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수록 사이가 더 멀어지는 아버지
중년이 되면 어느 날 갑자기 거울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날이 갈수록 부모와 똑 닮게 늙어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도 작고하신 아버님을 거울 속에서 뵌 지도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다 근래에는 닮아가는 것은 그 외모뿐이라는 것을 점차 깨닫습니다. 인생의 경륜이 조금씩 깊어지면서 당신의 생전에 가졌을 깊은 속마음까지 비슷하게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되니까 저는 도저히 그 발등상에도 미치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너무나 부끄럽지만 마지막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효도다운 효도를 못해드렸습니다. 실제로 효도 관광 한 번 못 시켜드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지막까지 당신께서 흡족해하거나 최소한 마음 놓고 눈을 감을 만한 인생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신께선 단 한 번도 저를 야단치지 않으시고 끝까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해주셨습니다.
반면에 저는 제 아이들에게 전혀 그러지 못했고 자신들보다 제 의견을 앞세운 적이 많았습니다. 제가 겪었던 여러 시행착오들을 미리 제거하여 시간과 노력을 절감케 해주려는 선한 뜻이긴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조차 저의 인간적 욕심이었던 것입니다. 제 아버님처럼 묵묵히 뒤에서 밀어주는 것이 여러모로 옳았을 것이라고 뒤늦게야 깨우친 것입니다.
그 외에도 당신께 과분한 사랑을 너무나 많이 받았습니다. 중학교 입학서류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라고 적어냈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저의 Role Model 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아들에게 아버지는 제일 소중한 존재일 것입니다. 제 경우는 일일이 밝힐 수는 없지만 너무 큰 잘못들을 저질렀고 또 끝까지 염려만 끼쳤어도 당신께선 끝까지 감내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예 아버님이 나에게 베푸신 만큼이라도 나도 자식에게 베풀 수 있도록, 아니 제발 그 시늉이라도 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가 죽을 때까지 도저히 아버지를 못 따라 갈 것 같은 거의 확실한 예감이 들긴 해도 말입니다.
오늘 아침 일본 NHK 드라마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옻칠한 전통 젓가락을 대를 이어 만드는 장인이 자신의 부족함을 실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은 지 13년이 되었건만 작품을 만들수록 아버지의 솜씨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격차가 더 벌어지는 것을 절감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더 벌어지다 어쩌면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부친에 대한 제 심정을 정확히 대변해 주었습니다.
이는 또 예수님을 닮아가야 할 우리 모두의 심정이지 않습니까? 신앙 연륜이 오래 될수록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고 그 격차가 더 벌이지고 있음을 절감하여 얼마나 많이 실망합니까? 때로는 전혀 불가능할 것을 알고선 지레 그 따라감을 포기하거나, 현재 수준에서 그냥 머무르고 싶은 때가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한마디로 우리의 영적 실상을 바라보면 항상 소망보다 절망이 더 앞서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그런 상태가 바로 신자의 소망이자 축복이자 능력이 됨을 아십니까? “내 능력이 약한 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는 다들 잘 알고 계신 말씀을 드리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영적으로 낮아졌을 때에 주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다시 소생시켜 주심은 너무나 지당한 사실입니다.
제 뜻은 그보다 영적으로 절망하고 있는 그 상태가 바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격차가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기인합니다. 우선 그분의 거룩하고 온전하신 사랑과 권능을 더 깊고 높고 넓고 크게 알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 자신의 더럽고 추함과 죄악을 더 세밀한 부분까지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당연히 그 자체로도 너무나 큰 은혜이자 축복입니다. 후자의 경우도 실망할 것 하나 없습니다. 세밀한 죄를 깨달았기에 그 세밀한 죄마저 고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생긴 것이지 않습니까? 그보다 더 큰 죄들은 이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극복했거나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만큼 주님께 가까이 가고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날이 갈수록 자신은 한 없이 낮아지고 예수님은 자기 안에서 한 없이 높아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자신이 낮아지는 만큼만 그분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또 그런 낮아짐과 높아짐을 실제 삶의 아주 세밀한 부분에서부터 하나씩 분별, 해석, 적용, 구현해 나가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죄도 바로 그런 믿음의 반대인 것입니다. 자신이 높아지는 만큼 우리 속의 그리스도가 낮아지는 것이 신자의 죄악입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인간이 원죄 아래 묶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가 세상 주인이 되려고 한 없이 높아진 것이지 않습니까? 자신과 그분의 격차를 아예 없애버렸을 뿐 아니라 그분보다 자기가 위에 선 것입니다.
그럼 성화는 반드시 그 격차를 원래대로 한 없이 넓히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는 뜻도 과부가 정욕을 죽이려 자기 허벅지를 바늘로 찌르는 차원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로 악한 행동을 통제하는 정도로는 다음날 밤에 생기는 더 큰 욕정을 이기기 너무 힘듭니다. 허벅지에 바늘 자국이 수도 없이 생기며 또 자국이 자꾸 더 커질 뿐입니다.
주님의 씻음과 고쳐주심과 회복하심의 은혜가 없으면 영과 혼과 육으로 이뤄진 나라는 존재 전체가 날이 갈수록 더럽고 추해질 뿐이라는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처절한 자백이 반드시 앞서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소망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두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분과 세밀한 부분에서부터 동행하면서 그분의 거룩하심에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소망 없음을 더 많이 깊이 세밀히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또 그럴 때마다 우리 속에 임재하신 그분께서 한없는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끝까지 붙들고 계심을 어김없이 깨닫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우리 겉 사람은 후패해져도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빛이 우리의 영혼육에 밝게 비취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과의 격차가 최대한도로 벌어졌음을 실감했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거의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해도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주 세밀한 죄까지 그 더럽고 추함을 절실히 깨달아 고쳐나가고 있는 중이니까 말입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영적 실체가 날이 갈수록 너무 많은 실망만 불러일으킵니까? 그러나 절대 절망으로까지 떨어지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장성한 목표를 보면서 걸어가는 중이라면 오히려 그분과의 격차가 더 벌어졌음을 아주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격차를 더 벌리도록 노력하십시오. 단 그분의 십자가 사랑과 공의의 경륜을 더 깊이 깨달아 가면서 말입니다.
5/17/2010
유일한 치료 방법이라지요
우리의 부끄럼, 수치심, 어찌할 수 없는 상처들...
모두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그 부위를 드러내고
치료함 받을 수 있음이 세상에서 최고로 큰 은혜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