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귀한 섬김을 보았습니다.
지난 일요일(6/29)은 장애인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주로 다운 신드롬이나 자폐증을 지닌 어른들이 국적에 관계없이 한국교회에 모여 한국어와 영어 통역으로 진행되는 예배였습니다. 신학교에 다니는 제 둘째 아들이 몇 년 째 여러 모양으로 섬기는 사역입니다. 마침 7주년 기념일을 맞아 부모들을 초청한 자리에 저는 분에 넘치게 설교까지 맡았습니다.
교회로 가는 차중에 아내가 이전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으로 제가 외국인들을 상대로 설교하고 아들이 영어로 통역하게 되기를 소원한 적이 있었다고 실토했습니다. 제가 쓴 글에 아들이 그림을 그려 준적은 있지만, 도저히 실현 불가능할 것 같은 그 소원이, 그것도 장애인들 상대로 하는 설교에서 처음 이뤄졌습니다.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또 제가 담임했던 교회의 신자 한 분이 목사님의 설교가 영어로 번역되어 책으로 나오는 것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몇 년 전에 말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감사하다고 말했지만 당연히 속으로는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웃고 치웠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마음의 소원마저 감찰하시고 그대로 이뤄주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인간이 미리 제한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껏 몇 번 참석했던 장애인 예배마다 성도간의 사랑이 정말 풍성하게 넘치며 주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무 꾸밈없이 누구나 서로 포옹하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찬양을 따라 부르는 순수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상인인 제가 도리어 얼마나 때가 많이 묻었는지 새삼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주 단순한 가사의 찬양을 일어서서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따라 불렀습니다. 개중에는 아무 생각 없이 고함지르거나 신이 나서 뛰어 오르거나 춤을 추는 자도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또 찬양 인도자가 참석자 모두를 개적으로 일일이 축복해 주었습니다. 진짜 있는 모습 그대로 자기의 전부를 주님께 올려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장애인들이 신학적 지식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성경의 구절, 아니 신약 구약으로 나눠진다는 사실도 모를 것 아닙니까? 사도신경, 성경봉독, 주기도문 등을 한글과 영어 모두 아주 쉬운 단문으로 바꿔서 따라 읽게 합니다. 암송은 도저히 기대도 못합니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대표기도도 돌아가면서 시킵니다. 그들이 찬양과 기도와 성경 말씀으로 고백하는 내용은 오직 자기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자기도 사랑한다는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참 신앙이자 참 예배의 모습 아닙니까?
어제는 특별히 부모초청 잔치인지라 한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특송을 했습니다. 그 자폐증 소년의 노래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몇 절이나 되는 가사를 전부 외워 끝까지 틀리지 않고 찬양했습니다. 장애부서를 맡으신 인자한 어머님 같은 여자 전도사님이 그 모습에 감격해 눈물을 훔치기 바빴습니다. 전도사님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저희들은 그 모습에 또 감동 되어 눈물을 감추기 더더욱 힘들었습니다.
전도사님으로선 지난 7년간 남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해가 안 되는 아니 상상도 못하는 어려움들을 얼마나 많이 겪었겠습니까? 제 아들을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장애인들에게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으로 인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정신적으로 지칠 때가 제일 괴롭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수십 개의 커다란 바위를 상대로 말씀을 전하고 섬기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식사교제 때 옆에 앉으신 어떤 집사님이 장애인 사역만큼은 한 번 시작하면 그만 둘 수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정상인과 달리 장애가 있다는, 즉 다른 사람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장애인들이 자기 선생님이라고 정말 순수하게 믿고 따르는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다른 부서로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귀하지 않은 일이 하나라도 있겠습니까만 장애인을 섬기는 자들은 진짜로 충성된 종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제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더 귀한 종을 만났습니다. 바로 제 곁에 멕시칸 젊은 청년이 앉아 있었는데 장애 정도가 제일 심했습니다. 수시로 고함을 지르거나 책상을 두드리거나 아무나 붙들고 귀찮게 굴려 들었습니다. 한국인 남학생이 옆에 붙어 다니며 일일이 만류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 학생이 하는 일이라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청년 곁에 붙어 다니는 것뿐이었습니다. 청년이 가만히 있으면 자기도 가만히 있으면 그만이었습니다. 맨 뒷자리에서 그 청년으로 소리만 내지 못하게 하는 그야말로 전혀 생색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비교적 쉬운 일이긴 하지만 너무나 단조로운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맡은 학생으로선 단 번에 싫증나고 더 큰 일을 하고 싶겠지만 묵묵히 웃는 얼굴로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한 주라도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예배를 비롯해 다른 순서들의 진행이 아예 안 되리라 쉽게 짐작되었습니다. 가장 드러나지 않았지만 가장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장애 청년에게서야말로 눈곱만큼이라도 변화되는 모습은 아예 기대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비유컨대 전혀 눈에 보이지 않고 소리도 안 들리면서 언제나 한 결 같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지만 없어지면 한 순간이라도 생존조차 할 수 없는 공기(空氣)와 같은 섬김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가장 먼저 기꺼이 맡아야 할 사역의 표본이었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도 가장 귀하게 보시고 아주 기뻐하실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일을 통해 당신의 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아니 십자가 예수님의 예에서 보듯이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당신의 사역을 진행시킬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날은 외적으로 화려하게 생색나고 가시적 결과도 풍성하게 맺히게 만드는 종이라야 귀하게 쓰임 받는 큰 종으로 대우 받고 있으니 어떻게 된 연유입니까? 히브리서 11 장의 믿음의 위인들이나, 예수님의 사도들이 이 땅에서 인간들 사이에 칭찬과 고급스런 대접를 받은 적이라곤 전혀 없었지 않습니까?
사실은 설교를 맡았던 저 또한 그 남학생에 비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종이었습니다. 제 설교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외국인들에게 처음 영어로 통역된다는 사실에 잠시 기뻐하고 흥분했던 사실이 갑자기 부끄러워졌습니다. 또 몇 년 전에 한 교인이 제 글과 설교가 영어로 번역되어지기를 기도하겠다는 말을 아주 흐뭇한 기분으로 떠올렸던 사실을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영어로 번역될 필요가 있을 만큼 글 내용부터 오직 십자가 복음에 충실 하는 것이 더 선결과제임을 깨닫고 그렇게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 예배에 설교하라고 저를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장애인 예배와 그 남학생을 통해서 제게 영적 부흥이 일어나고 다시 결단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주셨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영적으로 갈급하거나 침체되어 있는 자 있습니까? 장애인 예배에 꼭 한번이라도 참석해 보시기를 간곡히 권해 드립니다.
7/2/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