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그렇게 정의내렸다. 사도 바울 또한 그의 여러 서신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독려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존귀한 존재라는 자존감 쪽으로 더 많이 적용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러한 자존감은 버림받은 느낌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또는 스스로에게서 아무런 가치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큰 힘과 위로가 될 수 있다.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토록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 삶에 대한 의욕과 기쁨이 넘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의 계명을 지키고자 노력하며, 내 이웃을, 아니 원수조차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삶으로 나아 간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자존감이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를 내세우고 찬양하는 쪽으로, 초점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로 옮겨져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들은 마치 너무 귀엽게 키워 버릇없어진 아이처럼 하나님께 막무가내 떼쓰며 조르고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며 소리를 지른다. 주세요, 주세요, 빨리 더 많이 주세요. 저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면서요.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이해하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아주 즐겁고 감격스럽게 부르게 된다. 세상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니! 성경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있지만, 네가 태어난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사랑받기 위해서란 말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가?
더러는 지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지옥의 영벌을 부인하는 쪽으로 그리고 선택 구원이 아닌 만인 구원 쪽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적용한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 고통스러운 벌을 영원토록 받게 하실 리가 없으며, 누구는 구해 주고 누구는 안 구해 주실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해 주실 것이며, 마지막 한 명이 구원되고 나면 지옥은 폐기처분될 것이라 믿는다. 또는 끝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자들은 사탄과 함께 소멸될 것이라 믿는다. 결국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고 만다. 아니,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허무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지만 이 사랑을 우리의 경험체계 속에서 이해하려 해서는 안된다.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해력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는 거룩한 하나님이라.”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의 범주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선택적 구원이, 지옥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랑을 그만큼 더 크고 깊게 만든다.
우리는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만을 구원해 주셨는지, 보잘것 없는 우리를 왜 그토록 사랑하시는지를. 왜냐하면, 우리에겐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어떠한 이유도 조건도 자격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환란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지켜 주실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요구하기도 전에 주실 것이며, 우리를 하나님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살아 가게끔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 중에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기쁘고 당당하게 살아 가자.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는 얼마나 존귀하냐 쪽으로 빠지지 말고, 죽어 마땅한 나를 이토록 존귀하게 여겨 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가, 저 사람 또한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고 사랑하실 터이니 나 또한 그를 사랑하자는 쪽으로 가자. 그리고 그 사랑이 주는 평안을 누리자.
2011년 5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