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죄를 죄로 인식하는 것과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애석하게도 별 개의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까닭이 그것이 죄인줄 몰랐던 데에 있고 그래서 우리가 그것이 죄인 줄 알기만 하면 우리는 그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때로는 우리가 그것이 죄인 줄 몰랐기에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것이 죄인 줄 알았더면 하지 않았을 거라는 항변을 한 번쯤은 해 보셨거나 들어 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이 죄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린 죄를 짓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짓기도 하고,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짓기도 하고, 죄송해 하면서도 짓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짓기도 합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너도 나도 다 죄 짓고 사는데, 우리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선 관대하거나 잊고 있으면서도 남이 지은 죄에 대해선 인색하고 셈을 따집니다. 마치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종과 별반 다르지 않고, 제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어 주겠다 하는 자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 비유 속의 기도하는 바리새인과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죄인이긴 일반이면서도 우리는 어떻게든 저 사람보단 의롭게 보이고 싶어서 죄의 대소와 경중을 따집니다. 누가 내 죄를 물으면 난 그보다 더 큰 남의 죄를 내밀며 내 죄를 가리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선 살인한 자와 형제에게 “라가”라 미련한 자라 하는 사람들의 죄를 등가시하셨고, 실제로 간음하는 자와 맘 속으로 음욕을 품었을 뿐인 자를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렇게 죄에 엄격하신 예수님이셨건만,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을 변호하셨고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아니 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시면서 죄인들과 가까이 지내셨습니다.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으며, 후일 자신을 팔아 넘길 유다를 제자로 불러 그가 자신을 배반할 때까지 함께 지내셨으며, 뭇사람의 눈을 피해 물을 길러 나와야 했던 사마리아의 부도덕한 여인을 찾아 가셨고,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죄로 인해 병을 얻었다 여겼던 중풍병자나 소경이나 문둥이들을 찾아가 낫게 하시고 그들과 교제하셨습니다.

예수께선 죄인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도 왜 죄를 지었느냐 따져 묻지도 나무라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사람들을 위선자라 독사의 자식이라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죄인들에겐 먼저 다가 가셔서 그들을 따뜻이 품어 주시고 그들의 육신의 병과 마음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마련인 것을 아시는 예수께선, 우리에게 죄를 인식시키고 그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는 노력 대신에-그 역할은 율법의 것이었기에—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사랑과 그 사랑의 핵심인 용서를 가르치고자 애쓰셨습니다. 알면서도 죄를 짓는,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죄짓지 말라는 말보다는 서로 용서하라는 가르침이 훨씬 실제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누구에 앞서 바로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안 사도 바울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로마서를 통해 우리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2.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자꾸 잊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아직도 여전히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아니 우리가 죄 가운데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을 때에 주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우리가 기대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하는 중에,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는 복음의 진리를 잊고 삽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에겐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죄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노라 합니다. 우리의 범죄가 궁극적으로 주께만 행해진 것이라면 죄 사함을 결정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며, 하나님께선 아마도 벌써 사하여 주셨을 그의 죄를 어찌 내가, 마치 그를 용서하고 안 하고가 내 권한인 듯이 따져 묻고 있는지요. 예수께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신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그 말씀은 우리가 서로를 용서할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지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빌미를 주시고자 함이 아닐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죄 사함의 권세를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신 것은 그 권세를 적극 사용하라는 즉 누구의 어떤 잘못도 다 용서해 주라는 적극적인 명령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누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 자의 죄는 약속대로 그대로 두실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준 자에게 그러셨듯이 우리, 하나님께 생명을 빚진 우리에게도, 제대로 셈을 해 달라 하실 겁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 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예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막 11:25)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눅 6:37)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눅 11:4)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 3:13)

