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조회 수 2332 추천 수 184 2009.07.18 19:34:16
달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라이거의 비밀


진화론이 아무리 과학적 이론이라고 스스로 우겨도 종에서 종으로 진화된 중간 단계의 증거물이 전혀 없다. 말하자면 여태껏 가장 결정적인 증거 하나 없으면서도 더 과학적이라고 계속 강변하고 있는 셈이다. 감히 단언컨대 지구 땅을 다 파헤쳐도 그런 화석은 존재할 수 없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전환은 전혀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종(種)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생물학적인 의미, 아니 진리 때문이다.

종이란 한 마디로 “교배가 상호 가능한 집단”을 말한다. 따라서 다른 종으로 변이된다는 것은 상호 교배가 불가능한 새로운 집단이 기존의 교배 방법을 통해 형성된다는 뜻이다. 단성생식이 가능하거나 한 개체가 양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아주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모든 생물은 한 종안에서 암수 교배로만 생식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렇게 후손이 죽 이어지다 어떤 특정 시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교배 집단이 생긴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 된다.

쉽게 말해 인간은 인간끼리만 생식이 된다. 아무리 장구한 세월이 흘러도 그 후손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닭은 평생을 가도 달걀을 낳지 어느 순간에 오리 알을 낳고 또 그렇게 생긴 오리가 얼마간 오리 알을 낳다가 어느 순간 다시 독수리 알을 낳는다는 법은 없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이런 이론을 무리하게 뒷받침 하려다보니 장구한, 사실은 영원으로도 부족하지만, 세월과 돌연변이라는 또 다른 무리한 세부 원리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의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가장 과학적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아무도 실험도 검증도 할 수 없는 장구한 세월과 돌연변이라는 가장 비과학적인 이론으로 무장하고는 너무나 뻔뻔하게 자기들만 과학적이라고 우기고 있다. 창조론자들의 입을 아예 미리부터 봉하겠다는 폭군적인 심보다.      

새로운 종의 출현이 가능하려면 최소한 닭과 오리의 교배가 이뤄져 오리의 우성형질만 유전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닭과 오리의 교배 자체부터 불가능하다. 인간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간혹 변태적 욕구를 주체 못해 동물과 성관계를 갖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수간(獸姦)으로는 절대 후손이 생기지 않는다.

호랑이가 사자와 교배하여 라이거가 생기지 않느냐고 반발하지 못한다. 일단 교배하여 새끼가 생긴 것은 상호 교배가 가능한 같은 종일뿐이다. 한국인이 미국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경우다. 사자는 산이나 우거진 밀림이 드문 아프리카의 황량한 들판에 살기에 몸 전체가 누런색이다. 반면에 호랑이는 밀림에서 자기 몸을 감추기 위해 줄무늬가 생긴 것이다. 호랑이나 사자는 같은 종으로 각기 오랜 기간 생존환경에 적응이 된 셈이다.  

인위적인 육종(育種) 방식이 발달된 식물계에서도 변종(變種)은 몰라도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완전한 신종(新種)은 만들지 못한다. 단지 변종된 것을 새품종이라고 부를 뿐이다. 나무끼리 접붙임을 하든, 수술과 암술의 꽃가루를 인공수정을 시키든 같은 종 안에서만 가능하다. 사과나무끼리 접붙여 새로운 형태, 맛, 색깔의 사과 품종을 개발하는 것이지 사과와 배를 접붙여 사과도 아니며 배도 아닌 신종은, 아니 그 중간의 품종도 만들 수 없다.

현재 UC Berkeley의 법학교수이면서도 진화론을 과학적, 논리적으로 가장 잘 변박하고 있는 필립 존슨의 말을 들어보라. “가축화된 동물이 야생 상태로 되돌아가면 고도로 특수화된 종류는 재빨리 소멸하고 나머지 생존자들도 원래의 야생 형태로 전환된다. 자연선택은 인간 육종사들이 원하는 극단적인 변이가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보존적인 힘이기도 하다.”(심판대의 다윈, 까치글방, 2007, 32p)

