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는 성모 마리아가 요셉이라는 남편이 있었음에도 예수 출산 이후에도 남자를 성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숫처녀라고 믿고 가르친다. 성경의 어디에도 그 믿음을 받쳐줄 수 있는 기록이 없음에도 그렇게 믿고 가르치는 연유가 어디에 있을까? 물론 카톨릭에서 주장하듯이 그녀가 남편 요셉과 잠자리를 나누었다는 기록 또한 없다. 그러나 남편이 있는 여인이 그 남편과 잠자리를 나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굳이 기록으로 밝혀 두어야 할 일이 아니다. 남녀의 성관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최초의 명령이자 복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7, 28절을 보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어떤 복인가? 남자와 여자더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시는데 그 전에 복을 주셨으므로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 복의 내용에는 그 명령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모든 수단과 능력이 담겨 있다. 남자와 여자를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하는가?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남자만 또는 여자만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을 때에는 남녀간의 성적 결합이 상정되어 있는 것이고, 성교는 근본적으로 자녀를 주시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복의 하나인 것이다. 예리한 통찰력으로 이따끔 나를 감동시키는 “파아란 생각”의 한은경 자매가 동성애자들을 몰아 세우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성행위는 애정의 표현과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일뿐이지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이행하는 데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며 또 그럴 의도는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은경 자매는 그들을 인류를 멸망케 하는 종족이라고까지 질타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대교와 기독교—특히 카톨릭—에서는 결혼한 남녀가 피임하는 것을 막아 왔었다. 피임을 하는 까닭인즉 성적 쾌락만을 추구하겠다는 것일 터이니까.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성적 욕구나 성적 쾌락을 나 몰라라 하시거나 그러한 욕구가 나쁘다고 하시지는 않았다. 그 욕구가 있기에 상대를 더 많이 찾게 될 것이고 그 쾌락이 있기에 즐겁게 창조명령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성욕에 대해 이렇게 권고한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전 7:1-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막 12:25) 천국에는 혼인이 없고 성생활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이 땅에서 우리에게 혼인이란 제도를 주시고 성을 주셨을까? 사도 바울이 예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그의 서신에서 그 의문을 해소시켜 준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 5:32)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몸이 되어 한 마음을 이루어 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즉 우리 믿는 무리들이 그의 몸이 되어 그와 한 마음을 이루어 가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모형이라는 뜻이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단순한 종족 번식을 위한 육적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깨닫기 위한 영적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남녀간의 성적 결합은 그 둘이 한 몸을 이루는, 더 나아가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상징적 의미를 띄게 된다. 그렇기에 부부간의 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신령하고 거룩한 복으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 말은 성관계를 가질 때마다 엄숙해지거나 기도를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실은 이따끔씩 기도를 드리곤 한다.), 그것을 우리의 인간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말며, 상대를 모욕하거나 거부하거나 화풀이하는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 가자.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빌어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해 두셨다. (사7:14) 마리아는 그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간택하신 처녀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처녀 마리아에겐 정혼한 남자 요셉이 있었다. 처녀의 몸이 필요했음에도 하나님께선 왜 정혼한 처녀를 고르셨을까?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다윗에게 주신 언약에 있다. (대상 17:11-14)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어야만 했는데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다. 이렇게 두 조건이 맞추어졌고 마리아는 정혼한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마 1:18) 성령으로 수태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은 마리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을 것임에도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사실 어느 누가 그런 황당한 말을 믿을 것인가? 후일 예수가 오직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기적과 이사를 일으키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도 예수가 메시야임을 믿지 못했는데.), 분명 다른 사내가 있다고 여겼던 듯하다. 그러나 그의 심성이 착했든지 아니면 마리아를 많이 사랑했었든지 하여, 율법을 잘 알고 지키는 의로운 사람인지라 율법대로라면 마리아와 마리아를 임신시킨 사내를 돌로 쳐죽여야 마땅함을 (신 22:23-24) 알면서도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 (마 1:19) 결국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그에게 이사야의 예언을 상기시키시며 아내 데려 오기를 두려워 말라 하시자 그 말씀에 순종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가 아이를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는다. (마 2:25) 성경이 굳이 이 사실을 밝혀 둔 것은 마리아의 처녀성을 입증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가 인간 요셉의 씨를 받아 난 것일 수 있겠다는 확률을 없앰으로써 오직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처녀성은 이미 요셉이 마리아를 데려오기 전에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성경은 예수가 성령에 의해 수태하였음을 밝히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마리아가 평생을 처녀로 지냈는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 그 이후 설령 그녀가 카톨릭교의 주장대로 평생을 처녀로 지냈다 한들 또는 개신교의 주장대로 예수 출생 후 요셉과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고 아들딸 여럿 두고 살았다 한들 하나님께 무어 그리 대수로운 차이가 있겠는가?
