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 있는 것은

조회 수 144 추천 수 0 2016.09.10 16:00:25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1:20-24)

 

네 번째 수술을 받기 육 개월쯤 전에 고속도로에서 추돌사고를 당해 차가 앞뒤로 파손되어 폐차처분하기에 이르렀으나 저와 함께 타고 있던 아들 로빈은 아무런 상처조차 받지 않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받을 충격을 고스란히 다 흡수하고 "죽어버린" 차를 보며,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 떠오르면서 다시 한 번 그 크신 은혜에 감사를 드렸었지요. 그러면서 한편으론--그때 이미 네번 째 수술을 예약해 두었던 때인지라--사탄은 끊임없이 내 목숨을 노리는데 하나님께선 그때마다 날 지키신다는 생각이 들면서, 왜?란 의문이 또 들더군요. 

 

(하나님께선 절 데려가고자 하는데 그때마다 사탄이 방해하여 제가 아직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사탄은 그 능력이 제 아무리 출중하다 한들 하나님의 계획을 망칠 수 있을 정도는 아니고, 그 또한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의 재가를 먼저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욥기가 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로선 분명 죽는 것이 나은데, 죽으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서 지내며 주님의 영광을 누리며 즐길 터인데, 그동안 궁금했던 온갖 의문들에 답을 얻는 기쁨을 누릴 터인데, 왜 하나님께선 그토록 집요하게 날 이 땅에 두려 하시는가? 내가 끝내지 못한 숙제가 있는가? 더 배우고 익혀야만 하는 것들이 있는가? 천국은 어떤 소정의 필수과제들을 다 이수한 자들에게만 입장이 허용되는가? 하지만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의 교리와 상충되지 않는가?

 

그러한 의문들을 풀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 수술을 받았고, 이번에야말로 극적으로 생명을 유지했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그 의문을 묵상하다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 죽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제겐 훨씬 좋은 일이나, 제 주위 사람들에겐 제가 살아 있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처음엔 저도, 아니 이 무슨 망발스럽고 교만스런 생각이란 말인가, 사도 바울이나 되니까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내세울 거라곤 쥐뿔도 없으면서 나의 살아 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니! 내가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사람도 아니요, 말씀을 가르치는 자도 아니요, 돈이 많아 널리 구제를 배푸는 자도 아니며, 학식이 높아 후학을 양성하는 자도 아니고, 권력이 있어 잘 다스리는 자도 아니고, 가무와 기예에 능해 많은 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이도 아니고, 입담이 좋아 말로 사람들을 포복절도케 하는 자도 아니고, 용모와 풍채가 뛰어나 생긴 것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들의 눈과 맘을 즐겁게 해주는 이도 아닌데, 도대체 내가 이 땅에 살고 있음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유익이 된다는 건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유익도--제가 아무리 대단한 것을 배우고 깨우치고 누린다 하더라도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유익에는 결코 견줄 수 없다는 생각을 뒤집을 수는 없더군요. 그렇다면, 제 삶은 제가 아닌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결론을 내릴 수밖에요.

 

그런데 제가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유익이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것이 제가 선듯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려면 뭔가 거기에 걸맞는 대단한 유익을 끼칠 수 있어야 할 거란 생각과 그 생각에 따른 자격지심이 일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끼치는 유익이 굳이 대단할 필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냥 제게 주어진 분량대로이면 되리라 싶습니다. 

 

우선 당장 제 아내에겐, 당연히, 제가 수술 도중에 죽는 것보다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 있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졸지에 혼자가 되어 살아 가는 것보다야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러 가실 때까지 남편인 제가 곁에 함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유익일 것입니다. 제가 아내를 위해 뭔가 대단한 일을 해 주어서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논리는 자식들과 친구들과 교회 권속들과 제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함께 지내며 기쁠 때 함께 웃고 슬플 때 함께 울어 주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힘이 되고 보탬이 됨으로써, 함께 삶의 어려움을 나누고 신앙을 격려하고 천국 소망을 상기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큰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저를 이곳에 살게 하실지 모르지만, 살아 가는 동안에,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살겠노라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제가 큰 유익을 끼칠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제 삶을 통해 절 그리 쓰실 것입니다. 잘 하면 잘하는대로 모범의 유익을 끼칠 것이고, 못하면 못하는대로 반면교사로서의 유익을 끼치겠지요. 절 빨리 데려가는 것이 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유익하다 싶으시면 절 데려가시겠지요. 그날까진, 아직 내가 이 땅에 살고 있음이 다른 이들에게 유익한가 보다 여기며, 아무쪼록 조금이나마 더 유익을 끼치며 살자, 그렇게 스스로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다짐합니다.

 

2016.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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