야생동물은 아무리 바뀐 환경에 적응해 살아도 원래의 야성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혹 너무 가축 같이 변한 경우는 야생 상태에 적응하지 못해 빨리(번식도 못하고) 죽는다. 따라서 자연선택은 오히려 동물이 갖고 있는 원래의 상태를 계속 보존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미 정해진 교배 방식이 아니고는 절대로 새로운 종이 나타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바로 자연선택의 근본의미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어쨌든 새로운 품종의 사과 하나를 만들려 해도 조금이라도 특성이 다른 사과와 접붙임을 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동식물을 망라해서 같은 종 사이에서 어떻게 신종이 나올 수 있는가? 또 다른 종끼리는 간혹 교접은 되어도, 인위적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절대 배아 내지 임신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신종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또 다른 종과의 인위적인 수정은 인간만이 시도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까지 진화되기 전에는, 진화론 식으로 말해, 인공수정은 아예 있을 수 없었다. 자연선택 안에는 인공수정은 존재도 하지 않기에 새로운 종의 출현은 아예 불가능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자기 종을 보존하는 억지력으로만 작용되었을 뿐이다.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은 원숭이의 후손 중에 어느 날 갑가지 인간 내지 인간의 변종이 나타났다는 말이다. 인간과 원숭이가 성관계를 해도 수정 자체가 불가능한데, 어떻게 원숭이만의 단일 교배 방식에서 인간이나 그 중간 형태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프랑스 동물학자 피에르 그라세는 한 종 안에서 같은 종으로만 생식이 제한되어 있다는 바로 이 사실이 진화론을 반대하는 강력한 증거라고 말했다.

“수천 년에 걸친 인위선택(선택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번식시키지 않고 제거한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새로운 종도 생겨나지 못했다. 혈청 헤모글로빈, 혈중 단백질, 불임성 등의 비교연구는, 같은 혈통은 동일한 특정 정의의 영역 내에 머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어떤 의견이나 주관적 분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측정 가능한 사실이다. 사실상 선택은 하나의 게놈이 생산 가능한 모든 변이형에게 구체적 형태를 부여하고 이들을 함께 모으는 역할을 할 뿐이지 어떤 혁신적인 진화 과정을 형성해주는 것은 아니다.”(심판대의 다윈, 33p)

한 종 안에만 제한된 교배 방식 때문에 변종은 몰라도 신종은 절대 발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어떤 변종이라도 한 개체 안에서의 유전인자 간의 결합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려는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자연선택으로 새로운 종으로의 진화는 절대 불가능한데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사실” 즉, 과학적 결론이라고 했다.

그리고 참으로 신기하지 않는가? 모든 동식물이 자웅(雌雄)의 두 가지 성(性) 뿐이며 또 그 두 성의 교배로만 생식이 이뤄진다는 것이 말이다. 왜 여러 종류의 성과 교배 방식이 나타나지 않는가? 왜 하나의 일관된 법칙만 존재하는가?

지구상의 수백만 종의 동식물에게 그와 유사한 숫자의 성의 종류와 교배 방식이 있다면, 다른 말로 중구난방식의 생식이 가능하다면 그야말로 우연의 산물이다. 각 종들이 스스로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쪽으로 자연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수백만 종이 자웅교배 하나의 법칙으로만 생식한다면 그 원리, 법칙, 성향 무엇이라 부르던 간에 한 쪽으로만 작용시킨 어떤 힘이 개입되었다는(창조) 뜻이지 않는가? 무작위 선택(진화)이 아니지 않는가?  

발명왕 에디슨의 결정적 실패

흔히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논란이 많고 아직도 결론이 안 난 채로 덮어두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따져 보면 금방 결론을 알 수 있다. 당연히 닭이 먼저다. 발명왕 에디슨의 실패만 고찰해 보면 된다.

우선 닭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달걀을 만들 수 있다. 또 달걀을 따뜻하게 품어서 병아리로 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달걀은 어미 닭의 도움 없이는 절대 스스로 닭이 되지 못한다. 닭은 달걀을 만들어 내고 달걀은 닭을 만들지 못한다면 당연히 닭이 먼저여야 한다.

