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
구리 료헤이의 창작동화 "우동 한 그릇"에(http://letmeloveyou.cafe24.com/noodle/n0.htm 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섣달 그믐 밤 10시가 넘어 가게가 파할 무렵 북해정이란 우동집에 한 여인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와 우동 한 그릇을 아주 죄송해 하며 주문합니다. 무뚝뚝하나 맘씨 좋은 주인은 손님과 아내 몰래 1인분 반을 삶아 한 그릇에 담아 내어 줍니다. 여인과 아이들은 아주 맛있게 나누어 먹고 한 그릇 값을 지불하고 나갑니다. 이듬해 섣달 그믐 밤 10시 경 똑 같은 장면이 재현됩니다. 그 손님을 기억해낸 주인 아내가 주인더러 서비스로 삼인분을 내어주자고 귀엣말을 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렇게 하면 손님이 거북해할 것이라면서 전처럼 1인분 반을 삶아 내어 줍니다. 이번에도 여인과 아이들은 맛있게 먹고 1인분 값만 치르고 나갑니다.
이 주인은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생색내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기분에 좌우되지 않고 무척 절제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도 손님에게 삼인 분을 내어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손님이 불편해 할 것이란 판단에 자신의 선심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 사랑을 베풀줄 아는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사랑을 보이고 싶어 합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고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상대가 혹 내 친절로, 내 호의로 인해 불편해 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강요 수준으로 갖다 안깁니다. 상대방의 심중을 내 좋은 대로 헤아리고 뿌듯한 자기만족을 즐깁니다. 행여 내 호의가 거절당하기라도 하면 토라지고 화를 냅니다. 잘해 줘도 싫다네 라며 빈정댑니다. 다신 잘해 주나 봐라며 맘이 독하게 바뀝니다.
상대를 위한 친절이었고 호의였다면, 그 친절과 호의는 그 모양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나의 그 친절은, 그 호의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만족을 위한,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란 깨달음이 듭니다.
우리는 자주 섬김을 입에 올립니다.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섬김이요 사랑인지에 대해선 그리 많이 얘기하고 생각하는 것같지 않습니다.
교회나 사회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봉사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상대로 봉사를 하다 보면, 솔직히 열받을 때가 많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자세가 너무나 고자세거나, 이것 저것 입맛대로 해달라 주문이 많거나, 제대로 도움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멀쩡한 사람들이 나와서 얌체처럼 도움을 달라거나 등등. 그럴 경우, 아니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고 이래! 도움받는 주제에 찬밥 더운밥 가리다니! 고마움도 모르는 파렴치한 같으니! 저런 사람 꼴보기 싫어 봉사 못하겠어! 라는 맘이 듭니다. 그러나 그 맘 또한 내가 결국 나 내세우고 내 기분 만족위해 출발했기에 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선 우리더러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서야 당신을 따라오라 하십니다. 자기부인을 십자가를 지는 것과 연결시키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흔히 "그래 그래 내가 십자가를 질께"라며 선심쓰듯 남들 하기 싫어하는 일 떠맡는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시집살이 혹독히 시키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처럼 내 삶에 없었으면 너무 좋겠으나 나의 현재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게 안겨진 불편을 안고 사는 그런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을 때는 아직 당신이 십자를 지기도 전이며,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던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단지 죽을 각오하고 따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을까요? 아니면 전혀 어리벙벙했을까요?
당시 십자가는 로마인들의 사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그 방법이 잔인하고 그 고통이 극심하기에 로마정부에 반항한 자들을 본보기로 죽일 경우에 사용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만이 나무에 매달려 죽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넘어, 수치와 모멸을 뜻했던 겁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에 대해 기술하면서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라고 쓴 것도 십자가는 곧 수치와 모멸의 대명사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수모를 당한다는 뜻이면 자기부인은 무엇을 부인하는 걸까요? 저는 그것이 내 세상적인 욕망을 (정욕과 물욕과 명예욕 등등) 죽이고 그곳에 거룩한 욕망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욕망 또는 성령충만코자 하는 욕망 또는 기도의 용사가 되고 성경을 줄줄 외우고자 하는 욕망 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전하고자 하는 욕망 등등) 채우라는 것으로 이해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은 금욕이나 희생적 측면보다 존재가치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아직 예수님을 만나기 전 나름대로 진리를 찾는답시고 개똥철학을 연구하고 있던 이십대 후반에, 모든 것을 다 내려 놓겠는데 한 가지 도무지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구였습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지금이 아니란다면 후세에라도, 영원히가 아니란다면 느 한 때만이라도 내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만은 도무지 버릴 수가 없더군요.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나 예수님 속에서 거듭태어나 하나님으로부터 내 존재가치를 인정받았고 계속 인정받고 있음에도, 아직도 하나님에게만이 아니라 세인들에게, 특히 내가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사라지지 않고 암암리에 내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지금 놀란 눈으로 쳐다 봅니다.
자기부인, 그것은 내가 잘나 보이고 싶은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내 멋대로 하고픈 내 존재적 욕구를 부인하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마음 곧, 그 수치스런 십자가를 달게 지신 그 겸허한 순종의 마음으로 채우는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그 마음이 있으면, 우리의 친절과 호의와 사랑은 내 증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진정으로 상대를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리라 믿어집니다.
내 믿음의 수준이 내가 얼마나 봉사하며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가는 내 신앙의 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죽어 있고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 있는가로 재어져야 함을 비로소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