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 보면 서로 상치되거나 뜻이 모호하거나 난처한 대목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대목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독자들을 당황하게 하고 난감하게 하며,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좋은 빙거로 쓰입니다.
저 역시 한때, 나를 성가시게 구는 예수쟁이들을 쫓을 심산으로 그런 대목들을 내밀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대목들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런 대목들로 인하여 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며 감복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천지와 동식물과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기술되있는데, 2장 4절부터 또다시 천지 창조의 대략이 서술됩니다. 문제는, 그 두 기사 간에 일부 창조 순서가 다른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문답'에서 제기된 애굽으로 들어간 야곱의 친족의 수 또한 그렇습니다. 출애굽기에는 분명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인이었다고 적혀 있는데 (1:5), 사도행전 7장 14절에는 스데반의 입을 빌어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5절, 26절에 예수님께서 그 옛날 다윗의 한 사건을 인용하셨는데,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그 사건을 보면 제사장의 이름이 서로 다릅니다.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 있는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바세바) 등은 전혀 자랑스런 인물이 아닙니다. 아니, 그 이름들은 감추고 싶은 이름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첫 목격자는 여인들입니다. 당시 여인들은 아이들과 함께 계수조차 받지 못했던 존재이므로 당연히 그들의 증언은 아무런 무게가 없었습니다.
복음서, 특히 마가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모습은 과연 그가 하나님인가 의심케 합니다.
이밖에도 논란이 되는 또 될 수 있는 대목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대목들보다도 왜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이 그런 부분들을 그대로 두었을까가 더 궁금했습니다. 다빈치 코드와 같은 책들이 교회와 성직자들이 교세를 유지내지 확장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은폐하고 조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정작 성경은 그 주장에 동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성경이 의도적으로 편집되었다면, 서로 상치되는 부분들은 일일이 고쳐 잡아졌을 겁니다. 어떤 쪽이 맞는 것인지 자신이 없다 하더라도 성경의 권위를 위해 정확성보다 일치성을 택했을 것입니다. 야곱의 자손이 칠십이든 칠십 다섯이든 누가 정확히 알아 시비를 걸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윗이 진설병을 얻어먹은 제사장이 아비아달이라 했다 하더라도 성경에 아히멜렉이라 적혀 있으므로 아히멜렉이라 한 것으로 고쳐 적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또, 다말을 위시한 수치스런 이름들은 당연히 빠졌을 겁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식시키는 데에 도움은커녕 해롭기만 한 사실이니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난 기록도 아예 없애거나 아니면 베드로와 요한에게 먼저 보이신 후에 여인들에게 나타난 것으로 순서를 바꾸었겠지요. 겟세마네 동산의 고뇌하는 모습대신 당당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이 훨씬 좋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숱한 도전과 시비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그 권위를 잃지 않은 데에는,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성경이 자체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어떠한 조작을 한 흔적이 없다는 것도 보탬이 되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잘나 보이고자 한 곳이 없으며, 오히려 아니 저러고도 하나님 맞아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 대목들을 곳곳에서 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예수님을 미화하고 신성화하고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목적은 단 하나,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어떻게 하면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영생복락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있어서는 성경은 놀랍도록 일관성과 통일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놀랍다고 한 것은, 성경이 서로 신분과 직업과 시대와 문화를 달리 하는 40명이 넘는 저자들이 약 1천4백년에 걸쳐 기록한 66권의 낱 권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마치 한 저자가 하나의 스토리를 펼치고 있듯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죽어 하나님께 야곱의 친족 수가 칠십인지 칠십 다섯인지 물어보면 하나님께선 이렇게 대답하지 않으실까요? 칠십이면 어떻고 칠십 다섯이면 어때? 그게 왜 그리 궁금하지?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꼭 알고 싶다면, 실은 칠십 둘이란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자로 잰 듯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실수의 여지를 주시는 거지요. 그 여지가 있기에 우리는 과감하게 모험을 해 볼 수 있고 커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당신을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자라면 당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10/10/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