에디슨도 모든 정성을 다해 달걀을 품어 보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달걀의 부화 온도를 몰랐고(어미 닭의 체온이 인간보다 조금 높음), 습도도 조절해야 하고, 조금씩 계란을 움직여 운동을 시켜주어야 하며, 3주 정도 계속 품어야 한다는 원리를 몰랐던 것이다. 이제는 이런 원리대로 인공부화기를 사용해 달걀에서 병아리를 양산해 낸다. 심지어 수정란과 무정란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맨 처음 달걀이든 닭이 생겼을 때를 가정해보라. 인간도 그런 사실을 몰랐는데 어떻게 계란만 덩그렇거니 생겨서 부화가 가능했겠는가? 인공부화는 아예 꿈도 꾸기 전이라 반드시 어미 닭이 먼저 있어야만 닭이란 종의 번식 자체가 가능했을 것은 삼척동자도 납득할 너무나 자명(自明)한 사실 아닌가?  

혹시 큰 바다 거북이가 해변의 모래사장에 알만 놓고 가버리고 새끼 스스로 부화해서 바다로 나간다고 해서 이런 원리를 부인할 수는 없다. 어미 거북이가 이미 부화에 가장 적합한 사장을 선택해서 모래 깊숙이 파묻어 두었다. 새끼 거북이가 알을 깨고 모래 위로 나올 때까지는 다른 동물의 습격에서 보호된다. 결국 모래에 깊이 파묻어두는 것이 어미 닭이 품고서 부화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역할을 한 것이다. 어미 거북이가 알을 아무 데서 아무렇게나 낳거나, 최초의 알이 아무 곳에나 있었다면 부화되기도 전에 다 없어져 마찬가지로 바다거북이라는 종류 자체가 생길 수 없는 것이다.  

너무 만화 같은 가정이지만 고양이가 사자 새끼를 낳으면 낳자마자 이미 어미만큼 큰데다 어미를 잡아 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살모사(殺母蛇)라는 뱀의 종류가 있다. 너무 맹독이라 새끼가 어미를 물어죽일 수 있다는 뜻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일반 뱀은 알에서 부화하지만 살모사만은 아예 새끼로 낳되 나무 같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트린다고 한다. 출산 과정 중에도 자칫 어미를 물어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인지는 불명하지만, 것이다. 어쨌든 뱀이라는 같은 종류 안에서도 번식의 방법은 다르다. 살모사가 갑자기 알을 낳거나, 알 낳는 뱀이 갑자기 새끼를 낳을 수는 없다. 그것도 어미마저 물어 죽이는 살모사 새끼는 더더욱 그렇다.

종에서 단일 교배의 원칙이 적용되는 데다 닭이 달걀보다 먼저라면 창조가 옳으며 진화론이 들어설 여지는 없어진다. 이론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상식으로만 따져 봐도 알 수 있지 않는가?  피에르 그라세의 말대로 엄연히 “측정가능한 사실이다.” 또 진화와 창조에 한해선 둘 중에 개연성이 많은 쪽이 당연히 진리이지 않는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바 대로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여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19,20)

자연을 보면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갖고 있는 창조주가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선언한다. 아름답고도 장엄한 외적 경관만 아니라 움직이고 생육하고 번식하는 모든 양태 가운데 너무나 오묘한 그분의 지혜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흔히들 자연은 동식물이 약육강식의 먹이 사슬로 묶여 있는 잔인하고 모순된 세계라고 비하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예컨대 나비와 벌이 없으면 식물의 교배가 불가능하며, 개미나 지렁이가 없으면 땅의 생명력이 보존되기 힘들다. 먹이 사슬은 자연이 오히려 더 풍성하게  유지될 수 있는 아주 정밀하고도 교묘하게 사전에 계획되어 설치된 체계일 뿐이다.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자전 공전하고 있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이미 말했다. 나아가 그 속도감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차만 타도 멀미하는 사람도 지구가 놀이공원의 청룡열차와도 도저히 비교 안 되는 속도로 빙빙 돌고 있는데도 전혀 어지럼증을 느끼지 않는다. 사전에 설계되어 설치된 중력과 만유인력의 법칙과 함께 대기라는 완충 장치로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위적 신종 개발이 불가능하며, 인간과 원숭이가 비록 교접은 해도 새끼가 절대 생길 수 없으며, 닭이 달걀보다 먼저인 것은 과학적으로 관측 가능한 마땅한 사실이다. 또 그 사실은 진화가 들어설 땅이 없고 창조가 옳음을 증명한다. 나아가 창조가 옳다면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계신 것이다.

