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예순에 가까워지면서 죽음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삶에 대한 미련도 예전만큼 크지 않다. 외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고백했듯이, 죽으면 천국에 가 주님과 함께 지낼 것이니 빨리 죽어도 좋겠단 생각마저 든다. 다만 남겨질 사람들 생각에 맘이 편치 않을 뿐이다.
거의 여섯 해 전에, 나를 여전히 이 땅에 살려 두시는 까닭이 무얼까 헤아려 본 적이 있다. 우리는 하마트면 죽을 뻔한 경험을 당한 후에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슴을 내리쓸며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감사한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내세를 믿지 않은 사람들로선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겠으나, 구원의 확신이 있고 천국 소망을 지닌 나로선 하나님께서 내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까닭이 궁금했었다. 그때 내린 결론은 내가 아직 정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겠노라 노력이라도 하겠다 다짐했었다. (有想 코너 #16 나를 살려 두시는 까닭 2005/6/7 참조) 하지만 지난 여섯 해 동안 실제로 그러한 노력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육 년이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건만, 이렇다 하게 내 보일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동안 두 차례의 갑상선암 제거수술을 통해 내 안에 제거해야 할 영적 암덩어리가 많음을 시사해 주셨음에도, 내 목 속의 암덩어리는 없어졌으나 마음 속의 죄는 여전히 남아 있다. 더 많이 더 크게 자라지 않도록 겨우 누르고 있을 뿐이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직 내가 살아 있음이 감사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연히 깨달았다. 그것은, 죽은 자에겐 더 이상 없는 기회가 산 자에겐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내 지난, 또는 아직도 저지르고 있는 과오를 반성하고 그 과오로 인한 피해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사과하고, 그 과오에서 돌이켜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여지껏 제대로 살지 못 했다면, 제대로 한 번 살아 볼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또는 여지껏의 삶에 큰 불만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내 이웃을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살아 볼 기회 말이다. 구사일생하고 기사회생했음에도 그 이후의 삶이 개선은커녕 과오와 후회만 늘어 갈 뿐이라면, 구사일생과 기사회생은 내겐 은혜가 아니라 저주일 뿐이다.
더 이상 내게 또다시 주어진 이 기회를 헛되이 흘려 보내지 말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욕되게 말자. 어떻게든 나를 살려 보시겠다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거듭 거듭 내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모른 척하지 말자. 어찌 아는가, 혹 내가 한 가지만 제대로 해도 그날로 당신 곁으로 데려가 주실지.
2011년 4월 5일
저희 할아버지도 아프셔서 저두 늘 암환자를 위해 기도한답니다.
행복, 기쁨 넘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