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쓰임받는 사람

조회 수 306 추천 수 0 2016.09.12 23:56:57

많은 신자들이--아마도 대다수가--하나님께 "크게" 쓰임받고 싶어 합니다. 스스로를 위한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남들을 위한 축복기도에서도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려고"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이란 위로를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크게" 쓰임받는 사람인지, "크게 쓰임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물어 본 바도 없고 또 들은 바도 없는지라 정확하게 말할 순 없으나, 어지간해선 그 부류에 끼일 순 없을 듯싶습니다. 설령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긴다 하더라도 교인수가 만 명은 넘는 대형교회의 스타목사가 되어야 하고, 장로로서 한 나라의 대통령은 못 되더라도 장관 정도는 지내야 하며, 대기업의 총수 정도는 되어야 하는건가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크다 작다란 말이 비교를 허용내지 요구하는 데다가 상당히 주관적인 말이어서 사실, 어느 누군가에겐 큰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턱없이 작은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 보기엔 하잘것 없는 것이 본인에겐 대단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또는 누군가를 크게 써주십사 간청하는 이의 머리 속에 있는 "크게 쓰임받는" 인물은 거의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크게 쓰임받고 싶은 그 속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크게 쓰임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묻지 않듯, 왜 크게 쓰임받고 싶은지 또한 묻지 않습니다. 아니, 그 이유를 묻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지요. 너무나 당연한 말에 왜라니 하고 오히려 물음표를 던집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이고 꿈은 크게 가지랬는데 크게 쓰임받길 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구요.

 

여기서 우리는 멈추어 깊이 오래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러한가고.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배운 논리이고 철칙이긴 한데, 그리고 세상은 여전히 그런--많으면 많을 수록 좋고, 길면 길수록 좋고, 높으면 높을수록 좋고, 크면 클수록 좋다는--말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긴 한데, 하나님 나라의 표상인 교회에서도 타당한 말인지, 하늘나라 백성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인지를. 과연 하나님께서도 그리 여기시는지를. 

 

제가 읽어 본 성경에서는 그런 말을, 그런 철칙을,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되는 말은 많이 만났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하지만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고 싶다는 것은 다르지 않는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인데. 예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지 않으셨나?

 

그렇다면 이렇게 묻겠습니다. "작게" 쓰임받으면, 내 쓰임새가 드러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구현되지 않는지?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데에 나의 쓰임이 크고 작음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정말 나의 속내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현하는 데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데에 있는 것인지?

 

꽤 오래 전에 어떤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최근에 거듭났노라고 앞으로 남은 생을 하나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말하면서 함께 일하지 않겠냐더군요. 무슨 일을 하느냐니까 엠웨이라는 다단계회사에서 다이아몬드인지 플래티늄인지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다더군요. 그래서 돈도 꽤 많이 번다고요. 그래서 그것 참 잘 되었다고, 마침 후원자가 필요한 사회사업이 있는데 우선 그것부터 좀 도와 달라고 반색을 하며 부탁을 했지요. 그랬더니,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좀 더 크게 마련한 다음 화끈하게 지르겠다, 도와 주려면 제대로 도와 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더군요. 그래서, 그땐 그렇게 하고 지금은 도울 수 있는 만큼이라도 도와 달라고 다시 간청했으나 더 이상 얘기는 진척되지 않고 뜬구름 잡는 얘기만 조금 더 듣다 씁쓸하게 헤어졌었지요. 그때 그 사람의 속내는 남을 돕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있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비단 그 사람 뿐만 아니라 기부했다고 매스컴에 얼굴 내미는 사람들의 태반의 속내가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대놓고 보도를 조건으로 기부를 합니다. 그들은 그래도 솔직하기나 하지요.

 

분명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가치기준에 따른 구분이지 하나님의 구분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두고 우리가 감히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눈치조차 채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크게" 쓰셨습니까? 그렇다면 눈먼 바울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준 아나니아는요? 사도 바울을 "크게" 쓰시기 전에 하나님께선 아나니아를 먼저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의 쓰임이 없었다면 바울의 쓰임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도 아나니아의 쓰임은 작고 하찮으며 바울의 쓰임은 크고 중요하다 말하겠습니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그렇게 크게 쓰임받고자 하는 속내가 무엇입니까?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란 걸 내세우고 인정받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만인에게 길이길이 추앙받고자 하는 욕구에서가 아닙니까?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처럼 내 명예욕이 아니란 말입니까? 생명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아 사람들의 입에도 두고두고 회자되고 싶은 것 아니냐고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특히 현세에 우리 곁에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고 있다 하는 자들 중에, 자신의 영광을 치장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끌어들이고 있는지요! 자신의 치적이 자신의 개인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재가하시고 복주셔서 이루어진 합당한 것임을 믿게 하려고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고 입바른 소릴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유도하지만, 실은 그것은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신을 향한 영광의 박수갈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인간은 영웅호걸을 원하나 하나님께선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사사기의 사사들을, 모세와 다윗을 영웅이라 여기십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영웅전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웅을 넘어 감히 신이 되려다 주어진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이란 피조물과 그 사람에게 그 영광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바라는 인간은 대단한 영웅이 아니라 겸손한 종인 것입니다. 그러니 크게 되고자 하지 마십시오. 크게 쓰임받고자 하지도 마십시오. 그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써주시기만 하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은 없노라 아뢰십시오.

 

하나님의 일에 크고 작은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으시고 낭비도 없으신 하나님의 일에 어찌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구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구분은 우리가 우리의 욕심으로 임의로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열을 양보하여 하나님의 일에 크고 작음의 구분이 있다 합시다. 그런데 모두가 다 크게 쓰임을 받기를 원하니 하나님께선 작은 일은 누구에게 맡기셔야 하는지요? 천사에게요?)

 

우리는 인식하지 못할지언정 하나님께선 지금 저와 여러분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듯 "대단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구분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선 우리 모두를 똑같이 크게 소중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고 대기업을 운영하고 대형교회를 목회하는 일이나 자신의 가정을 잘 다스리고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이웃에게 정직하고 선행을 베푸는 일이나 동일하게 하나님께는 크고 소중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작다고, 하찮다고 생각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2016.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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