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 대종상을 6개나 휩쓴 한국 영화 말아톤을 난 아내와 함께 지난 주에 비디오로 보았다.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영화 속 주인공 초원이의 동생 정원이가 엄마에게 대드는 장면이다. 정원이 아빠는 일 때문에 바빠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고 엄마는 형 뒷바라지에만 정신이 팔려 자기는 뒷전이다. 당연히 그는 엄마에게 불만이 많은데, 하루는 엄마에게 불만을 터뜨린다. 자기에게도 엄마의 관심이 필요하다며 소리를 지른다. 엄마는, 멀쩡한 너가 이해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섭섭해 한다. 그러자 정원이는 형은 좋아서 저렇게 죽자고 달리기 연습을 하겠느냐고 엄마를 다그친다. 싫어도 엄마 등살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있을 거라고, 자기는 반항이라도 할 수 있지만 형은 반항도 못한다고, 그걸 생각해 봤느냐고 소리친다. 엄마는 또 초원이의 마라톤 코치에게서도 엄마의 욕심 때문에 아이를 잡지 말라는 소리를 듣는다.
나도 가벼운 다운증후군을 지니고 있는 선천성 장애아를 둔 부모이다. 아들 로빈이 다운증후군임이 염색체 조사로 확증된 이후 난 한 아름의 육아서적들을 서점에 가서 다운증후군에 관한 책들로 바꾸어 오면서 아들에 대한 많은 꿈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많은 서러운 날들을 보냈다. 아직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울음 끝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꼭 세상에 내보내셔야 하는데 내가 가장 이 아이를 잘 키워 줄 것 같아서 내게 부모 노릇을 맡긴 거라는. 아이가 서러워 운 날은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만큼 기대하고 어느만큼 포기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지켜 가는 것이. 말아톤의 초원이처럼 로빈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기에 문득 그의 정신 장애를 잊고는 정상아의 수준을 요구하며 열을 내곤 했다. 아이는 참 착해서 제 지적 능력 이상을 발휘해 보고자 안간힘을 쓰다가 스스로 안타까워 하고 좌절하고 또 내게 미안해 하곤 했다. 지금 난, 아이에게 그런 마음을 갖게 한 것이 너무도 미안해 눈물이 난다.
난 아이에게 큰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가 열심히 최선을 다 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때론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희아"의 엄마와 말아톤의 초원이 (실제 인물의 이름은 배형진) 엄마처럼 했어야 하지 않았나는 자성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욕심이라 결론짓는다. 난 그가 건강한 것으로 감사하다. 그의 예의바름과 의협심과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다. 밝고 고운 그의 심성이 감사하고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하기를 즐겨하니 그 또한 감사하다.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그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복음을 전달할 수 있기에 이르는 거다. 하지만 그 욕심 또한 이루려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사안이기에.
말아톤에서 또 하나 인상깊은 장면은 후반 클라이맥스 도입부에서 초원이가 엄마 손을 놓는 장면이다. 상당히 상징적 의미를 띈 이 장면은 아마도 이 영화의 주제일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어린 초원이는 가족과 함께 동물원에 갔는데 초원이는 그만 엄마의 손을 놓치고 잠깐 동안 미아가 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엄마는 초원이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엄마 자신조차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엄마는 아빠에게 울면서 고백한다. 그때 손을 놓았노라고. 자폐아를 키우기가 너무 힘들고 두려워 없어지기를 바랐노라고. 초원이는 엄마가 자기 손을 놓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다시는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 엄마 말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며 살아온 거였다. 그때문에 초원이는힘들면서도 힘들다 소리 못하고 엄마가 시키는대로 달리기를 해 왔는데, 엄마는 그런 속도 모른 채 초원이가 달리는 것을 좋아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목표로 맹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많은 장애아, 특히 중증 장애인들의 부모가 초원이 엄마의 그 고백에 동참할 것이다. 나 역시 한동안 내 아이가 장애아란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뭔가 잘 못 되었을 거야. 기적이란 것이 있잖아. 어느날 멀쩡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실수를 깨닫고 빨리 데려 가시면 좋겠다.