우리끼리의 셈이 먼저라 하십니다. 예수께선 우리가 서로를 먼저 용서하여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임을 주지시키셨습니다. 용서해 줄 자 용서 못할 자 가리지 말고,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피차 용서하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즉 아무 것도 따져 묻지 않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가 나의 용서를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음에도 오직 긍휼함으로 그리 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더러 서로의 죄를 묻고 정죄하고 징벌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역할은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것, 그뿐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권한 즉 심판과 징계의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3.
물론 이렇게 말하는 저도, 나영이에게 몹쓸 짓을 한 조두순을 능지처참해야 마땅하다며 화를 풀풀 내는 걸로도 모자라, 그런 놈은 절대 용서해 주시 마시라고 하나님께 부탁까지 드렸습니다. 나영이가 내 딸이었다면, 아마도 녀석을 내 손으로 먼저 죽이겠다 덤볐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용서에 대해 의문이 많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셨는데,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셨다는데, 회개하노라 하지 않는데, 전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러기에 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 하는데, 그래도 용서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용서가, “가라, 온전히 보내 주마, 하지만 다시 내 앞에 나타나는 날엔 그땐 죽을 줄 알라”는 정도로 될 일인가, 아니면, “난 다 잊었어, 그러니 당신도 잊어, 그러고 앞으로 잘 해 보자구”까지 해야 하는가?

사실 제가 그 답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답은 이미 아는데, 지금 당장 용서하기엔 내 속의 증오와 분노가 너무 커서 이 핑계 저 핑계로 용서를 미루고 싶은 거겠지요. 그런데 그러는 동안 우리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신앙서적 읽고 새벽기도까지 다닐 경우 특히 그러합니다.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또는 내가 짓는 죄는 나무랄 만한 죄가 아닌 듯한 착각 말입니다. 그런 착각에 빠지지 않고서야 어찌, 내가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가 계속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라 하며, 그를 그리 혹독하게 나무라는지요? 나도 늘 죄를 짓고 내 죄도 그의 죄에 못지 않게 나무랄 죄라 여기고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 죄에 대한 추궁을 받지 않을 뿐이란 점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죄에서 내 죄를 들여다 보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만을 간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죄 지은 자에게도 용서를 베풀고 그들과 화평을 이루려 하거늘, 어찌하여 동성애자들에겐 용서를 아끼며 그들과 담을 헐기는커녕 더 높고 두텁게 쌓으려 하는지요? 나를 포함한 모든 죄인들 중에 유독 그들만을 구별하여 차별하면서도 당연시할 수 있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지요?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율법서로 통칭되는 소위 모세 오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킬 것을 요구하신 숱한 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켜 행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라도 어기면 아니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선 예수께 우리의 모든 죄를 지워 그를 죽임으로써 우리 죄를 다 사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유독 동성애죄 만은 안 지셨다고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선 또한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선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에 대한 처분을 묻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구경꾼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고, 홀로 남겨진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며 보내셨습니다. 그때 예수 앞에 세워진 사람이 남자와 행음하다 붙잡혀 온 남자였다면 예수께선 달리 말하셨을까요?

예수께선 성령훼방죄 말고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의 죄는 없다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동성애자들끼리의 성행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 하시렵니까?

