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자연재해가 부쩍 잦아진 느낌이다. 이런 재해를 당할 때마다 "신의 심판"이라는 말이 떠오르고 말해지고 그에 따른 논란이 뒤따른다. 이곳에서도 박진호 목사님과 파아란 한은경씨가 그런 시각으로 뉴올린즈 재해를 다루었고 김주영씨란 분이 한은경씨의 글에 반박하는 글을 실었다. 그동안 이 논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온 나는 김주영씨가 영어로 쓴 한은경씨의 글을 읽고는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자유 게시판에 영어로 김주영씨에게 답글을 보냈다. 내 생각에 김주영씨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듯하여 이 논제에 대한 내 소견을 밝히고자 한다.
내게 믿음이 생겨 성경이 읽혀지게 되자 곧장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인간의 역사가 실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간사에는 우연이 너무나도 많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주 우발적으로 여기까지 와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실 그것이 무신론자들의 주장이다. 인간의 탄생 자체가 우연이란다. 그러나 하나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은 필연이다. 어느 것 하나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에 따라 시의 적절하게 펼쳐진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누가 복음 2장에 보면 당시 로마 황제였던 시저가 자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전 지역에 인구조사령을 내린다. 그 영에 따라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는데, 당시 산달이 가까웠던 마리아는 하필이면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눕힌다. 사관에 있을 곳이 없어서 그랬다 한다. 이 기록을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예수 탄생 약 7백년 전에 쓰여진 미가서 5장 2절의 기록과 대조하면 우리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산기에 맞추어 로마 황제가 호구령을 내리게끔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갑자기 내가 이런 설명을 장황하게 하는 까닭은,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만큼은 일견 우연인 듯한 사건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필연을 볼 수 있어야겠기에 이다. 뉴올린즈에서 동성애 축제가 있기 이틀 전에 태풍이 이 지역을 강타해 침몰시켰다는 사실을 우연으로 여기기보다 그 둘 사이에 필연적인 함수관계가 있다고 보고 그 함수관계를 풀어 나가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바른 태도라 믿는다.
(나는 여기서 유독 동성애를 질타할 의도는 없다. 왜냐하면 몇 달 전의 동남아 해일과 며칠 전의 파키스탄 지진 또한 하나님의 간섭이라 믿기에. 뉴올린즈 재해를 동성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 규정한다면 다른 재해들에 대해선 뭐라 설명할 것인가?)
우리에게 닥친 재해를 그저 우연한, 재수 없어 당한 일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죄악과는 무관한 "자연재해"이므로 우리는 무심하게 계속 죄를 거듭할 것이다. 아니, 아마도 우리에게 당한 재해로 인하여 우리는 죄를 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재해가 우리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요 벌이라 여긴다면, 우리는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 찔림을 받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것이다.
그러면 뉴올린즈에는 모두 죄인만 살고 있는가? 의인은 없는가? 다른 지역에는 죄인이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당장 이런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물론 죄인은 곳곳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지역에만 징계를 내린 것은 하나님이 불공평하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비로우셔서 이다. 하나님께서 공평과 공의를 세우고자 하신다면 살아남을 자 어디 있으랴. 하나님의 자비는 뉴올린즈 재해에서도 여전히 드러나고 있다. 실제 사망자수는 애초 예상했던 수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물론 살아남은 사람들은 졸지에 그들의 모든 소유를 잃었다. 하지만 그들은 목숨을 건졌고 그들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지 않은가. 영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죽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적절히 처리해 주실 것이다. 악인은 지옥으로 보내고 의인은 낙원으로 데리고 가 마지막날까지 편히 쉬게 해 주실 터인데 무엇을 염려하는가? 혹 당신은 이 땅의 죄악과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이 죽어 예수님 곁에 있는 것보다 낫다 여기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고통 속에 그냥 내팽개쳐 두실까 염려하는가?
창세기 18장 하나님과 아브라함간의 대화를 읽어 보고 선지자 하박국과 하나님과의 문답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선 죄없는 몇 의인들 때문에 죄악에 대한 징계를 철회하시지는 않는다.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가려 주시고 숨겨 주시며 피할 길을 주신다.
어떤 이들은 이번 재해가 동성애자들(로 대표되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면 하나님이 속좁고 성질 더러운 분으로 비칠까봐 염려되나 보다. 그런데 율법서들을 보면 하나님은 무척이나 깐깐하고 꼼꼼한 잔소리꾼이다. 특히 레위기를 보면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아주 세밀하게 규례를 하달하신다. (모세도 대단하지, 그걸 다 듣고 그대로 기록했으니!)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이 좀팽이 소인배인가?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 하나님이 그토록 꼼꼼하게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안이 하나님과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반증일 뿐이다. 그리고 그 사안은 대부분 우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며 하나님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만들고자 하시는 일들이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당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걱정하셔서 우리의 죄를 묵과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이 얼마나 아량이 넓은지 얼마나 괜찮은 신인지 증명하는 데에 있지 아니 하고, 이런 재해를 두고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에 있다고 믿어진다. 단 한 명이라도 이것을 죄에 대한 경고로 받아 들여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 쉽게 하나님의 심판 운운하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의 참 의중을 어떻게 그리 쉽사리 알 수 있는가?" 그런가? 우리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있을 터인데도 하나님의 참 의중을 알기 어렵다 하는가? 하나님은 애매모호하지 않고 분명하고 정확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의중을 오해하거나 착각하시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하기에 필요하다면 우리가 제대로 알아 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의중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영생토록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적절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총동원하실 것이다. 설령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일시적인 불편과 고통을 겪게 된다 하더라도.
"정죄와 비난은 십자가로 향하는 길이 아니다." 맞는 말일까? 정죄는 오직 하나님께 속하며 비난은 사탄에게 속한다. 우리에겐 정죄권도 비난권도 없다. 사탄의 비난은 십자가에서 그 근거를 잃었고 하나님의 정죄는 십자가에서 축복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십자가로 향하는 길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십자가로 이끄는가? 죄를 용납하거나 내버려두거나 심지어 조장함으로써인가? 그렇게 아량을 베풀면 사람들이 어느날 십자가 아래 무릎꿇고 예수님께 용서를 빌던가? 아니다, 천만의 말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끄는 것은 우리 죄에 대한 성령의 책망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그것도 죄인의 괴수라는 자각과 죄책감이 들고 그 무게가 우리를 짓누르지 않고서는 단 한 사람도 진정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지 않는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그 죄사함을 먼저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그들에게 우쭐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우리처럼 십자가로 이끌기 위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여러 재해들을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의도적인 하나님의 간섭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왜 그런가를 풀어가는 도중에 우리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날 것이다.
김주영씨의 친구 가족은 태풍 상륙 이틀 전에 뉴올린즈에 짐을 풀었다가 겨우 몸만 건지고 이재민 대열에 끼었다고 한다. 그 친구는 목사인데 그곳에 있는 신학교에 다니기 위해 갓 이사했다는 거였다. 이틀 전이면 아무 것도 모르고 또 각오도 없이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자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갔을 것이다. 마치 아가보의 불길한 예언과 뭇성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바울처럼 (행 21:10-14). 그리고 아마도 자신들이 그곳으로 "보내어진" 이유를 깨닫고 감사와 기쁨으로 생존자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그 친구분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안에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선 그의 필요를 다 채워 주시며 그 수고를 몇 배로 갚아 주실 것이다.
10/14/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