뉘우치는 학생도 있습니다. 반장이 매를 한대 두대 맞고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낼 때마다 마치 자기가 맞는 것 같아서 너무 괴로울 것입니다. 그런 학생은 자신이 맞지는 않았어도 자신이 반장과 함께 연합해 그 벌을 직접 받고 있는 셈입니다. 자기 대신에 벌받은 반장에게 평생 빚진 마음을 가지고서 그후로는 선생과 반장의 말을 잘 들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지금 비유로 설명드린 것과 똑같은 두가지 효과를 낳는다고 주님 오시기 6백여 년전에 이미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모두가 그릇 행했으나 우리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켰는데, 그 때에 사람들은 주님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과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대조한 말씀이지만, 그 반응이 둘로 나뉜다는 뜻도 됩니다. 유대 지도층들은 주님이 유대 사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이라고 정죄하고서, 사실은 자기들 기득권이 침해 당할까 시기 질투하여서 미워해놓고선,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렸으므로 메시아일 리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그가 찔리고 상한 것이 바로 자기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여기는 순전한 믿음의 사람도 있는데, 바로 니고데모를 포함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주님에 대해 많이 오해했으나 오순절 성령이 와서 그 영을 거듭나게 해주자, 자신들의 그런 옛사람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았던 것입니다.
인간 제물로는 불가능하다.
남의 잘못을 대신해서 벌을 받거나 최소한 변명이라도 해주려면 그 위치나 신분이 그 사람과 동등한 자가 나서선 안 됩니다. 비슷한 수준의 이웃이 자기 집을 팔아서라도 채무를 대신 갚아 주겠다거나, 동회 서기가 사형이 확정된 죄를 사면해주겠다고 해선 아예 말도 안 된다고 코웃음칠 것입니다. 재벌 회장이 대신 빚을 갚아준다고 맹세하거나, 대통령이 사면 명단에 올렸다고 해야 겨우 믿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죗값을 동일하게 불완전하고 죄에 찌든 인간이 갚아선 절대로 완전한 대속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대속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은 인간 사이에 누가 더 의인이고 덜 죄인이고의 차이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똑같이 죄인이라서 아무리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의인이라도 대신해서 죄를 사해주는 효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처 박사를 최고의 성인이라고 칭하지만, 막상 그분들을 직접 상대한 주변에선 두 사람 다 아주 냉정하고 알려진 만큼의 의인이 아니라 심지어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자도 많았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받아 들이기 전의 모든 인간은 그 전체가 추악한 죄의 덩어리라고 선언합니다. 인간 사회의 윤리를 지키려는 자신의 의지적 노력으로는 그 죄를 씻을 방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죽기까지 그런 일이 불가능하므로 자신의 죽음으로만 그 죗값을 갚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인격체 전체가 철저하게 죽어 마땅한 죄인이기에 하나님이신 주님의 생명으로만 갚을 수있습니다. 따라서 평생토록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죄가 솟구치기에 자기 존재 전체가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절감하는 자만이, 십자가에서 정작 죽었어야 하는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겨우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선 인간 죄악의 처리를 공의롭게 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그 죗값을 반드시 물려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를 다 죽이고서 다시 아담의 계보를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야 하므로 성경에 기록된 역사가 되풀이 될 뿐입니다. 학급의 비유로 돌아가면 전부 다 퇴학시키고 신입생을 새로 받아야 하는데 매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이 됩니다. 졸업생이 한 명도 나오지 못하기에 학교가 존속할 이유도 없습니다. 인류의 타락상을 지금껏 어떤 도덕 사상 종교로도 해결하지 못했기에 이 세대에 와선 세상 종말이 닥쳤다고 모두 가장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려면 모두에게 무조건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또 아무도 그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죄를 처리하지 않는 종교는 종교로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모두를 다 용서했기에 누구나 천국 입성이 가능해집니다. 다시 학급의 비유로 돌아가면, 모든 학생을 아무 일이 없었던 양 무조건 용서해 주고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우등상장을 주면서 졸업시켜 주어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학교나 선생의 역할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유
만약 똑같은 죄인인 인간이 제물로 바쳐져선 누가 되었던 죽은 자 혼자만 형벌을 받기에 너무 불공평한 처사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공의도 사랑도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실체가 십자가에 바쳐질 수는 없습니다. 불멸의 존재가 죽을 수도 없기에 죽는 시늉으로 그쳐야 하는데,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 혼자 생색내는 환타지 쇼로 그칩니다.
반장을 대표로 벌을 준 선생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당신의 학생들을 사랑하는 진심을 제발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너희 잘못을 온전히 깨닫고 꼭 공부 열심히 해서 온전한 사회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불공평하고 이상한 선생이라고 비난을 받더라도 그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선생은 학생이 훌륭하게 되는 것 하나만 바랄 뿐이지, 잘 된 학생에게서 나중에 보상을 받으려는 뜻은 하나도 없습니다.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그런 반장의 역할을 맡아서 모든 인간의 죄 문제를 깨끗히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라고 십자가 구원만이 인간 문제의 유일하고도 완벽한 해결책이라고 밝혔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성자 하나님을 인간 죄의 대가로 받으면서 당신의 죄에 대한 저주를 주님에게 몽땅 퍼부었습니다. 죄를 처리하시는 완벽한 공의를 실현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대속 죽음의 의로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게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여 줌으로써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실현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런 신자에게 내주하셔서 앞으로 죄를 더 짓지 않고 거룩하게 주님을 닮아가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삼위의 하나님 세 분께서 나 같은 천하의 죄인을 구원해 주시려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힘을 합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복음이 어려워서 못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죄를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데 왜 나와 아무 관계 없는 이천 년 전 로마 사형수 예수만 믿으라고 하는지, 또 그러면 공짜로 구원준다고 하니까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믿기 싫어서 안 믿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히려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믿는 신자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정말로 예수님과 인격적 체험적으로 교제 동행했기에 순교까지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자기 죗값을 대신한 제물이었기에 그 죽음에 연합하여 자기들의 죄가 완전히 씻겨졌음을 믿었습니다. 나아가 주님이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여 승천함으로써 그 부활에 연합한 자기도 죽으면 천국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자기 인격체 전부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꾸어서 새롭게 거듭났기 때문에 그렇게 믿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삼위 하나님 그분이 보장해주신 구원을 실제로 소지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로 매일의 삶에 실제로 기쁨과 평안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세상에서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으며, 그렇게 주님과 교제 동행하는 기쁨을 어떤 세상 핍박이 닥쳐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런 믿음이 있는지 지금 진지하게 되돌아보길 원합니다. 혹시 아직도 예수님을 친밀하게 실감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십자가에 실제로 죽은 체험이 있는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만약 그런 체험이 없다면 자신의 영적 실체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춰서 솔직하게 그 전부를 까뒤집어서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여서 내 영을 거듭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진정으로 기도하십시오. 성령이 은혜를 주시면 주님의 십자가에서 외쳤던 그런 절규가 절로 터져 나오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활짝 벌린 사랑의 두 팔 안에 안기는 자신을 발견하고 감격의 눈물도 흘리게 될 것입니다.
(3/9/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