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한다. 사실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즐기고 싶은데, 그것이 안된다면 죽은 후에라도 아무개라는 존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았었노라는 기억이 되도록 많은 사람의 뇌리에 오래오래 남겨지길 바란다. 그러기에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지금도 변함없는 진리로 통용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남기고 싶어하는 이름은 명예로운 이름이지 추악한 이름은 아니다. 대다수는 자신의 이름 석자에 먹칠을 하여 가문에 수치를 끼치느니 차라리 무명씨로 남기를 택할 것이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무명씨로 살다 가느니 오명이나 악명으로라도 길이길이 알려지기를 원한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어려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할 관심을 받지 못하고 무시되고 소외되어 살아와 자신이 “노바디(nobody)”라는 것에 회한이 맺힌 자들일 것이다.
나는 어려서 아버지의 관심과 인정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라 주위에 친구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겨 내가 그들 곁을 한동안 떠난다면 그들이 나를 기억해 줄지에 대해 자신없어 했다. 자존심때문에 결코 겉으로 그 두려움을 표출시킨 적은 없지만—어쩌면 나 혼자라도 잘 살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언제라도 그들을 떠날 수 있노란 듯한 내 언행에서 그 두려움이 간파되었을지도 모르겠다—한때 내가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던 시절엔 정말이지 아무도 내가 이 세상에 살다 갔다는 것을 기억해 줄 사람이 없을 것만 같아 무척 외롭고 허탈하고 심지어 차라리 지금 죽어버릴까는 처참한 심경에 처했었다. 그 왜 있지 않은가, 기념사진마다 빠지지 않고 함께 찍혀 있는데,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왜 함께 사진을 찍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 내가 바로 그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토록 날 괴롭혔었다.
이십대의 한창 나이에 독신주의를 고집했던 내가 설흔 여섯의 늦은 나이에 결국 결혼을 하게 된 이면엔 여러 정황이 있었으나, 무명씨에 대한 두려움(fear of being a nobody)도 큰 작용을 했다. “너 지금은 혼자 사는 게 편하겠지. 하지만 나이 들어서 명절날을 맞아 봐라. 다들 가족들과 지내는데, 넌 찾아 오는 사람도 없고 혼자서 TV 앞에 앉아 라면이나 후루룩거리고 있는 네 초라한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렴.” 한 선배가 권하는 끔찍한 상상에 난 치를 떨었고, 그 모습은 면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누군가는 내가 죽은 후에도 날 추억하고 그리워해 주기를 원했다.
나의 그 두려움은 결혼과 연이은 득남에 의해 가셔졌다가 7년 반의—연애 기간까지 보태면 무려 10년의 관계가 어느날 느닷없이 끝나버렸을 때 다시금 나타나 나를 이따끔 쑤셔대었었다. 아들이 곁에 있긴 하나 지능이 턱없이 낮고 도대체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니 생각을 하기는 하는 건지조차 모르겠는 다운증후군 아이인지라, 그 아이가 나를 기억해 줄 듯싶지도 않았고, 십 년을 함께 하며 내게 간이라도 빼줄 것같던 아내에게도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린 이 마당에 어느 누가 날 기억해 눈물 한 방울 미소 한 모금이라도 지어줄 것같지 않았다. 그때 나는 이왕 노바디라면, 정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철저히 노바디인 곳으로 가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거나, 그것도 때론 귀찮게 여겨져 그저 죽어버리고 싶었다.
내가 그러지 못한 것은, 처음엔 순전히 아들 때문이었다. 멀쩡한 녀석이란다면 모르되 제 앞가름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아들 녀석을 생각하면 살아야 했고 노바디임을 감수해야 했다. 누군가는, 저 아이를 내게 보낸 하나님만은, 내가 저 아이를 키우며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 줄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실은 그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으면서.
그러다,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 속에서 나를 재조명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내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졌고 나는 더 이상 노바디가 아니라 섬바디(somebody)가 그것도 하나님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정녕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함이었다. 나를 괴롭히던 그 두려움으로부터도 나는 마침내 놓여 났다.
“나말고 또 누가 더 필요하냐?” 그분이 물으셨다.
“아닙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족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내 이름이 남겨질까 잊혀질까로 염려하지 않는다. 생명책에 내 이름이 남겨질까 아닐까를 염려할 뿐이다. 아니다, 실상 나는 그것도 염려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이름이 생명책에 남아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다. 걱정은 내가 그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지 않는 듯해서이다. 내 하늘 아버지의 이름에 혹시 누를 끼치는 언행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지 않은지 그것이 걱정스러울 뿐이다.
11.21.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