4.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들 말입니다. 독사의 자식이요 마귀의 자식이요 지옥의 자식들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용서해 주고 말고 할 상대가 아닙니다. 되도록이면 그들로부터 떨어져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의 영향권 안에 있으면 그들로부터 지켜 주십사 간구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다시 해 보아도, 동성애자들이 그런 악인은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동병상련의 정과 연대감을 느끼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대상이지 질시하고 반목하고 미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 맞다면, 그가 자신의 성적 성향으로 인해 고민은 할지언정 결코 동성과 섹스는 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신자됨 또한 부정하지 않으려면 그 생각은 버려야만 합니다. 저도 때론 내가 예수 믿는 사람 맞나는 의심에 싸이도록 죄의 유혹에, 그것도 동일한 죄의 유혹에 빠지곤 하니까요. 앞서 얘기한 것을 다시 얘기하지만 우리들은 묘한 착각을 하며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런 착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거니와 지적받더라도 그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사단의 소행이 틀림없을 듯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하여 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란 착각 말입니다. 그런 착각에 사로잡혀 있기에 죄인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또 교인 중에 넘어지는 자를 정죄하는 일이 당연시내지 권장되기까지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다니는 교회에 술집 호스트나 호스테스가 있습니까? 몸팔아 사는 남녀들이 있습니까? 주먹팔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노숙자들이 있습니까? 그밖에도 사회적으로 지탄받거나 기피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있다면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과 처지를 숨기고 있을 겁니다. 행여 발각될까 조마조마해 하며 되도록이면 사람들과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예배와 기도만 드리고 갈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바리새인들이 되어 있고 탕자 비유의 맏아들이 되어 있기에 그런 일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그것이 잘못 된지도 모르고 지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이따금 그로 인해 고뇌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영접했는데도 이제는 그의 제자로 살고자 함에도 여전히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자주 죄의 권세에 굴복케 된다는 사실을.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 세월을 넘긴 지도 한참이건만 아직도 내가 이럴진대, 이제 막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눈총을 주고 벽을 쌓고 수근댈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기다림과 관용과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급해 하지 마라, 우리 중 아무도 죄에서 자유로운 자 없다, 오랜 죄의 습관이 그리 쉬 바뀌겠는가, 넘어질 수 있다, 용서와 새 힘을 구하고 다시 일어 서고 다시 돌아와 함께 가자, 이런 말들을 해주는 믿음의 선배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5.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교회 안에 동성애자가 있을 수 있어, 말씀대로 살겠다면서 어떻게 동성간의 결혼을 허락해 달랄 수가 있냐고, 틀림없이 무늬만 기독교인일 거야,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동성애자와 기독교인은 상치되는, 양립할 수 없는 신분이라 여겼습니다. 나도 여전히 죄짓고 있으면서 어떻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내가 짓는 죄는 누구나 짓는 소소한 죄라며 전혀 죄로 여기지 않았던가 봅니다. 즉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경중을 정하고 그에 따라 형량을 언도하는 판관의 자리에 스스르로를 앉혔던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외엔 아무도 앉아서는 안되는 자리인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선 과연 내 죄는 눈감아 주시고 동성애자들의 죄는 벌하실까요?

이전 글 “우리가 그런 부모가 됩시다”에서 내가 동성애자라면 내 개인의 성적 즐거움과 행복을 포기하고 좋은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 낳아 기르고 살겠노라 했었습니다. 설령 여자에게선 전혀 성적인 끌림이나 떨림을 못느낀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남녀의 결혼에도 대다수의 부부가 만족스런 성생활이 없어도 대체로 만족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기에, 친구같은 느낌이라도 든다면, 아니 십분 양보하여 함께 있기 싫은 사람만 아니란다면, 그 여자와 결혼하여 사는 것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사는 것보다 바람직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성적 기능에 장애가 있지 않는 한, 사랑의 감정 없이도 성행위는 가능하기에 자녀도 낳아 기를 수 있을 것이니, 사랑 없는 결혼을 한 많은 정상적인 부부들처럼 아이들 키우는 재미와 보람으로 살아 가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들 눈치 보며 숨어 살거나 혹은 권리를 내세우며 싸우며 사는 것보다 속 편하고 현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 제 계산일 뿐, 그것을 그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겠지요. 적지 않은 부부들이 성적 불만으로 인해 바람을 피고 이혼도 할만큼 한 개인의 성적 행복은 중대한 사안이기도 하니까요.

6.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우리가 동성애자에 대하여 유난히 엄격한 이유는 그들의 죄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 아닐지요? 그 다름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지요? 우리는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우리와 다른 것에 대한,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이 소위 “정상인”들의 안녕과 이익을 저해하지나 않을까, 그들을 용납하다 보면 그들의 수가 하나 둘 늘어나 정상과 비정상의 구별이 없어지게 되고 급기야 정상이던 것이 비정상이 되지나 않을까 두려울 테지요. 하지만 그 두려움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근거하여 생성된 것이며, 우리는 그 두려움을 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장애인들에게, 나환자들에게, 심지어 외국인들에게 우리는 그렇게 대했습니다. 그들을 이해하고 품어 안으려는 노력은 없이 오히려 그들과의 사이에 벽을 쌓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얘기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특별히 잘못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와 달랐고, 그 다름이 우리를 불편하게 했고, 그들이 우리에게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선입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편견과 선입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어쩌면 당연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 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우리를 가리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그들을 가려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품어 준다 하여 우리 자녀들이 우리 주위 사람들이 다 그들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그들이 원하여 그렇게 된 사람은 없을 것이니까요. “두려워 말라”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럼 그들은 왜 그렇게 만들어졌을까요?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고, 목적과 쓰임새 없이 그 무엇도 만들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와 함께 길 가던 제자들이 예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시자, 그 사람의 소경됨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냐고 여쭈었습니다. 예수께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빚으시는 일입니다. 지금 그 일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품어 주면 됩니다. 그들을 우리의 형제자매로 존중하고 사랑해 주면 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그렇게 대해 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더 쉽게 인정하고 죄로부터 멀어지려는 각오와 노력을 하게 됩니다. 경원시하고 야단이 앞서면 반발심만 더 커질 뿐입니다. 우리를 회개로 이끈 것은 사단의 고소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었음을 잊지 마십시다.

