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폭동이 만들어낸 놀라운 기적
온수 파이프가 터진 다음날 이른 아침에 임시조치를 한 후에 어떤 교회의 1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이곳 LA의 수많은 교회 중에 생판 처음 듣는 교회에다 이름 없는 목사님이 시무하는 아주 작은 교회였습니다. 목사님과 교분이 있어 순서를 맡으려고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그 교회로 옮긴 한 집사님이 순전히 복음만 전하는 교회이니 한번 와보라고 해서 간 것입니다. 정말로 말씀을 말씀으로만 증거하는 순수한 교회였습니다.
예배 후 교제 시간에 교회 창립 멤버 중 한 분이 간증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40대의 남자 집사님이었는데 하도 은혜로워서 간략하게 옮겨 보겠습니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어머니가 자식 셋을 데리고 미국 이민을 왔습니다. 대학을 마치자 바로 비즈니스를 시작했는데, 물론 세상에서 형통하기 위해 돈만 목표로 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대학 동기로 연애 결혼한 아내와도 돈 문제로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먼저 예수를 영접하였는데 이분도 순전히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아내 따라 교회(존 맥아더 목사가 40년 이상 담임하는 Grace Community Church)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춘 성가대의 찬양은 은혜로웠지만 목사님이 강단에만 서면 이내 졸다가 끝나면 깨는, 말 그대로 교회 마당만 밟는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그 참혹했던 LA 폭동이 터졌습니다. 이분도 일단의 흑인 갱에게 구타를 당해 크게 다친 데다 생업의 터전인 가게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흑인에 대한 증오심은 하늘로 치솟았고 만약 손에 총이 있었더라면 흑인만 보이면 아무 상관없는 자라도 전부 쏘아 죽였을 것이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에 처음으로 맥아더 목사님의 설교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폭동을 주제로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설교 요지는 모든 이가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폭동을 일으킨 흑인은 당연히 잘못했지만 피해를 당한 자나 수수방관한 제 삼자라고 해서 그들보다 하나도 의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의롭고 그들은 벌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던 이분에겐 너무 큰 충격이었을 뿐 아니라, 성령이 역사했는지 흑인에 대한 분노가 이상하게도 조금 사그라졌다고 합니다.
믿음에 대한 눈이 조금 떠였고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데 교회 내 한 목사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어려운 사정을 들었고 너무 안타깝게 생각한다. 언제든 상담이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나고보니 놀랍게도 젊은 흑인 목사였습니다. 폭동의 당사자도 아니면서 같은 흑인의 입장에서 한 교인이 흑인에게 피해를 당하고 미워하고 있으니 대신 사과할 겸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흑인 목사와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십자가 복음 앞에 자신의 심령이 녹아내렸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였고 남은 인생을 그분을 위해 살려고 헌신했습니다. 당연히 아내와의 사랑은 더 깊어졌고 가정에 화목이 넘쳤습니다. 나아가 그 젊은 흑인 목사가 자기 처제와 결혼하는 바람에 손아래 동서가 되었습니다. 갈아 죽이고 싶도록 밉고 원수 같았던 흑인이 이제 피를 나누는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존 맥아더 목사의 노선을 따르는 목사님과 함께 그 작은 교회를 개척하여 지금껏 기둥 집사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LA 폭동은 흑인 로드니 킹이 백인 경관들로부터 무차별 구타를 당하는 바람에 촉발되었습니다. 그럼 당연히 백인들을 상대로 했어야 하는데 애꿎은 한인들만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흑인들이 다운타운의 백인을 목표로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었지만 미리 진압이 되어 백인 피해는 없고 대신에 그 도중에 있는 한인 가게들만 깡그리 당했습니다. 한인만 집중적으로 당한 이유를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지만 제 의견으로는 역시 돈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흑인 동네의 슈퍼마켓이나 주유소 등은 너무 위험해서 목숨 걸 각오까지 해야 하지만 대신에 흑인들이 돈을 흥청망청 쓰는 습성이 있어 그 수익은 아주 높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업소를 한인들이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한인이 흑인을 멸시했던 것입니다. 고객인지라 대놓고 차별한 것은 없지만 알게 모르게 표가 많이 났습니다. 예컨대 검고 투박한 손을 만지기 싫어 거스름돈을 손바닥 위에 얹어주지 않고 카운터에 놓아버리는 식이었습니다.
또 무엇보다 흑인 동네에서 돈 벌고도 그 지역사회를 위해 베풀어 주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침마다 벤즈 같은 고급 승용차를 몰고 와서 종일 자기들 돈을 벌어선 저녁에는 소리 없이 사라지는 꼴이 흑인들에겐 샤일록 같은 수전노로 비춰진 것입니다. 팔다 남은 빵을 무료로 나눠주고 지역주민을 알게 모르게 돌봐 준 한 가게는 오히려 갱단원이 앞에서 보초 서며 지켜주어 전혀 피해입지 않은 것을 보면 원인이 무엇인지 자명하지 않습니까? 간증하신 집사님도 틀림없이 그런 수전노로 분류되었기에 큰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지금 제 삼자의 간증을 옮겨 전하는 뜻이 흑인 목사의 사랑이나, 맥아더 목사의 뛰어난 설교나, 그 집사님의 영적 변환 과정을 살피자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그 집사님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말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지 않습니까? 어떤 기적입니까? 비즈니스를 다시 흥하게 한 것입니까? 예수 믿어 교회 창립 집사로 섬기게 된 것입니까?
