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기억상실증

조회 수 1430 추천 수 143 2008.11.15 15:45:57
거룩한 기억상실증


저는 미국에서 살긴 하지만 영어를 사용할 기회나 필요가 거의 없어 알던 단어도 자꾸 까먹습니다. 가뜩이나 경상도 억양에다 혀 수술을 받은 적이 있어서 엉터리 발음으로 곤욕을 치르곤 합니다. 최근에는 가끔 한국어 단어마저 혀가 돌아가지 않아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어를 아예 입에 심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말도 안 되는 공상도 해봅니다. 외국인에게 전도하고 미국교회에서 설교하며 영어로 책도 저술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자고 깨니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유창하게 외국어를 말할 수 있게 된 여자가 실제로 있습니다. 사실은 외국어가 아니라 외국어 억양으로 모국어를 말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작은 시골마을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한 중년여성이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러시아, 독일, 스웨덴 식 발음으로 영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미국식 발음으로 고치려 해도 안 되고 입에 붙어버렸습니다. 때로는 그 외국 발음으로 아무 의미가 없긴 하지만 얼마든지 길게 말을 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17년 전에 트럭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뇌를 다쳐 치료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2년 전 척추안마소를 다녀온 후 갑자기 며칠 간 말을 할 수 없었고 다시 목소리가 나오자 그런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언어를 조절하는 왼쪽 뇌 쪽에 작은 혈액응고가 일어난 것이 원인으로 FAS(Foreign Accent Syndrome)라는 희귀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억양만 달라졌다 뿐이지 다른 이상이나 부작용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어제는 이와 비슷한, 사실은 정반대의 현상을 겪은 한국 중년남성을 만났습니다. 오래 전 한국에 있을 때에 관광회사 가이드를 했던 분이었습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조크, 가요, 춤 등에 일가견이 있었던 분입니다. 마치 자동판매기처럼 언제든 요청만 하면 구수한 이야기가 입에서 줄줄 쏟아져 나왔습니다. 특별히 진한(?) 농담에는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오랜 만에 점심을 함께 한 김에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달라고 채근했습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그 많던 레퍼토리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오히려 하도 재미있어 기억하고 있었던 그분께 들었던 진한 농담을 상기시켜주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분이 뇌를 다쳤거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사람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던 분이 이제는 교회의 모든 집회와 성경공부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기 바쁩니다. 자연히 그런 농담을 할 기회도 없었긴 하지만 진짜로 아무 생각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입술에 거룩한 말을 심어주기 위해 더럽고 추한 말들은 다 지어버렸던 것입니다. 거룩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 노래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스탈린이 최고권좌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어렸을 때 친구들을 몽땅 죽였다고 합니다. 그런 극악무도한 독재자에게도 지우고 싶은 어두운 과거가 있었듯이 우리 모두도 그러합니다. 특별히 예수를 알기 전의 삶을 반추해보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아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생애 기록을 함께 검토하면 수초도 똑바로 서있기 힘들 것입니다.

구태여 먼 장래까지 염려할 것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죄책과 상처로 얼룩진 과거를 지우고 싶고, 아니 수시로 더럽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자신의 실체마저 부인하고 싶지 않습니까? 정말 나는 가만히 있고 아예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아름답고 거룩한 생각과 말과 행동만 심어주면 어떨까 부질없는(?) 상상도 해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혀 실현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어제 깨달았습니다. 바울처럼, 아니 거룩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분처럼 사나 죽으나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분을 위하여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무엇에든 참되며 경건하며 정결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어서 이 땅에서부터 차고 넘치는 은혜와 권능을 맛볼 것입니다.

FAS를 겪고 있는 그 여인은 “49년이나 사용한 음성이다. 내가 익숙해져 있는 음성이다. 손자들이 처음 태어났을 때 들려준 음성이다.”라고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여전히 당신이 건강하다는 것이다.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릴 때에 이 증상은 그저 공원에서 산보하는 정도에 불과하지 않는가?”라는 남편의 충고를 접하고는 그 질환에 적응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옳기셨고 더 이상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독생자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어두운 과거를 완전히 지어버렸습니다. 때로는 오랫동안 몸에 붙어서 너무 익숙하고 달콤했던(?) 맛이 아련하게 되살아날지라도 내가 예수를 몰랐던 어두운 과거에 묶여 있어야 할 필요와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순간 나에 대한 거룩한 기억상실증이 하나님에게 완벽하게 일어났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이 땅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고 가꿔나가야 할 것은 바로 이 예수님의  거룩한 기억상실증일 것입니다. 인생의 진짜 큰 그림을 그릴 때에 예수 믿는 신자에게만은 죽은 후 생전의 어두운 기록들을 하나님이 다시 들쳐보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11/15/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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