7.
악을 미워하고 죄를 멀리 하랬다고 죄인을 멀리 하는 것은 오히려 죄를 짓는 일입니다. 예수께선 죄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셨음에도 죄를 멀리 하셨습니다. 딱 들어 맞는 예는 아닙니다만, 아직 담배를 못 끊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함께 어울려 교제할 때에 이 친구는 홀로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돌아 옵니다. 우리 중 아무도 그 친구로 인해 다시 담배를 피우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 중 아무도 그 친구로 인해 담배를 피워 보겠다 생각하는 아이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따금 그 친구더러 이젠 담배 그만 피우라 권하고 그 친구도 그 말에 수긍을 합니다. 내가 죄인을 품어 준다 하여 내가 죄인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축약되고 그 사랑은 용서를 동반해야 합니다. 명백한 죄인도 용서하라시는데, 단지 나와 다르다는 사실 만으로 정죄하고 배척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실수를 하려거든 용서 쪽에서 실수 하는 것이 백 번 나을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거듭 나고 이제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 자녀로 순종하며 살겠노라 작정하고 날마다 각오 새롭게 하는 우리도 날마다 이런 저런 죄 짓고 삽니다. 그래도 우리는 다행한 것이 긍휼을 구하는 기도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기도조차 할 수 없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러 일으키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 한 마디 건네주는 것, 그것이 우리를 그들 곁에, 그들을 우리 곁에 두신 하나님의 의도가 아닐지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말씀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던져져 있습니다. 그 말씀 앞에 저는 그 자리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제가 죄인이나이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죄에서 건져 주옵소서.

2010년 9월 7일


기쁨의 날들

2010.09.08 08: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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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한 경우나 무당이었던 분 동성애자들 창녀들 그리고 도박꾼들은 현재의 교회 시스템에서 모종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많이 몰려올수록 좋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 두손 들고 감사드려야 할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이해할수 없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세상과 너무 똑같은 사고방식들 말이죠.
요즘 한국사회는 극단적인 인간차별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일단 교회안이고 교회밖이고 부자들을 너무 좋아합니다. 부자옆에 있어봤자 본인 덕되는거 뭐 있습니까? 부자가 뭐 오뎅 국물이나 한 바가지 끼얹어 줍니까? 부자옆에 있어봤자 자기 가난한 티 밖에 나는게 없는데도 사람들은 부자라면 그저 넘어갑니다.
외모나 몸매가 뛰어난 사람이라면 애 어른 할것없이 빠져서 숨넘어 갑니다. 자기가 예뻐야지 남 예쁜것 백날 좋아해봤자 아무 소용없지 않습니까?..미인 백날 숭배해봤자 아무 덕되는게 없고 오히려 외모가 안되는 사람중에서 겸손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더 많은데도 사람들이 전부 미인에 빠져서 못생긴 사람은 목숨을 걸고라도 성형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입니다.(실제로 수술하다 죽는 사람 많음)
교회에서도 성공한 사람 사회적으로 삐까뻔쩍한 사람이 오면 누구 할것없이 관심을 가지고 호감을 가지고..그 사람이 도체데 자기에게 뭘 해 줄수 있기에..
약하고 어려운 사람 오면 외면하고 무시하고.. 그 사람이 도데체 자기에게 뭘 어쨓길래..
동성애자가 어렵게 교회문을 밀고 들어왔다면 아멘 할렐루야지 그런 것을 트집잡으면 그는 하나님께 단단히 혼날 각오를 해야겠죠.