그런데도 진화론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화론자들의 유전자에 대한) 생각을 요약하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닭이란 달걀이 다른 달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일 뿐이다.’ 유전자 선택론자들은 마치 유전자가 생각할 수 있고 생존 전략을 짤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다윈주의 허물기, 필립 존슨 지음, IVP 2000,78p) 요컨대 달걀이 또 다른 달걀을 만들려는 계획을 스스로 고안해서 단지 어미 닭의 몸만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이다.

다윈과 러셀과 도킨스의 공통점

하나님은 모든 자연 속에 당신의 창조 흔적을 새겨 놓았다. 그걸 빤히 보고도 많은 사람들이 창조를 부인한다. 엄청난 규모의 그랜드케년, 장엄한 나아아가라 폭포, 아니 이 둘과도 비교할 수 없는 광활한 밤하늘과 그에 촘촘히 박힌 별들을 바라보면서 뭔가 조물주가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도, 창조는 틀렸고 진화가 옳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 반대로 창조는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창조주는 끝까지 거부하는 자도 많다.    

예의 “Expelled” 영화에서 무신론의 전도사 리처드 도킨스와의 마지막 인터뷰 내용이 아주 흥미롭다. 그는 어떤 곳에도,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대담자  벤 스타인이 “만약 죽은 후에 (그의 믿음과는 반대로) 하나님을 만날 때에 왜 생전에 베스트셀러를 많이 내도록 축복해 주었는데도 믿지 않았느냐고 그분이 추궁하면 어떻게 대답하겠느냐?”고 물었다.

도킨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버트란트 러셀의 말로 대신 답했다. 역시 영리한 그답게 질문의 예봉을 피하면서도 그런 우문에는 무신론 철학의 대가인 러셀의 현답이 적격이라는 뜻이었다. “버트란트 러셀 경은 그런 질문에 아마 ‘하나님, 왜 당신을 숨기시느라 그런 고통을 겪었습니까?’라고 대답한 것 같다.”(Bertrand Russel had that point put to him, and he said some like, "Sir, why did you take such pains to hide yourself?")

풀어서 쉽게 말하면 이런 대답이다. “하나님이 숨겨지지 않고 드러났다면 제가 안 믿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제 같은 자도 찾지 못할 정도로 당신을 꼭꼭 숨기시느라 너무 수고가 많았습니다. 제 불신앙에 대한 책임은 숨으신 당신이지 제가 아닙니다. 저를 추궁할 아무 이유나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나 러셀이 하나님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고 또 만약 있다 해도 완전히 숨겨져 있다고 확신했기에 믿지 않았을까? 다른 말로 만약 숨겨져 있지 않고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했더라면 제대로 믿었을 지를 짐작해 보면 이 또한 아니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바로 이 문답을 하기 직전에 그는 지구 생명의 설계자로 외계의 고등지성을 들었고 또 생화학과 분자생물학을 연구하다 보면 그 설계자의 흔적을 어떤 방식으로든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상 지적설계자의 존재 뿐 아니라 그 증거를 발견할 가능성까지 믿었다. 또 그래서 벤 스타인이 그는 지적설계론 자체를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주 같은 특정한 설계자를 믿지 않는가보다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그로부터 현세대의 최고 과학자답지 않은 궁색한(?) 대답을 마지막으로 다시 들은 벤 스타인에게선 “지적설계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은 전혀 숨어있지 않는데...”라는 독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기에게는 훤히 보이는 하나님을 도킨스가 끝까지, 스스로 증거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자인했으면서도, 숨겨져 있다고 우기니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 그 이유는, 다른 말로 하나님더러 숨느라고 수고했다는 냉소적 반발의 숨은 뜻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숨겨져 있다는 말은 존재의 실재(實在)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기보다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시간과 장소에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는 뜻이다. 도킨스가 인용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자신의 책에서 스스로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불가지론자라고 인정했다. 단지 종교의 온갖 해악 때문에 믿지 않았던 것이다.