(이상하게도 성경은 실은 예수 출생 이후로는 전혀 마리아에게—그리고 요셉에게도—관심두지 않는다. 카톨릭의 주장대로 그녀가 구령사업에 큰 역할을 맡고 있었다면 왜 성경기자들은 그녀의 활약상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그녀를 모시고 산 사도 요한조차 왜 그녀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가? 누가만이 행전 1:14에서 그녀가 사도들과 다른 여자들, 그리고 예수의 형제들과 마음을 같이 하여 간절히 기도했음을 밝힘으로써 그녀가 예수의 참 정체를 알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마리아와 요셉의 역할은 경에 기록된 예언을 이루는 데에만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의 불필요한 관심은 성경이 처음부터 목표했던 예수 그리스도로에게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는 데에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하지만 의로운 요셉의 아내가 될만큼의 좋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을 마리아가 아내로서의 마땅한 도리를 저버리고 평생을 처녀로 지냈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것은 남편에 대한 도리를 저버린 것을 지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명령과 그리고 남편과 한 몸을 이룸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깨우쳐야 하는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나는 그녀가, 기실 하나님의 아내인 셈이요 또 하나님의 어머니인 내가 어찌 하찮은 인간처럼 남편과 살을 섞고 인간의 아이를 낳고 살 수 있겠는가 내 평생을 처녀로 살리라라는 황당하고 무지한 생각을 일순이라도 품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또는 아들 예수를 통하여 그러한 어리석은 생각을 바로 잡아 주셨을 것이다. 계시록 4장 10, 11절에 보면 이십 사 장로들이 자기들의 면류관을 벗어서 예수님께 드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는 고백과 함께. 아무렴, 마리아가 그 장로들만 못할까?
여담이지만 마리아는 내게 무척 소중한 분이셨다. 내 어머니는 평생을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살다 가셨는데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자 나도 삼십 여년을 천주교인으로 살았었다. 그 긴 세월동안 난 한 번도 제대로 성경을 읽어 본 기억이 없다. 부끄럽게도 난 성경이 66권으로 이루어졌다는 기초적 사실조차 몰랐음에도 어머니의 간청에 의해 신부가 될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던 적도 있다. 내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분으로서 아주 무뚝뚝하고 엄하셨기에 아버지에게 구할 것이 있거나 드릴 말씀이 있으면 어머니를 통해 구하고 말씀드렸다. 내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은 내 아버지처럼 무섭고 어렵기만 한 분이셨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할 것이 있거나 고백할 일이 있으면 성모 마리아를 통해 구하고 고백했다. 아직도 성모송을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난 마리아에게 숱하게 묵주신공을 바쳤었다. 그녀의 아픔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 적도 많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하나님의 인도로 개신교도가 된 이후 성경을 제대로 읽기 시작하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던 것들과 불충분하게 알고 있던 것들을 많이 바로 잡았다. 워낙 그녀에 대한 기록이 적기 때문에 그녀를 제대로 알기엔 어려움이 있으나 기도하면서 묵상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제대로 알려 주실 것을 믿는다. 아직도 많은 개신교도들이 마리아를 제대로 알려고 하기보다 폄하하려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한편 아직도 대다수 천주교인들이 마리아를 지나치게 공경하는 것 또한 염려스럽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나는 마리아를 사랑한다. 그녀의 순종이 있었기에 내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나로 인해 그녀가 함께 받아야 했던 아픔과 치루어야 했던 희생과 하나님께 드린 순종이 나를 감격케 하기 때문이다.
3.9.2006