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후를 대비해 기도하라.
“무소유”(無所有)라는 베스트셀러를 저작했으며 실제 삶으로도 실천한 법정스님이 타계했습니다. 장작불로 화장한 다비식마저 너무나 간소하게 치러져 마지막 순간까지 무소유의 본을 보여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또 자신의 책을 더 이상 판매하지 말고 절판해 달라는 유언까지 남겼습니다. 이승에 사는 동안 진 말빚을 더 이상 다음 생에까지 가져가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승에 남긴 인연을 깨끗하게 정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恨)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전2:16,18)
전도서를 지은 솔로몬도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한 부귀영화를 다 누려봤지만 죽음을 앞두고는 헛되고 헛되었다고 한탄했습니다. 나아가 자기가 이룬 일로 인해 오히려 후손에게 수고가 끼쳐질까 염려했습니다. 만약 여기서 그쳤다면 그도 범인(凡人)처럼 죽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 인연을 말끔히 정리한 자로 즉, 무소유를 실천한 자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죽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그 죽음 자체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죽은 자를 통해 하나님의 선한 뜻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3:14)
조지 뮬러가 주위의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계속 기도했는데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한 세 친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얼마 안 되어 마지막으로 남은 그 세 명마저 다 회심했다고 합니다. 죽은 자 소원을 못 들어주랴 하면서 친구 정성에 감복해 믿어 주기로 한 것이 아닙니다. 뮬러가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계속 졸라댄 것도 아닙니다. 그의 생전의 기도를 기뻐 받으신 하나님이 당신의 때에 그 친구들에게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저의 부친은 불신자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종도 못하고 마지막으로 만나 뵌 것이 미국 여행 오셨을 때였는데 아직 제가 목회를 시작하기 전이었습니다. 그 여행 후에 곧 바로 중병이 드셨는데 그 때는 또 제가 목회를 막 시작하여 너무 바쁜 바람에 한국을 제대로 방문도 못하고 차일피일 하다 전도시기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저의 게으름을 호도하려는 핑계에 불과하지만...)
부친은 제가 곧 목회할 줄 아시니까 그 마지막 여행 중에도 계속해서 미국교회의 큰 건물에 유별난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목회를 하되 이왕이면 크게 하길 소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마 당신의 속으로 천지신명에게라도 소원을 빌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제가 번듯하게(?) 목회를 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이 또한 부친의 정성과 소원을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때에 그분이 역사하신 까닭입니다.
최근에 제가 이런 저런 제목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불현듯 부친의 마지막 여행이 떠오르면서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응답이 되려면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죽은 후에라야 응답될지 몰라. 그렇게라도 되기 위해 오히려 더 열심히 기도해야지.” 응답이 언제 될지 모르는 일일수록 더 기도해야 하는 것이 응답을 재촉해 앞당기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절실한 일이라면 때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죽을 때까지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신자는 영원을 소망하며 사는 자입니다. 단순히 잘 믿어서 천국 가겠다는 개인적 열망을 가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이 땅의 삶이 바로 영원과 실제로 맞대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역으로 죽음 이후에도 한시적인 이 땅의 후손과 다른 이들에게 계속해서 아름다운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과는 다른 것이 자신의 자질과 생전의 업적 등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한 역사를 통해서만 그럴 수 있습니다, 바로 신자의 기도가 순간을 영원에, 또 영원을 순간에 접목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조지 뮬러처럼 평생에 걸쳐 주님 앞에 엎드렸던 기도가 생전에는 물론 죽은 후에도 이 땅에 실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명품 악기가 태어나려면 나무를 80년 동안 묵힌 후에 악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악기라도 제 소리를 내려면 또 다른 80년 간 연주를 해서 울림통이 온전히 틀이 잡혀야만 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악기를 만들려고 나무를 자르는 자를 비롯해 악기를 만든 자는 자기가 자르고 만든 악기가 내는 제대로 된 소리를 들어 볼 수도 없습니다. 둘 다 죽은 후라야 악기가 제 몫을 하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당신께서 죽으신지 오십일이 지나 성령을 받고서야 참 제자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당신께서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은 열매가 그때서야 열린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세상 앞에 소금과 빛으로 서되 무엇보다 썩어 죽어야 하는 하나의 밀알이어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영원한 보배들을 이 땅에서 사는 순간순간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옮겨 심어야 합니다.
영원과 순간을 잇는 즉, 이 땅과 그 넘어 둘 다를 아름답게 이끄시는 일은 영원하신 하나님만의 몫입니다. 신자는 그 영원에 이미 동참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매사를 행해야 합니다. 요컨대 자신이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간에, 심지어 자기 죽음 이후까지 하나님의 아름다운 때와 역사를 믿으며 주위의 미혹된 영혼을 구원해주고 이 땅의 황무함을 고쳐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恩惠)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2:7)
3/17/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