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아침에 혼자서 등산을 다녀 왔습니다. 정상이 그리 높지 않고 또 길이 잘 닦여져 있어서 더러는 달려서도 올라 가고 산악 자전거를 타고도 올라가는 비교적 쉬운 등산로인데, 산행에 익숙치 않은 제겐 그 정도도 힘이 들어 몇 번이고 중도에 그만 내려 가 버릴까 유혹이 일더군요. 처음엔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걸음을 옮겼고, 나중엔 돌아 가기엔 억울한 맘이 들만큼 많이 올라 왔기에 계속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예전엔—그리 자주 등산을 다니진 않았지만—오르막 길이 힘들 때마다, 만신창이 된 몸으로 무거운 형틀을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던 예수님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난 겨우 이 정도로도 이렇게 힘든데 예수님께선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 정도의 어려움도 이겨 내지 못 하면서 어떻게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단 말인가! 그러면서 이를 악물고 산을 올랐더랬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이번에도 어김없이 떠오르는 골고다 언덕길 생각을 눌러 버렸습니다. 겨우 이 정도의 어려움으로 골고다 길까지 떠올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 대한 모독이라 여겨졌으며 또 스스로에게도 너무 나약한 모습으로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다리가 무겁게 느껴지고 호흡이 힘들 때마다 잠깐 멈춰 서서 저 아래를 바라보니 눈에 들어 오는 범위가 조금 전보다 더 넓고 그에 비례하여 후련함과 기쁨도 더 큽니다. 눈을 돌려 정상을 잠시 바라본 후 더시 걸음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잘 다져진 몸매의 청년이 가뿐 가뿐 뛰어 올라 갔습니다. 제대로 복장을 갖춘 바이커들에게 간간이 길을 비켜 주었습니다. 손에 짐을 든 중년 커플도 절 지나쳤습니다. 등짐을 진 거의 동년배의 남성들에게도 길을 내주었습니다. 이번에는 마른 체격의 젊은 여자가 뛰어서 절 지나쳤습니다. 그들로 인해 어쩔수 없이 일말의 열등감과 패배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을 추스려 행보를 빨리 해 봅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 해 다시 걸음이 느려집니다.
다시 유혹이 입니다. 그만 내려 갈까? 정상에 가면 뭘 해, 도로 내려올 것을. 도중에 내려간들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누군가가 산은 내려오기 위해 올라간다 했던가? 참 바보 같은 짓이지 뭐야.
여기서 관두긴 억울하잖아. 내가 정상에 가 보아야 아직 정상을 밟아 보지 못 한 사람들에게 정상에 대해 알려 줄 수 있고 나중에 그들과 함께 올 때 그들을 인도하고 독려해 줄 수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계속 가. 물론 도로 내려올 것이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정상에 대한 궁금증에서 놓여 날 수 있잖아.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간째 산길을 오르고 있습니다. 잠시 후, 저 아래에서 저를 지나쳐 달려 올라간 청년이 이번엔 저를 지나쳐 달려 내려갑니다. 그로 인해 이번엔 조금 더 강도 높은 열패감이 듭니다. 열패감의 원인은 제 속에 있는 경쟁심이란 것을 압니다. 내가 그와, 아니 그 누구와라도, 누가 더 빨리 정상에 다녀오는지 경쟁하고 있지도 않은데 왜 그런 경쟁심으로 그런 열패감을 느껴야 한단 말인지? 그만큼 내가 세상 가치관에 세뇌당한 겁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모든 것에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관계가 아니라 경쟁관계를 조장하고 요구하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보다 나은, 성공적인 삶을 얻으려면 서로 발전적 경쟁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발전적 경쟁을 하여 우리의 생활이 편안해질지는 모르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사람됨과 이웃과의 관계는 더 나빠질 뿐입니다.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수평선상에 놓지 않고 수직선상에 놓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Y축이 아니라 X축에 놓으려 합니다. 이런 도식에 빠진 사람들은 베품조차 수직적 사고 방식으로 이해하고 행합니다. 이런 자들에게서 베품을 얻는 사람들은 모멸감과 열패감과 무력감과 자괴감을 모면할 수가 없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들의 위에 서서 가진 자, 승자의 아량을 거드름피며 베풀리라 작심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으려면 세상이 부추기는 경쟁구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축과 하나님과의 축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나와 너를 수평선상에 놓으면 베품은 나눔이 되고 나눔이 있는 곳에는 사랑이 자라게 됩니다.
성경, 특히 서신서들에는 믿음을 경주 또는 달리기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주라고 하여 세상의 경주처럼 누가 더 빠른지를 재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 경주가 아닙니다. 믿음의 경주는 하나님을 향한 나 개인의 경주입니다. 굳이 이겨야 할 상대를 찾자면 그 상대는 아직도 우리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우리를 계속 세상에 묶어 두고자 하는 옛 자아입니다. 그렇기에 이 경주는 얼마나 빨리 목표에 도달하느냐가 아니라 아무리 늦더라도 목표에 도달할 것을, 아니 설령 도중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아니 하고 끝까지 목표를 향하여 달려 갈 것을 요구합니다. 즉 이 경주는, 우리의 경주 기술이나 능력을 시험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의 인내와 끈기와 충성을 시험하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 기자들은 경주라는 표현을 썼을까? 아마도 딴 생각말고 전력 질주해야 할만큼 우리의 구원 문제가 급박하고 절실하며 중차대한 사안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가 가까이에 들어 왔고, 두 다리에는 새 힘이 솟았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정상입니다. 지나 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정상엔 조그만 전시관도 있고 수세식 화장실도 있고 야영장도 있고 모여 앉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소도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곤 무척 아름답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 말에 문득 변화산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예수께서 세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까닭은 베드로의 원대로 그들로 그 곳에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곳에서 예수님의 영광의 본체를 목도케 하고 후일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증거시키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상에 오르면 분명 내게도, 내려 가 나를 증거하라, 하실 터인데, 그렇게 힘들여 올라 왔는데 그렇게 아름답다는 정상에서 좀 즐기다 가겠다 하면 나무라실까?
잠시 정상이란 곳을 생각해 봅니다. 정상은 위험한 곳입니다. 움직일 공간이 많지 않기에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져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 있습니다. 정상엔 다른 사람이 없기에 외로움에 자칫 딴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모든 사람이 발아래 보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 보기에 교만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당신을 경험한 사람을 아래로 내려 보내십니다. 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을 증거하고 그들을 당신께로 인도하라 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아직 내려가지 않겠다고 떼를 쓴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덜 경험했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느끼지 못 했다는 증거이겠지요.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여기 저기에 먼저 올라 온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지니고 간 영양떡 한 조각으로 요기를 하면서 짧은 휴식을 취한 후,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엘리야를 떠올리며 아래로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하산길은 훨씬 쉬울 것이란 기대완 달리 오히려 하산길이 훨씬 힘들었습니다. 도중에 정상을 향해 오르는 건장한 중년 부부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딴에는 지름길이라 생각한 길로 내려왔음에도 출발점에서 그 부부를 다시 만났습니다. 경쟁구도에 빠지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경계를 하고 내려 왔음에도, 오랜 습관을 어쩌지 못하고 또다시 열패감을 살짝 느꼈습니다. 아무래도 테니스와 조깅을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2010년 12월 8일
"맨 얼굴도 예쁜" 자매님과 동행하지 않으셨으니 힘들지요!
다음 번에는 꼭 손잡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