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

조회 수 510 추천 수 1 2015.03.24 19:59:34
"충성!"

거수경례와 함께 큰 소리로 외쳐지는 이 말이 많은 한국인, 특히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에겐 어떻게 이해될까? "죽기까지 충성하라" 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의 머리 속엔 어떤 그림이 떠오를까? "까라면 까!" "절대 복종!" "상명하복" 이런 말들이 함께 떠오르지는 않을까? 마음에서 우러난 충(忠)과 성(誠)이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과 신분과 지위 때문에, 불이행에 따르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마지못해, 이를 악물고 외치는 충성이 아닐까? 그들의 충성을 영어로 옮기면 fidelity혹은 loyalty가 무난할 것이다.

그런데 개역/개역개정 한글 성경에서 갈라디아서 5:22절에서 "충성"으로 옮긴 헬라어 πιστις는 영어로는 faith혹은 faithfulness로 번역되어 있다. fidelity가 아니다. 신약에서 227곳에서 사용된 이 말은 대부분 믿음으로 번역되었는데 오직 여기에서만 충성으로 번역되어 있다. 아마도 초기 한글 성경  번역자들이 참고한 중국어 성경이 그렇게 번역하였거나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어 성경엔 信實로 번역되어 있다) 당시의 번역자들이 믿음의 헌신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그렇게 번역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문맥상 믿음직함 혹은 신실함으로 번역되었어야 할 이 말이 (표준 새번역 성경과 우리말 성경에서는 각각 신실, 신실함으로 옮겨져 있다) 충성으로 번역됨에 따라, 오늘날의 신자들은 이 말을 믿음과는 상관없는 막무가내식 복종으로,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아무런 판단도 말고 “충성!”으로 이해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그 말을 일부 못된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목사에게 교회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라는 의미라 가르칠 근거를 제공한 것은 아닌지...

충성은 대상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헌신된 마음과 복종만을 요구할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믿음이 먼저 요구된다. 복종은 그 분에 대한 믿음의 자연스런 결과이지 믿음에 앞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무조건적인 추종을 원치 않으셨다. 냉철하게 앞뒤를 따져본 연후에야 따르라 하셨다. 내가 왜 따라야 하는지 어떤 댓가를 치르고 따라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고 따르라 하셨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그 충성은 왜 충성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내키지도 않으면서 “까라면 까!”식의, 바치라니까 바치는 충성은 아니다. 그 충성에 따르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덜컥 뛰어 들었다가 후회와 원망과 불평 속에 마지못해 입으로만 외치는 빈 충성이 아니다. 이 충성은, 그 분이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고 하고 계시고 또 하실 것인지를 명확히 알고, 우리의 충성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믿음 위에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의 지정의를 다해 바쳐지는 것이어야 한다.

2015. 02. 21

김유상

2015.03.24 20:10:13
*.35.57.93

얼마 전 사랑의교회 개혁위에서 공개를 요구한 몇몇 서류들을 공개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고도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인해 2억여 원의 범칙금이 누적되었고, 급기야 법원에서는 사랑의 교회로 집달리를 내보냈으나, 이들을 막아서서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공무집행을 막말과 함께 방해한 사랑의 교회 주연종 부목사에게서 다시금 개역 한글과 개역개정 한글 성경의 갈라디아서 5:22의 "충성"이란 번역의 폐해 사례를 보았다. 오정현 목사와 사랑의 교회에 극진히 "충성"하는 그임에도 왜 내겐 그가 전혀 성령의 사람으로 보이질 않는 건가?

아니다, 그 뜻이. 비단 충성으로 번역되었으나 바울이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든 그 말은 목사에게 충성하란 말도 심지어 예수님께 충성하란 말도 아니다. 그 말은 "피스티스 (πιστισ)" 믿음이다. 성경이 말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그런 사람은 믿음직하다. 그 사람이 말하면 틀림없어, 그 사람에게 맡기면 틀림없어란 말을 듣게 하는 신실함이다.

김형주

2015.03.28 13:20:25
*.194.141.185

안녕하세요, 집사님 .
오랫만에 들어와 집사님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교회내에서 사용되는 충성과 순종이란 단어 그 자체를 무척 좋아합니다만 이율배반적으로 실천은 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충성과 순종이란 단어가 모두 맹종이란 단어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고 사용되기 때문에 제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맹종이든 충성이든간에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공동체 생활이 매우 불편해 진다는 사실입니다.
말씀따라 충성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참 쉽지 않은 일인것 같습니다.

김유상

2015.03.31 10:21:24
*.35.57.93

반갑습니다. 맹목적 충성이나 순종을 강요하는 공동체는 거의 모두 위험한 공동체이더군요. 그런 공동체에 저는 속하고 싶지 않습니다. 충성과 순종을 의무 쪽에서  접근하면 또 하나의 율법이 되고 그 율법은 우리를 정죄 쪽으로 몰고 갈 뿐 실행이 어렵습니다. 오직 사랑 쪽에서 접근해야만 합니다. 사랑의 마음이 기꺼운 순종으로 이끌고 순종은 더 큰 기쁨과 사랑을 낳고 그렇게 선순환이 계속 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중 어느 누가 생전에 완벽한 충성과 순종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천부께서 설마 우리에게 지금 당장 완벽한 순종을 보이라 하시겠습니까. 사랑의 마음이 있느냐를 보실 겁니다. 사랑의 크기와 순종의 크기는 함께 가는 것 같습니다.

용하네

2015.10.26 18: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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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충성하라"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정확한 의미도 모른체 막연하게,

'교회에 대한 충성, 담임목사님에 대한 의리? '정도로만 이해했으니 너무나 내용없는 종교생활을 했었습니다.

개교회 이기주의, 맹신도가 양산되는 것은 우리나라 특유의  유교문화, 군대문화도 작용한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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