그 기적은 바로 돈만 밝히던 인생을 오직 예수께 충성하는 인생으로 뒤집은 것입니다. 과연 이 일이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과 실행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힘든 처지에 빠지면 그저 어떤 수를 동원하든, 종교에 귀의하여 신에게 도움을 얻는 것도 포함하여, 그 곤경에서 벗어나려 할 뿐입니다. 어떤 잘못이나 실패도 오직 주위 사람과 여건 탓이기에 그것을 바꾸려 들지 절대로 자신의 심령까지 되돌아보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지금껏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근간으로 삼아왔던 가치관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와 정반대되는 가치관으로 바꾼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이 분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교회 출석만 했습니다. 틀림없이 폭동 후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분의 도움으로 빨리 비즈니스를 복원할 생각밖에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악인은 오직 흑인이며 자신은 지금껏 남에게 잘못이라곤 범하지 않은 의인이라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성실히 일해 돈을 벌어 자식을 잘 키우고 행복하게 살려는 가치관에는 어떤 하자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맥아더 목사의 설교에 그 흑인과 하나 다를 바 없는 죄인이라니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또 비록 목사이긴 해도 원수 같던 흑인이 사과하고 도와주겠다니 그 설교가 단순히 피해자를 위로하거나 백인들에게 당한 동일한 피해자라 할 수 있는 흑인 편을 드는 립 서비스가 아님을 어렴풋이 느꼈을 것입니다. 외부로만 향하던 모든 시선이 생전 처음으로 자기 내면의 영적 상태도 살펴볼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 열린 마음의 바탕 위에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광채가 그 견고했던 심령의 진을 파고 든 것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아니 찾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피해를 보상 받고 비즈니스 재기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가장으로서 막막해진 생계를 걱정하며 애통해 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여서 가장 합당한 아내와 교회와 결국에는 동서가 된 흑인 목사까지 다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LA 폭동 같은 참극이 끊일 새 없습니다. 전쟁. 테러, 질병, 자연재앙, 인간 재해 등등 신문의 일면은 연일 비극적 소식이 장식합니다. 그 비극들을 줄이려 정치가, 사업가, 사회학자, 구호단체, 종교인 등이 백방으로 모든 수를 동원합니다. 그러나 여전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빈발하고 피해도 커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문명은 찬란히 발전하는데도 그러합니다. 결국 갈수록 인간의 실망과 나태만 늘어납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선 아무리 참극 같이 보이는 일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종 간 화합하고 LA 시가 다시 복원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사회 전체가 풍요로워지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죄인을 만나주시는 일에 더 집중하십니다. 그것도 이름도 빛도 없는 영혼을 골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중심보다는 변두리를 찾아다니십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실패하여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자 곁에 더 가까이 계십니다. 철저하게 부서지고 낮아지고 깨어진 가난한 심령에 큰 관심을 갖습니다. 비록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음란과 거짓과 궤휼과 사기와 악독뿐인 영혼이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씻으시고 새로운 영으로 창조해 주십니다. 이 집사님처럼 원수 갚을 생각만 하던 자를 오히려 그 원수를 사랑하여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놀라운 기적을 그 영혼 안에 일으키십니다.
결국 사람은 두 종류로만 나뉩니다. 예수의 보혈로 죄 씻음을 얻어 중생한 자와 아직도 사단에 묶여 미혹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돈만 목표로 삼는 인생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 목표로 삼는 인생입니다. 전자는 모든 잘못과 실패를 주위 여건 탓으로 돌리는 자인 반면에 후자는 자신의 주위를 어떤 환난과 참극으로 둘러싸든 예수 안에서 그 영혼을 거룩하게 가꾸며 그분과의 온전한 교제만을 목표로 삼는 자입니다.
만약 그분이 LA 흑인 폭동에 아무 피해보지 않아서 아직도 돈만 밝히며 예수를 모르는 것과 비록 현실적 피해를 입었어도 예수를 주인으로 삼아 원수까지 사랑하게 된 것과 어느 쪽이 더 성공한 것입니까? 또 아마 모르긴 해도 그 폭동으로 주님 앞에 불려 나온 영혼들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천국의 영원한 생명책에 이름을 올린 것이 수십 억 불 경제적 손해와 가름이라도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6-18)
겉사람이 아무리 후패해도 속사람이 날로 새롭게 되는 일만한 기적이 과연 있겠습니까? 예수를 알기 전에는 납득은커녕 도무지 알지도 못한 영원한 진리이지 않습니까? 대신에 예수를 알고는 날마다 체험하는 생생한 은혜와 권능이지 않습니까?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5:1-4)
예수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인생이 완전히 끝나는 줄로만 알았을 것입니다. 또 실제로 그것만 목표로 살았습니다. 이 땅의 삶이 전혀 중요치 않고 천국으로 도피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날마다 짐 진 것같이 탄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혀짐을 진정으로 가장 갈급히 소원하기에 이 땅의 죽을 것들을 더 이상 목표로 삼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한 교리를 강조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는 실제로 이 땅의 짐만 지고 끝날 인생일 뿐입니다. 그 삶에 평강과 기쁨과 자유를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9/17/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