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사잇길에서 만날 사람
어제 저녁 LA의 숭의여고 동문들의 합창제에 다녀왔습니다. 고맙게도 매번 티켓을 보내주는 단원이 계셔서 1-2 년에 한번 정도 아내와 함께 하는 유일한 문화적(?) 외출입니다. 저는 워낙 음치인데다 라틴어 성가가 주 레퍼토리인 경우가 많아 약간 지겨울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막상 가서는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는데 이번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감상 셋이 있었는데 ....
느낌 하나.
제가 제일 기대하는 한국 가곡이나 민요의 차례가 되면 음악회다운 근엄함이 풀리고 절로 신명이 나게 됩니다. 또 두고 온 고향산천을 생각하며 아련한 향수와 부모친척을 떠나 외롭게 살고 있다는 감상에 젖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이국땅에 사는 자로서 뭔가 아쉽고 부족하다는,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내가 왜 이런 곳에 와서 이런 기분에 젖어야 하는지 뭔가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념에 잠기며 비애감을 조금 느끼려는 순간에 오히려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한국에 있으면 나라와 민족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지 못할 것인 반면에 비록 가끔이긴 하지만 민요나 가곡 한 자락만 듣고도 조국을 생각하며 눈가에 이슬이 맺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겠습니까?
그러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노래를 듣는 순간에 갑자기 저희 두 아들과 자부와 손녀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한국인이라면 어릴 적에 들과 산으로 뛰어 다니면서 자주 불렀던 노래이지 않습니까? 그에 반해 이국에서, 그것도 TV와 전자오락과 컴퓨터의 노예가 되다시피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는 후손들에겐 과연 어떤 추억이 생기겠습니까? 조국애나 민족애까지는 몰라도 가끔은 되돌아보고 싶은 한민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아름다운 추억거리조차 도무지 생기지 않을 것 같아 부모로서 너무 민망해졌습니다.
각 교포 가정에서나 이민교회가 정말 신경을 쓰서 뿌리를 이어갈 책임을 맡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2세들의 모임이나 교회에 1세 어른들이 전폭적으로 지원하지 않으면 한국 가곡 하나 모르는 이상한 한국인들이 이 땅에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들이 우리 나이가 되었을 때에 틀림없이 그저 브리트니 스피어즈나 비욘세 등의 노래를 따라 어깨춤을 추며 흥얼거릴 것이 상상되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때도 비틀즈나 폴 사이몬에게 열광했지만 다른 쪽으로 우리 가락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아이들이, 아니 전 세계의 아이들이 순간적 쾌락만 추구하는 싸구려 할리우드 문화밖에 접하지 못합니다. 민족 고유의 문화를 알게 해주지 않으면 그 심경은 데스 벨리 사막처럼 텅 빈 채 메말라버리고 고향의 뿌리는 완전히 잘려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 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시137:1-5)
느낌 둘
프로그램 마지막 부분에 흥도 돋우고 학창시절의 추억도 살릴 겸 중년 아줌마들이 전부 단발머리에 진짜 당시의 여고생 교복을 입고 무대에 섰습니다. 자연히 저희 또래 내지 그 이상이 대부분인 청중들이 휘파람과 박수로 열렬히 호응하였습니다. 이젠 조국에 대한 향수 정도가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 년 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아가 찬조 출연한 숭실고 동문 합창단도 남학생 교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약간은 불량기를 드러내려고 단추를 풀고, 모자는 삐딱하게 쓰고, 책가방도 옆구리에 끼었습니다. 최근에 히트 친 한국 영화 “친구”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거기다 꽃을 여학생들에게 선물하면서 희롱하는 아주 간단한 퍼포먼스도 곁들였습니다. 정말 신선한 아이디어였고 상큼하고 유쾌한 순간이었습니다. 근엄했던 분위가 단번에 느슨하고 신나게 풀어졌습니다. 말하자면 고등학교 시절의 말광양이와 악동들로 되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이젠 정말 빠른 템포에 맞추어 춤도 추는 뮤지컬의 차례가 되어야만 할 분위기였습니다. 아뿔싸! 그런데 마지막 순서는 바로 그런 복장으로 “시편 8편”과 “주를 찬양해”라는 두곡의 찬양이었습니다. 저는 “이건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는데...” 싶어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실망감이 들 것이라 지레짐작하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제 예상과는 전혀 딴 판으로 전개 되었습니다. 장내는 일순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다 못해 경건해졌습니다. 제가 바로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찬양의 능력이다. 모든 죄인의 영에 성령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다.” 특별히 악동 같은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니, 아니 예수님의 보혈은 바로 그런 앞뒤 분간을 못하는 악동들에게 필요한 것 아닌가 말입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저가 이스라엘 집에 향하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시98:1-3)