초원이가 그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그리고 정원이에게 다그침을 받고 난 후 엄마는 초원이의 마라톤을 포기하고 다시는 초원이의 손을 놓치 않겠노라고 속으로 재다짐을 한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초원이가 정말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후라는 생각은 또 못한다. 엄마는 여전히 자기 감정과 자기 생각에만 충실할 뿐 초원이의 마음을 헤아려 볼 생각은 못한다.
이따끔 로빈의 속이 궁금하다. 저 애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나? 생각이란 것을 하기나 하는 걸까? 즐겨 보는 영화 생각, 먹는 생각, 교회 생각, 제 사촌들 생각, 농구나 야구 경기 생각, 그리고 이따금 제 엄마 아빠 생각, 그런 생각들일까?
초원이가 목표로 맹연습을 해온 춘천 마라톤 개최일, 초원이는 못가게 하는 엄마 몰래 동네 마라톤 동우회의 차를 얻어 타고 마라톤에 참가한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막 달려 나가려는 초원이를 엄마가 잡고 말린다. 마라톤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하지 말라고. 초원이는 옆에서 뛰어 나가는 마라토너들을 보며 초조해 한다. 엄마의 애절한 눈빛과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원이는 엄마 손에 쥔 자기 손을 빼고 달리기 시작한다. 둘의 상처가 치유되는 순간이요 초원이가 정신적으로 독립하고 한 차례 성장을 이루는 순간이며 엄마가 아들을 품에서 떠나 보내는 순간이다. 초원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얼룩말처럼 신나게 자유롭게 코스를 달린다. 엄마는 가슴을 졸이며 초원이를 기다린다. 결국 초원이는 신기록으로 코스를 완주한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품에서 떠나 보내지 못한다. 자식은 떠나고 싶은데 떠나야 하는데 부모들이 맘 아플까 봐 주춤거리고 있다. 못내 떨치고 가는 자식들은 죄책감을 안고 떠난다. 어차피 떠나 보내야 하는데, 그래야 자식이 성장하는데 왜 우리 부모들은 자식들을 힘들게 하나? 왜 자식들에게 죄송스런 맘을 갖고 살게 하나?
로빈이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가 두 살 반이었나 보다. 뷰에나 팍에 있는 Speech and Language Development Center였다. 첫 한 주는 내가 데리고 교실까지 갔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엔 길에서 차를 세우고 혼자 교실로 찾아 가게 했다. 그는 가방을 둘러 메고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곧장 제 교실을 찾아 들어 갔다. 내 눈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들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벌써 내 품을 떠난 것 같아 아쉽기도 해서이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것이 서운했지만, 한편 안심이 되었다. 제대로 잘 키운 거야, 내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그렇게 조금씩 나는 그를 떠나 보내는 연습을 하고 그는 나를 떠나는 연습을 해왔다.
나의 소원은 아들보다 오래 사는 것이다. 옛 어른들이 들으면 이 무슨 망언이냐고 펄쩍 뛰실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은 형벌로 여겼으니까. 그러나 나처럼 장애아를 둔 부모들은 한결같이 자식이 죽을 때까지 뒤를 보살펴 주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그렇게 기도할 것이다.
나는 아들에게 빚이 많다. 그는 나보다 참을성이 더 많고 사랑이 더 많아 내게 자주 인내와 관용을 베푼다. 그는 나보다 용서가 더 빠르다. 내가 그에게 준 것이라곤 먹여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고 한, 누구나 다 하는 당연한 것 뿐이지만, (그것도 실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이다.) 그는 내게 내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었고 사람의 도리를 깨우쳐 주었으며 내게 성숙의 기회를 주었고 내 사랑을 넓혀 주었으며 무한한 기쁨을 주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치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난 늘 그에게 감사한다. 내 남은 생동안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