종교가 주는 해악이란 그가 아무리 철학적으로 심오하게 논술했다 쳐도 쉽게 한 마디로 풀어 말하면 신이 있다면 세상에 왜 이렇게도 불공평하고도 모순된 일들이 많이 있느냐는 불만이다. 신이 공평정대하게 다스리지 않고 있다고 절감했기에 감히 숨어 있느라 수고했다고 반발한 것이다. 악인은 형통하는 반면에 의인은 환난 가운데 있으며 아무 이유 없는 고통도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너무나 흥미롭게도 다윈이 진화론을 주창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그런 점들도 작용했었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전통 기독교에 대한 두 가지 부정적 함축 때문에 걱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 다윈은 세상에 있는 고통과 괴로움의 존재가 자신에게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지적 도덕적 부담감을 준다고 느꼈다. C. S.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라고 부른 이 주제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난관들 중 하나이며, 따라서 다윈처럼 민감했던 사람이 이 문제의 중요성을 느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특히, 다윈 스스로가 잘 낫지도 않는 병(병명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 더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그의 순진했던 십대의 딸 애니의 죽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도덕적 분노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두 번째로 다윈은 기독교 교리, 특히 점점 영향력이 커져갔던 복음주의 운동에 대항했던 중기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분노를 공유하고 있었다. 당시의 조지 엘리엇과 다른 여러 사람들처럼 다윈은 명시적으로 기독교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한다는 그런 생각에 대해 분노했다.”(도킨스의 신, 알리스터 맥그라스, SFC 2007, 144-146p에서 발췌)  

한 마디로 이유 없는 고통을 허락하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또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점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유 없는 고통의 문제는 진화과정의 의미 없는 산물로 치부하면 간단히 해결되었고, 또 종교와 과학을 별개의 영역으로 나눔으로써 전통적인 종교적 믿음과 불가지론 내지 무신론이 양립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윈 자신은 당시 영국인들이 다 그랬듯이 기독교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1840년대의 어느 시점에선가 전통적 기독교 신앙을 거부한 것이 틀림없지만 무신론으로 완전히 돌아섰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래서 리차드 도킨스는 “다윈 자신”보다 “다윈주의”가 무신론으로 가는 지적 고속도로라고 해석했다.

말하자면 지성인들이 아무런 도덕적 종교적 부담감 없이 무신론을 마음껏 주장할 수 있는 확실한 지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다윈이 처음부터 자신의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진화론을 연구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다른 지성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은 소원은 속 시원히 해소시켜 준 꼴이 되었다.  
  
지성인들은 신의 존재가 실재하는 여부는 모르거나, 어쩌면 있는 것이 맞을지라도 인류가 처한 현실 상황을 볼 때는 신이 신답게 행동한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을 믿을 이유나 필요 또한 없다는 뜻이다. 신의 실재 여부보다 현재 인간이 처한 상황이 신앙을 거부하는 가장 큰 기준이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지성인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한 것이다. 그야말로 과학적인 태도다. 데이터나 물적 증거나 실험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전혀 믿지 않겠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것은 또 이 땅이 전부이기에 현실적 형통과 안락만을 목표로 살면 된다는 가치관이기도 하다.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조금만 따져보아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창조주의 흔적이 숨겨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음에도 단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먼저 난 달걀이 스스로 부화해서 닭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비록 자신을 지으신 절대자 하나님이라도, 무조건 부인하겠다는 태도다.

바꿔 말해 창조론과 진화론이 인간에게, 특별히 지성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숨겨진 하나님의 흔적을 인정할지 무시할지 자신의 태도를 결정짓게 하는 기준이 되거나 이미 내린 결정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그칠 뿐이다. 쉽게 말해 창조와 진화 둘 중에 어느 쪽이 진리인지 상관없이, 다른 말로 절대자 하나님과는 전혀 연관 없이, 인간인 자기가 진리라고 믿으면 진리로 행세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 각자의 이런 태도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현상은 진화와 창조 어느 쪽에 개연성이 더 많든지 간에 사회적 권력을 누가 더 우세하게 점유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자기 쪽에 더 유리한 여론을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작금  그렇게 되어 가고 있지 않는가?

아무리 영향력 있는 인간 과학자가 아무리 그럴싸한 논리와 이론으로 자기 의견을 주장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진리는 있다. 진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리라는 것이다. 예컨대 닭은 절대로 달걀보다 항상 먼저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세상에서 진화가 득세하더라도 자연을 보면 창조는 부인할 수 없고 또 창조가 옳다면 절대적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절대로 공상, 추측, 가정, 이론, 심지어 믿음에서 도출된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얼마든지 관측이 가능한 실제적 사실로 말이다.

7/18/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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