느낌 셋
복장은 조금 흐트러졌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모습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여기저기서 앙코르가 터져 나왔고 그에 맞추어 세심하고도 더 큰 감동의 마무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숭의와 숭실 합창단과 청중 모두가 한 목소리로 우리 가곡 “보리밭”을 부르며 피날레를 장식했습니다. 모두들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인지라 우렁차게 불렀고 고색창연한 석조 교회당의 천장에 반향(反響)도 잘되어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옆 자리의 아내가 안경을 고쳐 쓰고 저 또한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 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 가에 들려 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 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시인 박화목씨가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의 보리밭을 지나며 작시한 것에 작곡가 윤용하씨가 곡을 붙인 것인데 대중가수들도 워낙 자주 불러 정말 국민가곡이라고 칭할 만합니다. 시인의 의도는 아마도 옛 애인을 그리워하는 연모가(戀母歌)였을 것입니다.
그 시간 청중들의 상념은 정말 각양각색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고운 노래를 귓가에 불러주는 사람으로 누구를 떠올렸는지는 사람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첫 사랑의 연인을, 고향의 부모님을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혹은 나이들이 지긋해서 상처 상부한 배우자를, 조국에 있는 친구나 친지들 등등... 아니면 단순히 노래를 따라 부르느라 구체적인 생각 없이 가사와 멜로디에 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슬이 자연스레 눈가에 맺힌 까닭도 이국땅에서 한 핏줄들끼리 한 목소리로 한국 가곡을 부른다는 한 가지 이유뿐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이의 눈물샘을 결정적으로 자극한 것은 마지막 가사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돌아갈 수 없는 조국, 이미 이 땅에는 계시지 않는 부모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첫 사랑의 추억, 이민생활의 외로움과 괴로움 등등, 혹은 그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져 가슴에 가득 밀려들어 왔을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다 좀 다른 생각이 하나 더 보태졌습니다. 아마 죽음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연세가 지극하신 분들 중에는 언뜻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신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분에 비해 훨씬 연소한 저를 건방지다고 욕해도 할 수 없습니다만, 돌아본 빈자리가 바로 우리가 살아온 자리가 아닌가 싶었던 것입니다. 또 앞으로 걸어갈 길도 그리 많지 않은 데다 그 길 또한 텅 빈 채 혼자서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다 싶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아마도 다 신자였을 것이니까, 절대 실망할 일이 없다는 확신도 가졌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예수님이 동행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뒤를 보아도, 옆을 보아도, 앞을 보아도 아무도 손을 잡지 않고 왔으며 또 앞으로도 함께 혼자서만 걸어갈 불신자에 비해 너무나 감사할 일 아닙니까?
신자라도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특별히 이민 생활을 하다보면 때로는 정말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라는 애절한 심경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롭고 고달픈 이민생활이라도 매순간 예수님을 연모하는 새 노래를 부르면 이렇게 힘든 시기에도 넉넉히 이김을 주실 것입니다. 또 앞으로 걸어갈 보리밭 사잇길의 종착지 앞에도 예수님이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십자가에 활짝 벌렸던 그 팔의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잡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4:18-5:4)
8/17/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