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를, 그림을, 낙서를 지웁니다. 지우면 그 자리에 있던 글씨가, 그림이, 낙서가 없어집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지운 자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개미가, 파리가, 바퀴벌레가 내 신경에 거슬립니다. 손가락으로 파리채로 신발짝으로 죽여 없앱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보던 일을 마저 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없앤 자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글씨와 그림과 낙서는 지운다 하는데, 개미와 파리와 바퀴벌레는 죽인다 합니다. 후자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체를 없애는 것은 지우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라는 것은 유치원생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뱃속의 아이를 지운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야, 뱃속의 아이를 죽인다고 해야 맞는 거야 라고 고쳐주지 않습니다. 외려 그렇게 바로 말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며 화를 냅니다.
태아는 생명체입니다. 심지어 개미 파리 바퀴벌레에게도 죽인다는 말을 쓰는데 태아에게는 그 말을 쓰지 못하게 하다니요. 태아는 개미만도 파리만도 바퀴벌레만도 못한가요?
지우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 지운다고 말끔히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지운” 기억은 어떻게 지우시렵니까? 술로, 마약으로, 도박으로, 일로, 방종한 생활로 지워질 것같습니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것같습니까?
“지운다”니까 정말 별 생각없이 쉽게 “지우면 되잖아.” “지울까?” “지워버려!”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올바로 표현하면 “죽이면 되잖아.” “죽일까?” “죽여버려!”입니다. 살인모의이며 살인교사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무기징역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를 두고 두 남녀가 (또는 혼자서) 그런 말을 주고 받고 있는 장면을.
11.9.2005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선 결코 용서와 구원이 불가능한데도,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드는 비참하고도 완악한 존재입니다. 이런 어리석고 치사하며 비겁한 짓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면서도 되려 자기들이 의롭다고 큰 소리치니 오히려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는 주님의 안타까운 간구만이 영원토록 진리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짧지만 여러가지로 생각케 해 주시는 글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