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로스 앤젤레스 한국신문 1면은 주말에 발생한 두 건의 한인 가정 살인 사건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나는 다섯 살난 딸 아이를 죽이고 자살한 폰나나 거주 이봉주씨 가정이고, 다른 하나는 처와 두 자녀를 죽이고 (장녀는 아직 살아 있으나 중태라 한다) 자신도 죽인 에코 팍의 김상인씨 가정이다. 두 어린 자녀를 차 속에 몰아 넣고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여 동반자살을 기도했다가 자신만 살아 남은 비정한 아버지의 기사가 우리 모두를 어이없게 한 지 일주일만의 일이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김상인씨의 경우 아내는 다니던 교회의 전도사이며 그는 열심히 봉사하던 집사라기에 의문이 더 크다.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그의 믿음이 열심을 따르지 못했던 걸까? 내 아내는, 죽으려면 저 혼자 죽지 처자식은 왜 죽이냐며 분개해 한다. 보도에 의하면, 그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큰 딸은 피아노를 잘 해 어딘가로 공연을 가기로 되어 있었고, 부부 사이에 말다툼이 잦았다. 미루어 짐작컨데 김상인씨는 돈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고, 장녀와 아내는 그러한 고민을 덜어 주기보다 그에게 무능한 가장이라는 모욕감과 가족조차 자신을 도와 주지 않는다는 외로움까지 얹어 주었던 것은 아닐까?
일전에 나는 오래 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로스 앤젤레스 한인 타운에서 함께 지냈음에도 약 칠 팔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마주친 적도 연락해 만난 적도 없었던 꽤 손아래 동료였다. 어쩌다 옛 동료들을 만나 회상에 잠길 때면 그의 생각이 나 소식을 묻고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다른 옛 동료에게서 그가 죽었다는, 그것도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진위가 확인되는대로 다시 연락하겠노라는 전화가 왔다. 며칠 후, 그 소문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옛 동료들이 함께 모여 간단한 추모예배를 드리고 난 후 그를 회고하는 자리에서 난 그가 그동안 무척 힘들고 외로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하나님께 너무나 죄송했다. 그가 스스로 목을 매달만큼 힘들고 외로웠음에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알려는 노력조차 없었던 나의 무관심이 그를 죽인 것만 같았다. 하나님께서 날더러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았다.
김상인씨 역시 그렇게 힘들고 외로웠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그를 만나 그의 고통과 외로움을 나누어 주었다면 이런 참극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주위에 그렇게 힘들고 외로운 사람이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은 당신 문제요 하고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알면 부담스러우니까 모른 척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래 전에 본 영화 "쿠오 바디스 도미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로마 황제의 박해를 피해 로마로부터 벗어나는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길에서 만나는데, 예수님은 로마쪽으로 발걸음을 떼신다. 그래서 베드로가 여쭙는다. 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너가 고난받는 내 백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내가 가서 그들을 위해 또 한 번 십자가를 지리라. 그 말에 베드로는 크게 깨닫고 로마로 되돌아가 순교당한다.
힘들고 외로운 이웃을 돌보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몫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일을 예수님께 떠넘기려 한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주께서 그들을 찾아가 위로해 주시고 그들의 형편을 살펴 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으로 우리의 할 몫을 했다고 여긴다. 과연 그러한가?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 14:15,16)
4.10.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