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말하기 전에
제 생활은 아주 단조롭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고 평신도훈련원에 일주일에 한 번 강의를 나가고 아주 가끔 찾아오는 지인을 만나는 일 빼고는 종일 집안에서만 보냅니다. 그러다보니 새벽에 아내와 함께 나가는 산책이 제 삶의 청량제 역할을 합니다. 육신이 상쾌해지기도 하지만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집안일도 의논을 합니다. 말하자면 반쯤 은퇴한 자 같은 제 삶 속에서 그나마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고리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어저께는 그 산책길에서 아내가 뜬금없이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오늘 새벽에 기도하는 중에 당신이 만약 책을 낸다면 어떤 제목이 좋을까 생각해 봤는데 ‘차마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말하기 전에’가 어때?” 그래서 제가 “책 제목이 무슨 영화제목인 줄 알아? 당신 요즘 한국 TV 드라마를 자주 본 것 아니야?”라고 단번에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가면서 계속 생각해보니 책 제목으로도 그런대로 괜찮지만 그 의미가 아주 은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명색이 그 사랑을 글로 전하려는 저부터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서 정말 겁도 없이 나서는 것은 아닐까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말입니다.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글 솜씨가 오히려 그 사랑을 전하는 데에 방해나 되지 않았으면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 사랑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아주 일부라도 깨닫게 된 것이, 사실은 주님이 알게 해주신 것이지만,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발견은 했기에 그것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같은 자를 하나님이 쓰시는 것도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또 저에게 그럴 수 있는 여건과 소망을 허락하시고 비록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과지만 새벽마다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하는 것마저도 그분의 아주 큰 사랑이지 않습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는 너무나 어리석고 무지합니다. 차마 그 사랑을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마 예수님을 대놓고 세 번 부인했다가 직접 세 번 용서받은 베드로를 빼고는, 이 세상에선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논하는 것은 마치 유치원 아이들이 모여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유치원 원장이 되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상대성원리 대신에 1+1=2 라는 것부터 아이들이 알아듣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못 알아채는 아이가 있다면 먼저 알게 된 아이가 아이들끼리만 통하는 용어를 사용해 설명해 줄 수 있고 또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연합할 때 삶에서 두 배의 축복을 누릴 수(1+1=2) 있었는데 오직 십자가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고 제가 증언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그 사랑이 너무나 좋다고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때로는 제 어리석음이 드러나고 설익은 표현일지라도 더욱 열심을 내어 증언하겠다고 하나님 앞에선 몰라도 여러분께는 감히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같은 유치원생들끼리는 실수를 해도 이해해줄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3/24/2007
사양치 마시고 반장하시지요?
근데, 영성으로 볼 때, 사모님은 담임 선생님 수준을 넘으시는 것 같은데요!!!!!!!!!!!!!
가끔 담임 선생님 말씀도 이곳을 통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군요. 허락하심이........
좋은 글 읽고, 잔잔한 미소 머금고 나갑니다. 감사~~~~~~~~~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