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백(紙白)에서 지백(知百)으로

조회 수 341 추천 수 8 2014.08.05 19:09:31
지백(紙白)에서 지백(知百)으로


드디어 저도 걸맞지 않게 아호(雅號)를 하나 갖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아직도 서울 신촌을 주름잡던(?) 20대 대학시절에서 하나 바뀐 것 없는데 어르신이라는 표식을 달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호는 할아버지들, 그것도 인격과 지위를 갖춘 분이나 갖는 것으로 여겼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한 저로선 계면쩍기도 합니다.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최근에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44년 만에 서로 소식을 알게 되어 가끔 만나는 이곳 LA의 동기동창 몇이 있습니다. 연식(年式)이 이젠 어지간히 오랜데다 너무 오랜만인지라 대놓고 이름을 부르기는 아무래도 경망스럽고 어색했습니다. 그렇다고 목사님 집사님이라고 하기는 친구로서 가까운 정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중에 한학(漢學)과 서예에 조예가 깊은 한 친구가 서로 호를 정해 부르기로 제안을 했습니다. 사실은 이전부터 만나던 친구들 사이에는 벌써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신참인 저만 문제였습니다. 결국 그 친구가 며칠 고심 끝에 근사한 호를 지어주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포해야 하는 목사로서 백 가지를 안다는 뜻의 ‘지백(知百)’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에게 과분한 아호 같아 저 또한 며칠 간 고심했습니다. 제가 성경의 진리를 통달했다고 어디 가서 내세울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도무지 그럴 수준도 되지 않음을 제 스스로 잘 알고 있는데 가당치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호에 대한 미련은 계속 남았습니다.

호란 원래 주위 친구나 지인이 지어주는 것으로 큰 하자가 없으면 그 호의를 받아야 하는 것이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또 지백이 마침 저의 본명인 박진호 앞에 붙이면 운율(韻律)도 그런대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이름이든 호든 기억하고 부르기 좋아야 하는데 그런 면에선 아주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그러던 중에 한글 이름은 그대로 두고 한자(漢字)만 바꾸자는, 사실은 한학의 전문가인 그 친구가 그래도 된다고 미리 귀띔을 해주었지만,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떠오르는 것이 하얀 백지라는 “지백(紙白)”이었습니다. 적힌 것 하나 없는 백지처럼 아는 것 하나 없다는 뜻입니다. 친구의 호의도 그대로 받고, 이름과 라임(rhyme)도 맞고, 그 의미까지 이젠 겸손히 바뀌었으니 일석삼조였습니다.

너무 기쁜 마음에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원작자로서 아주 좋은 뜻이라고 한자 바꾸는 것을 흔쾌히 용납해주었습니다. 또 호를 지어주면 원칙은 음주가무로 향응해야 하지만 목사니까 그럴 수는 없고 식사 대접 한번으로 족하다고 미리 다짐했던 터였는데, 각자가 한글과 한자 반씩 지은 셈이니까 그것마저 없던 걸로 하자고 통 크게(?) 양보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보다는 서로 먹은 것을 계산해주면 그야말로 정확하다고 농담하며 한바탕 웃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하얀 종이가 되려면 형용사가 앞에 나오는 백지(白紙)여야 할 것입니다. 한자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백(紙白)은 종이를 희게 만든다는 동사적 용법이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계획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낮아지려는 의도뿐이었는데 의미가 너무 좋아졌습니다. 더럽고 추한 욕심과 죄로 가득 찬 마음을 평생 동안 깨끗하고 순수하게 가꾸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듯이 어쩌다보니 저에게 가장 적합한 아호가 탄생했습니다.  

아무리 목사가 평생을 성경을 연구해도 결코 하나님의 진리를 다 알(知百)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나 행할 고백은 바울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빌3:12) 뿐이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반 발자국만 앞으로 나가도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하였도다.”(고전4:8)라는 바울의 고린도교회를 향한 것과 동일한 질책을 가차 없이 들을 것입니다.

신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紙白)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할”(마16:24)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자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알게”(엡1:17-19)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같이 위대한 사도도 이 땅에서 지백(知百)의 완성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정확히 말해 이 땅에서 잠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 외의 어떤 인간도 그 일은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고 고백합니다. “나는 오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빌1:13,14a) 나아간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도에겐 지백(知百)의 완성이 이미 확실히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6-18)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날까지”(빌1: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엡4:13)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날 즉,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면 모든 진리를 깨닫고 자유케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쉽게 말해 친구가 지어준 지백(知百)이라는 아호도 천국에선 마음 놓고 사용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저뿐 아니라 천국에 있는 모든 성도의 별칭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자의 일생을 감히 제 아호에 비유하자면 처음 믿을 때에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항복시킨 백지(白紙)에서 출발하여 꾸준히 지백(紙白)을 행하면서 천국의 지백(知百)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친구여! 자네가 지어준 그 호는 단지 사용이 유보되었을 뿐, 용도 폐기가 된 것이 아닐세. 아호 지어준 향응은 천국에 가서 함께 부를 찬양의 잔치로 대신할게... 그 때까지 함께 열심히 지백(紙白)을 함세.....


8/5/2014
지백(紙白) 박진호 목사

국중후

2014.08.06 01:12:56
*.243.238.62

언제나 멋지십니다.

박감사

2014.08.19 14:08:42
*.34.108.133

지백에서 지백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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