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독 개신교는 타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왜 예수가 아니면 안된다 하는가? 왜 그렇게 배타적이고 독선적인가?
아직도 종종 기독교, 특히 개신교인들이 자주 받는 비난이다. 염려스러운 것은 기독교인 중에도 그렇게 비난내지 의문시하고 있는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속좁게 비치는 것이 싫어서일까? 사랑은 무조건 포용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상당히 이분적이다. 빛과 어둠을 구분한 것처럼 선과 악을, 참과 거짓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악을 제해 버리라 하고 거짓을 배척하라 하지 악과 거짓을 포용하라 하지 않는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절대자를 결코 알 수가 없다. 우리 각자가 알고 있는 것이 절대자의 아주 작은 단면일 것이다. 그러니 내 것만이 옳다고 우길 수는 없다. 그 모두를 종합해도 절대자의 진면모를 겨우 알까 말까이다. 절대자는 어떤 모습 어떤 이름으로도 자신을 보여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산정상에 가는 길은 하나만은 아닐 터이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느냐? 중요한 것은 내가 절대자를 찾아 가는 노력이고 과정이지 그 가는 길에 있지 않다.”
얼핏 그럴 듯한 주장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절대자와 아무런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자들에게만 먹히는 말이다.
우선 절대자, 하나님은 서울이나 에베레스트 산처럼 그 소재가 파악되어 있는 부동의 그 무엇이 아니다. 그 분은 우리와 같은 인격체이며 어디에도 계시나 어디에도 계시지 않은 듯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을 우리의 임의와 노력만으로는 결코 찾아갈 수도 만날 수도 없다. 생각해 보라. 우리 인간들마저 서로를 만나려면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해 놓아야만 하지 않은가. “나, 지리산에 있을 테니까 찾아와” 정도만 해도 우리는 어이없어 할 것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나겠단 말인가?
절대자는, 그가 우리에게 자신을 만날 방법을 일러 주지 않으면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다. 그리고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절대자를 알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그가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것 뿐이다. 그렇지 아니하고는 제 아무리 우리가 절대자에 대해 연구를 한들 비슷한 그림조차 갖을 수 없다. 그 분의 무한성과 우리의 유한성의 차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열심히 연구하면 그리고 그것을 취사종합하면 완벽에 가까운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어리석은 걸까 무모한 걸까 아니면 방자한 걸까?
일찌기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선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려 주셨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게 하셨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친히 이 땅에 사람의 몸을 빌어 예수의 이름으로 오셔서 명확하게 그 길을 제시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그 누구도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기독교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알고 있고 나아가 그 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길을 특정인에게만 제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길을 모든 사람에게 열어 두고 있다. 우리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함께 가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그것은 우리의 잘난 체에서 독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겸손과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