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 미국공연에 대한 유감(有感)
얼마 전 한국 모 TV 방송에서 60년대 후반부터 7, 80년대를 풍미했던 포크송 가수 네 분의 기념 공연을 정말 오랜만에 마련했습니다. 통기타, 장발, 청바지, 생맥주로 대변되던 당시 세대들로 향수에 흠뻑 젖게 만들었고, 전자음과 댄스뮤직만 판치는 가요계가 실력 있는 가수들에게 다시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저 또한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이 잠깐 맺힐 정도로 아련한 감상에 빠져들었습니다. 한마디로 감동 그 자체였고 노래가 사람의 정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공연을 오면 한번 보러 가겠노라고 집사람과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이곳 LA에 와서 공연키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네 분 중에 최고 주축이랄 수 있는 S씨는 빠지고 나머지 세 분만 오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 무슨 실망입니까?
당시 세대가 세시봉에 열광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트윈폴리오의 절묘한 화음이 아주 큰 이유일 것입니다. 성악전공을 하신 C씨가 같은 포크송 세대로 세계최고 듀엣으로 불렸던 아트 가펑클과 폴 사이몬보다 더 낫다고 자평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중 듀엣에서 한 분이 빠지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남편이나 아내 혼자라도 정상 부부라고 우기는 꼴 아니겠습니까?
물론 틀림없이 그들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처음부터 세 명만 온다고 광고했으니 사실상 그들에게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그러나 목 빼고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에선 너무 큰 실망을 넘어 조금 씁쓸한 여운마저 생겼습니다.
비유컨대 비틀즈가 해체 했다가 가장 주축인 존 레넌만 빼고 세 명이 다시 모여 비틀즈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하겠다고 덤비는 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누가 뭐래도 세 명이라도 모여서 비틀즈라는 이름으로 공연하니까 오고 싶은 사람만 와서 돈 내고 구경하라는 것 아닙니까? 거기다 이왕 미국까지 와서 공연하려면 녹화방송이라도 자주 볼 수 있는 한국과는 다른 교민들 특유의 사정을, 쉽게 말해 어쩌면 평생 한번 갖는 기회임을 감안해 주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의 TV 특집을 보면서 제가 열광했던 또 다른 이유는, 네 분은 정말 프로 중에 프로구나 절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준비 안 된 앙코르도 즉석에서 쉽게 연주했었고, 눈빛 하나로 절묘한 앙상블을 연출해 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무심결에 주고받는 농담 가운데도 음악실력 이상의 오랜 세월 함께 함으로써만 생길 수 있는 세련된 경륜과 지혜가 절로 묻어나왔습니다.
아무리 따져도 이번에 세 분만 오셔서 공연하겠다는 그들답지 않은 고집(?)은 그들의 순수함에 열광했던 팬들의 기대에 찬 물을 끼얹은 것입니다. 어쩌면 돈과 명예만 쫓았다는 오해마저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들을 아끼는 입장에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최소한 비틀즈 같은 진짜 프로들이라면 한두 멤버가 죽지 않은 다음에는 과연 이랬을까 저로 하여금 다시 생각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유사한 일이 있을 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遺業)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한 마디로 천국에 함께 갈 자니 남편더러 아내를 귀히 여기고 복음 안에서 그 유업을 소망하며 함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 같습니까? 당시 여자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던 문화에선 평생을 두고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엄청나게 쇼킹한 말씀입니다. 어제 보도에 따르면 대명천지 21세기에도 한 회교국가에선 참정권은 물론 운전조차 금지한다고 해서 여성들이 항의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하나님은 부부가 손잡고 천국에 함께 들어오기를, 동시에 죽는다는 뜻이 아님은 눈치 챌 것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까 혼자만 나타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간 이번 세시봉 미국공연에서 제가 실망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그분이 너무나 크게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당신께서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맺어준 부부인데 반쪽만 나타나 부부라고 우기니까 말입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나 가족은 어느 누구보다 앞서 복음의 은혜를 함께 누리게 해 주어야만 할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2:14) 신자는 하나님을 알고 증거하는 일에 프로 중에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보배로 모신 그리스도의 빛이 비록 질그릇 같아도, 아니 오히려 질그릇이니까 우리를 통해 모든 이가 볼 수 있게 비쳐져 나와야 합니다. 신자가 가는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불신자는 아무 말을 안 해도 신자가 과연 온전한 믿음 위에서 올바르게 사는지 항상 지켜보고 있습니다. 정말 참 인간답게 잘 살고 있다는 확신 내지 시기심이 들면 자기들도 믿어보려는 마음의 준비마저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통해 나오는 냄새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 아니면 죽음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세상에서의 일시적 형통 혹은 실패뿐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는 세상 사람들조차 하나님을 아는 프로가 전혀 프로답지 못하다고 우리에게 큰 실망을 할 것입니다. 거기다 우리도 자기들과 똑 같이 돈과 명예와 권력만 쫓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까지 들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아니 벌써부터 그런 주시와 기대를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닐까요?
5/23/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