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가 출발하는 자리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선 가장 큰 명절입니다. 기독교적 배경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젠 종교와 상관없는 국민적 명절이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불신자도 그 한해의 삶이 아무리 다사다난했던 간에 풍성한 식탁을 앞에 두고 잠시나마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내용을 갖고 누구를 대상으로 감사하는 지는 다 달라도 말입니다.
이 감사의 새벽에 한국에선 매일 40명이 자살한다는 글을 접했습니다. 얼마 전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최고 높다고 했는데 이정도면 세계를 통 털어도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자보다 생각까지 해본 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으로 우울한 이야기입니다. 요컨대 너무나 많은 이가 죽지 못해 겨우 산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살아가기 힘듭니다. 특별히 올해만큼 주위에서 웃음보다 한숨 소리가 더 많이 들렸던 해도 없을 것입니다. 계속 그럴 것이라는 예측은 우리로 더 낙심하게 만듭니다. 불신자들은 삶이 고달프면 정신수양, 취미활동, 스포츠, 담배, 술, 마약 등으로 이겨내려 합니다. 도무지 이런 처방이 통하지 않고 끝내 절망을 극복하지 못하면 자살로 치닫습니다.
그럼 신자는 어떤 힘든 일에도 기도와 말씀으로 잘 이겨내는가요? 과연 하루 40명의 자살자 중에 교회 다니는 자는 한 명도 없을까요? 틀림없이 일반 통계상의 교인 비율 그대로 섞여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하셨는데 과연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까?
범사(凡事)란 당연히 이해 안 되는 일, 힘든 일, 슬픈 일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감사가 안 되어도 억지로 감사하려 노력하거나, 아무리 작아도 감사할 거리를 찾으려 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그런 노력은 금방 한계에 도달합니다. 진정한 감사에는 반드시 충만한 기쁨이 따르는데도 분명히 부정적인 일에까지 감사하려니 감정적 뒷받침이 도무지 안 됩니다. 그렇다고 감사할 일만 감사하게 되면 범사에 감사가 아니게 됩니다.
우리 중 대다수가 범사에 감사하는 일의 출발점을 잘못 잡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꾸 감사만 하려 들기에 십중팔구 실패하고 맙니다. 대체 무슨 뜻입니까? 감사란 불평, 불만, 짜증, 분노, 고달픔, 슬픔 같은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없어져야만 가능하지 계속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의지적으로 감사하려 들면 스스로 속이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의 출발은 감사에 두지 않고 감사 안 되는 것들의 제거에 두여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감사는 어떤 종류가 되었던 자기가 소유하고 누리는 것을 스스로 좋다고 여겨야만 생깁니다. 반(反) 감사는 갖고 있는 것이 나쁘거나 좋은 것을 갖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즉, 자기 소망을 달성하지 못했거나 남과 비교해서 부족하면 절대 감사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감사할 수 있는 방안은 두 가지뿐입니다. 자기 소망이 이뤄질 것을 확신하면서 부단히 노력하거나, 남과 비교해서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여기면 절로 감사가 나옵니다. 성경에 가장 좋은 예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궁핍(窮乏)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秘訣)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바울이 지금 아무리 힘든 가운데도 현실적 감사거리를 찾아내려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 궁핍으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또 경제적으로 궁핍하든 부유하든 근검절약을 몸에 붙여서 자족하며 살았다는 뜻도 사실은 아닙니다. 부유에도 처해봤다고 합니다. 그런 일반적 수신제가 차원과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기도하고 말씀에 전무했더니 기쁨이 충만하게 밀려왔거나, 어려운 일이 갑자기 해결되어 기뻐했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자주 배고팠고 죽을 고비에 처한 적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앞에서 감사를 이루는 방안은 두 가지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자기 소망이 이뤄질 것을 확신하면서 부단히 노력하거나, 2) 남과 비교해서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너무나 빤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까? 한 가지 빠트리고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불신자와 신자의 구분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먼저 불신자는 자기 소망을 자기가 정해서 자기 힘으로 이루려 하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달성할 수 없으며 주위와 비교해보니 자꾸만 뒤처지는 것 같습니다. 결코 진정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근검절약하여 자족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인격적 수양을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면 금방 불만으로 치닫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그들에게 평생을 두고 달성해야 할 목표일뿐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1)주님이 주신 소망을 주님이 이뤄주시고, 2) 그 일을 이룸에 있어서 다른 이와 비교할 필요가 전혀 없으므로 즉, 달리 부족한 것이 아예 있을 수 없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불신자와 달리 범사에 감사한다는 목표가 이뤄진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이후로 이방인의 사도라는 주님이 주신 소명만 붙들고 평생을 달려왔습니다. 또 주님의 인도와 권능에만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주님의 일(자기 일이 아님)이기에 현실적 궁핍과 부요가 전혀 방해 될 수 없었습니다. 처형을 앞두고도 천국에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음도 확신했습니다. 그러니까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에서, 그것도 사형을 눈앞에 두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한 바울의 차원을 짐작하시겠습니까? 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끈질기게 기도하면 무엇이든 이뤄주신다는 뜻이 아닌 줄 알겠습니까? 소명 의식과 헌신이 약해지고 불신자시절처럼 자꾸 주위와 비교 되거든 기도하고 말씀보라는 것입니다. 천국 면류관을 생각하며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상처를 치유 받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 이상의, 물론 그런 일도 중요하지만, 너무나 거룩하고 신령하며 영광스런 차원으로의 초대입니다.
절대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도 올 한해는 다른 이들과 같이 현실적으로는 감사할 일보다는 괴로운 일이 더 많았습니다. 아마 지금껏 가장 힘들었던 해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그동안 제가 너무 게을렀다는 회한이 가득 밀려와서 많이 다운되었습니다. 맡겨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 제가 받은 모든 것을 동원해서 헌신했는지 따져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아서 땅에 묻어둔 자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감사절 아침에 제가 범사에 감사치 못하고 오히려 실망에 빠진 진짜 이유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신자로서, 말씀을 맡은 자로서 정말 감사할 거리를 찾았습니다. 주님이 주신 소명은 저에게 여전히 유효하고 또 제 평생토록 주님께서 그 일을 이뤄 가실 것입니다. 아무리 제 겉 사람이 후패하고 속사람은 게을러도 영원하신 주님이 실패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할 일은 오직 하나 게으름을 고치는 것뿐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 비상한 노력과 열심보다는 현재 처한 자리에서 단지 한 걸음만 내디디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며 좋은 일만 찾아서 감사하려 마십시오. 또 부족하고 슬픈 일을 억지로 제거하려도 마십시오. 현재 처한 형편에서 주님 쪽을 향해서 한 걸음만 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최고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조차도 관념상으로 감사하기보다는 실제로 그냥 한 번에 한 걸음씩 걸어가십시오. 감사는 자기가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채워주십니다. 신자는 불신자처럼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단 하루를 살아도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11/25/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