김순희

2010.09.08 11: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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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 차근 설명하심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십니다. "성공한 사람만 교회에 다니는 더러운 세상!" 누군가가 이런 표현을 하여서 한참을 웃은 적이 있습니다. 자칫 교회가 성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기 쉬운 세대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자아성취를 위한 도구와 방편으로 이용하려는 수 많은 사람들...

언급하셨 듯 담배피우는 사람에게 담배를 좀 그만 피우라고 진정한 사랑의 권면을 할 수 있듯이 동서애자들에게도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가 품어주며 그것은 죄임을 알려주는 것이 그 영혼을 사랑하는 방법이라 생각이 듭니다. 죄인은 무한대로 사랑하고 죄는 단연코 미워해야하는 우리 성도들이기에 동성연애자들이 교회에 온다면 진실된 맘으로, 따사로운 맘으로 품어주고 위해 기도해주고 함께 죄에 대해 애통해 주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들 또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임을 확인시켜주고 그 확인 시키는 과정에 성도들의 섬김과 사랑이 녹아져 있기에 그 진심어린 사랑의 맘이 저들에게 전달되는 그 일을 우리들이 잘 감당하면 참 좋겠다 생각이 듭니다.

김순희

2010.09.08 12:31:23
*.161.88.93

필립얀시의 책에서 그런 대목을 읽었습니다. 두살짜리 딸을 자신의 생계를 위해 변태성욕자들에게 돈을 받고 파는 엄마의 이야기... 그녀에게 교회에 가자고 권유하자 가뜩이나 비참한데 그곳에 가면 더 비참해진다고 하는 대답을 하더랍니다. 교회에 나와서 더 비참해지는 사람들... 동성연애자들도 마찮가지의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부분을 김유상집사님께서 안타까와 하시면서 이 글을 쓰신 것 같습니다. 정말 어려운 주제인 듯 합니다. 죄인은 너그러이 품어주는 그 일, 그리고 죄는 단연코 미워해야하는 그 일. 그런다고 생각하면서 행동하다가 또 얼마나 상처를 안겨줄까? 또 얼마나 저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까? 그런 생각에 조심스럼이 마음의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성숙하여서 그런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참 맘이 어려워집니다. 정말 너무도 조심스런 부분인 것 같습니다.

김유상

2010.09.08 21:03:56
*.234.24.71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이 글을 맺었습니다. 굳이 동성애자들을 지적하여 거론한 것은, 아마도 우리 기독교인들에겐 다른 어떤 죄보다 동성애 죄가 가장 중한 죄로 여김을 받고, 또 그래서 가장 경원시 되고 있는 죄인 듯해서 입니다. 그런데 제 자신의 속을 들여다 보니 여기에 대한 거의 모든 견해나 감정이, 그들로부터 직접 얻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제 개인의 선입견과 사회 통념과 일반적인 정서에 근거한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제 종교적 위선과 모순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부정하면 저 또한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그들이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라면 나 또한 결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라는, 그들과 나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었던지 궁금합니다. 우리 모두 "오직 은혜"로만 살아 있고 살아 갈 사람들임을 다시 한 번 머리 속에 마음 속에 새겨 보았습니다.

하람맘

2010.09.13 01:25:02
*.163.11.235

김순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목사님도 항상 강조하시는 죄인은 용서하되 죄는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는...동서애자를 돌로칠 사람이 있겠습니까? 교회에 나온 동성애자들이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왜 동성애가 나쁜지 알게되면 스스로 그 죄를 느우치는 것이 아닐까요? 담배를 피우는 사람때문에 담배를 피우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면 얼마나 몸에 해로운지 알기 때문에 죽음으로 가는 길을 막아보려 담배 끊는 것을 권유하는 것이지요... 같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미워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인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 안타깝고 아이들이나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위에서 언급하신 것 처럼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밝은 부분이 많습니다. 너도 나도 죄인이니 모두 벌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지만 그것 조차도 용서하시는 주님앞에 거룩하게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거룩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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