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야말로 가장 감사했던 해
지난주 추수감사절에는 오랜 만에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한미 양국 절충식의 성찬을 나눴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가족끼리 각자 그해에 감사할 거리가 무엇인지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저희는 모인 숫자가 꽤 되어 음식이 식을 것 같아 찬송을 한두 번 부르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대신에 제 혼자 속으로 감사거리를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영적 은혜도 많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무래도 큰 아들 부부와, 특별히 손녀와 한 집에서 기거하게 된 것부터 꼽을 수 있었습니다. 손녀가 귀엽고 사랑스럽기는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또 팔불출처럼 영민하고 예쁘다는 자랑을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감사절 이틀 전에 “오늘의 양식(Our Daily Bread)”이라는 소책자에서 본 글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할 때 즐거움 중의 하나는 그들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길을 건널 때 아이들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또는 사람들 속에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아이들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손을 더 세게 꼭 잡습니다.”
모든 어린이가 다 그럴진대 자기 손녀는 더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선 작은 손이 전해주는 따뜻하고도 앙증맞고 귀여운 촉감이 너무나 좋습니다. 조금 위험하거나 장난치기 위해 손을 내밀며 잡아달라고 할 때는 정말 기분이 하늘을 날듯 합니다. 아무리 다른 일로 정신없어도 단숨에 달려갑니다. 아내와 서로 손녀의 사랑을 많이 차지하려고 경쟁을 벌립니다.
아빠 엄마의 눈총을 받고 잔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사탕이나 장난감을 사달라는 대로 사줍니다. 아이도 물론 기쁘고 감사하겠지만 틀림없이 사주는 우리 부부의 기쁨이 더 클 것입니다. 아이가 무엇이든 해달라고만 하면 기쁩니다. 별로 필요 없는 것도 일부러 찾아서 갖다 안길 때도 있습니다. 손자손녀는 모든 인생의 말년에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가장 큰 기쁨의, 실제 내 몸에서 난 아들딸보다 더 사랑스럽기에, 선물인 것 같습니다.
성경 가르침이 하나 틀림없음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4)
예수님이 세리, 창녀, 죄인, 고아, 과부, 병자들을 돌보는 가운데 치유와 은혜를 받은 자들보다 당신의 기쁨이 더 컸을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우리가 울 때에 더 슬피 울고 우리가 웃을 때에 더 크게 웃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위 어려운 이웃을 신자로서 도덕적 양심과 종교적 의무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기쁨과 영적 성숙을 위해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는 손녀와 저의 차이와도 도무지 견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에 얼마나 연약하게 여기겠습니까? 말하자면 하나님도 신자의 손을 잡기만 해도 당신에게 큰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다 이것저것 해달라고 하면 그 기쁨은 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구하지 않은 것과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당신께서 먼저 주시려 하지 않겠습니까? 신자가 무엇이든 기도만 해도 당신의 기쁨은 하늘을 날 것 같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예수를 믿어 생명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하늘에서 큰 잔치가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럼 구원 얻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천국에 다 울려 퍼질 만큼 떠들썩하게 신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이든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일은 하나님의 몫이자 책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만도 저에게는 추수감사절의 가장 첫째가는 감사거리였던 셈입니다.
바꿔 말해 우리 모두에게 올해에는 힘든 일이 특별히 더 많았지만 기도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진정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힘든 일이 많았기에 기도를 더 많이 할 수 있었고 또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는 분명 더 많이, 비록 우리가 아직까지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 해도, 넘쳤을 것입니다. 그럼 올해가 사실은 가장 감사와 기쁨이 많았던 해라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그렇지 않다고 여겨진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적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모자랐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12/2/2008
이런 말이 있더군요. "나는 행복하기 때문에 노래부르는 것이 아니라, 노래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라구요. 때론 슬프고 아플지라도 기도할 수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